인도, 그리고 불교(48)

편집부   
입력 : 2010-08-12  | 수정 : 201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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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와 밀교)깨달음 얻기 위한 행법으로 수용돼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브라만교에서 행해지는 공희(供犧)나 푸자(puja)로 불리는 의례는 거부되었다. 공희는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오던 불의 제사(火祭)였다. 제단을 쌓은 다음 불을 피우고, 여기에 제물을 던져 넣는다. 제물은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신들에게 바쳐진다고 생각하였다. 바라문들은 이 제사를 주술의 세계 속에 정립시켰다. 제물을 바치고 신들의 은혜를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의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들에게 존경과 공물을 바치고 이로써 그 대가를 얻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중요한 재산이었던 소나 양 등 동물의 피와 고기를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문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사상가들은 브라만들이 행하고 있는 제사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동물희생과 함께 행해지는 공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살생의 덕을 강조하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불살생의 윤리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감에 따라 신에 대한 예배형식은 공희를 대신하여 푸자라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푸자는 신상(神像)을 안치하고-신상은 신 그 자체로 믿어져서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봉사와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의례를 통하여 물, 향, 꽃, 불, 음식물 등을 공양한다. 신상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며, 더울 때는 부채로 부치고 큰 사원에서는 춤이 봉납(奉納)되는 경우도 있다. 푸자에 의해 신들과 주고받음이라는 성격은 없으며, 오로지 존경과 봉사만을 본질로 한다. 

붓다는 방호주(防護呪)나 심성의 변화를 위한 몇몇의 주문은 허락하였지만, 대개의 주문과 브라만의 주술적인 의례는 금하였다. 당시에 의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배행위는 있었다. 붓다나 연장자인 비구에 대하여 그 제자나 재가신자들은 합장으로 경의를 표하였으며, 윗사람의 두 발을 자신의 두 손으로 받들어 경의를 표하였다. 이러한 예배행위는 존경의 뜻을 표하는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일 뿐 의례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붓다 입멸 후 불탑이 세워지면서 불탑 둘레를 오른 쪽으로 3바퀴 돌고, 5체(이마, 양 무릎, 양 팔굼치)를 땅에 댄 채로 예배했다. 동시에 힌두교의 푸자방식이 도입되어 향, 꽃, 물, 음식물 등을 바치거나, 후에는 가무음곡도 공양하였음이 산치지방의 조각에서 확인되고 있다.

2세기 초엽 희랍조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교미술이 쿠샨(Kushanans)왕조 제3대 카니시카(Kanishka·A.D128∼151)왕 때 건축과 조형예술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마투라(Mathura)에서는 순인도풍의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불보살상의 조성은 그것에 대한 예배의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지겸(178∼189)이 번역한 화적다라니신주경(華積陀羅尼神呪經)에서는 "만약 선남자가 3월, 4월, 9월에 8일에서 15일까지 한 마음으로 여래의 상호를 억념하며 밤중에 화적신주를 세 번 외우고, 낮에도 또한 세 번 외운다. 보름이 되었을 때 향화(香華), 등촉(燈燭)을 불상 앞에 공양하여 닦으며 아울러 화적다라니를 외우면 그 사람은 꿈에 여래를 보게 되니 상호가 구족하고 연화좌에 앉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2세기경에 불상 앞에서 향화등촉을 공양하고 다라니를 독송하는 간단한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또한 2세기 중엽쯤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마등녀경(摩鄧女經)에는 외도의 작단법과 불의 제사 즉 호마(護摩)와 주문을 설하고 있지 않으나, 3세기 초엽 축율염(竺律炎)과 지겸이 함께 번역한 마등가경(摩登伽經)에서는 위의 내용을 모두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인도의 하급계급에 속하는 전다라종의 딸이 아난을 사모하여 주술에 능한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아난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딸의 어머니는 자신의 집안에서 소똥으로 땅바닥을 칠하고 하얗게 마른 띠풀을 깐 다음 마당 한 가운데 크고 맹렬한 불을 놓았다. 어머니는 백여덟 개의 오묘한 갈가화(渴迦花)를 가지고 주문을 외우면서, 한 바퀴 돌 때마다 곧 한 줄기씩 불 속에 던졌다. 그녀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아마리 비마리 구구미…."
이에 대해 붓다는 천안(天眼)으로 아난이 미혹하여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그를 옹호하는 주문을 외움으로써 외도의 주문을 깨뜨리고 있다.

작단법이나 호마의식 등이 마등가경에서는 외도의 의례로 표기되고 있으나, 굽타왕조에 이르러 제작된 불교경전에서는 불교의 의례로서 수용되고 있다. 인도는 4세기초 굽타왕조가 성립된 시기부터 큰 전환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 동안 수세기 동안 그리스세력, 사카족, 중앙아시아 출신의 쿠샨왕조 등이 지배해 왔으나, 동인도 마가다지방 출신인 굽타왕가에 의해 마우리야왕조 이래 처음으로 인도인에 의한 대제국이 수립된 것이다. 이는 인도 세력의 부흥으로 굽타왕조시대에는 바라문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중시되고 바라문교가 새로운 옷으로 바꾸어 입고 발전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산스크리트가 중시되면서 바라문이 주도하는 사회, 관행, 종교의례 등이 다시 중시되었으며, 카스트제도가 고정되고 청정과 부정의 관념이 강하게 의식되었다. 바라문의 권위가 증대되고 마누법전을 계승하는 여러 법전이 작성되었으며, 이러한 법전에는 바라문의 입장을 반영한 다르마가 상세히 규정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의 불교도 이러한 힌두세계의 여러 문화들을 의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5세기 초에 인도를 여행한 법현(法顯)은 마투라국의 승원에서 기악이 연주되는 예배나 공양이 행해지고, 비구가 여기에 참가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마투라에서는 매년 정해진 날에 승원 안에 조성된 사리불탑, 목련·아난탑 및 아비담·율·경탑 등에서 갖가지의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밤새도록 등을 밝히며, 예능인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제자가 출가하게 되는 인연을 공연케 하였다. 또한 파탈리푸트라에서 매년 음력 첫째 달 여드렛날에 거행되는 불사를 기술하고 있다. 4륜 수레 위에 탑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를 덮은 무명 헝겊에 신들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사방의 감실에는 좌불을 안치하고 협시보살이 지켜선다. 이러한 수레가 20여대 가까이 있는데, 모두 장식이 다르다. 불사를 거행하는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음악과 춤을 봉납하고 향과 꽃을 바친다. "이윽고 바라문이 와서 부처를 초청하면 부처는 한 발, 한 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이틀 밤을 지낸다. 그날 밤은 밤새도록 등을 밝히고 기악을 봉납하여 공양한다." 이러한 법현의 기록은 예배나 의례가 힌두교도를 포함한 일반인들의 참여 속에 불교 승원을 중심으로 성행하고 있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굽타시대 말기인 462년에 담요(曇曜)가 번역한 대길의신주경(大吉義神呪經)에서는 힌두교에서 비롯된 여러 존자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그 각각에 대하여 기원의 내용을 달리하는 호마공양법을 적어 놓고 있다.
"불상 앞에 모든 하늘, 용왕의 형상과 다른 귀신의 형상을 그리고 소의 똥을 땅에 바르고 일곱 겹의 경계를 만들며, 경계한 도량의 중앙에 꽃다발을 놓고 101 가지의 향을 사르되 부처님을 위하여는 소합향을 태울 것이며, 살사뢰사향은 마혜수라천에게 주고 돌가향은 범천에게 주고…(중략)이와 같이 101 가지의 향을 사르되 각각 그 천왕의 형상 앞에서 태워야 하느니라."

이로 하여 베다시대 이래 불의 제사인 호마는 분명한 형태로 불교의례 속에 수용되었다. 더 나아가 양대(梁代·502∼557) 실역(失譯)인 모리만다라주경(牟梨曼陀羅呪經)에서는 중앙에 부처를 그리고 우측에 12개의 팔을 지닌 금강상(金剛像), 좌측에는 16개의 팔을 지닌 마니벌절라보살을 그리며, 3존(尊)의 주변에는 여러 신들을 그리는 화상법(畵像法)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작단법(作壇法), 결계법(結界法), 입도량작법(入道場作法), 호마법 등도 서술하고 있다. 이는 5세기 무렵까지는 이러한 의례들이 정비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법들은 직접적으로는 현세의 이익을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으나, 점차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이들 작법은 만다라라는 체계 속에서 밀교의 수행법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김치온(명운)/ 진각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