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본 회당사상 1

편집부   
입력 : 2013-07-05  | 수정 : 201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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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의 인연


한 사람의 생애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履歷)을 총칭(總稱)하여 일컫는 말이다. 한 생애 동안의 이력이 지닌 유기적(有機的)인 체계는 개인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력과 언설(言說) 등이 품고 있는 생각이나 정신의 체계를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역사적 사실은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가 역사가 아니다. 그 사실의 의미를 유기적, 시대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할 때 역사가 된다. 역사는 사실의 낙엽을 모은 것이 아니라, 그 낙엽이 유기적 입장에서 관계를 가질 때 역사가 된다. 또한 사실이라는 낙엽의 유기적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시대적 상황에서 재해석 될 때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질 때 진정한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의 체계적 이해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역사적 사실이 현재라는 상황에서 의미를 가질 때, 현재와 소통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여 갈 것이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생애를 이루는 이력이 품고 있는 의미를 찾아서 해석할 때, 그 생애는 현재에 소통하면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생애의 이력으로서 연보(年譜)를 미련하고, 그 연보에 따라서 생애의 의미를 추출하여 체계화하게 된다. 그리고 생애의 이력, 즉 연보의 내용에 따라서 생애의 주기(週期)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 다음 생애가 담고 있는 의미의 발견, 즉 이력을 해석하여 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의 이력에서 일화(逸話)는 생애의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화는 삶의 구체적 행위의 숨어 있는 이야기로서 인생에 대한 생각, 즉 그 사람의 인생관, 삶의 가치, 나아가 생활의 습관 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일화를 찾아서 그 일화가 머금고 있는 의미를 찾아가면 그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을 들어다 볼 수 있고, 세상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각종을 개창한 진각성존(眞覺聖尊) 종조(宗祖) 회당(悔堂) 손규상대종사(孫珪祥大宗師) 생애의 이력 중에서  일화를 찾아서 그 의미를 해석하여 보고, 종단과 사회에 전하는 진의(眞義)를 정리하여 보려 한다. 그리고 그 진의를 통하여 회당대종사가 진각종을 개창하고 세운 성불과 현세정화의 디딤돌을 세워보려는 것이다.

진각성존의 생애는 울릉도에서 시작한다.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이법이 말하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연히 일어난 것은 없다. 근대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민간인의 거주를 허용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사람들이 왕래하고 거주하여 나라에서 순찰하고 관리하여 왔다. 그리고 1882년 울릉도를 주람순찰(周覽巡察)한 보고서는 함흥사람 사인(士人) 김석규(金錫奎) 등 한국인 14명, 일본인 7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보고에 따라서 나라에서 민간인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키는 개척명령(開拓命令)을 내렸다. 그리고 고종 20(1883)년 본격적인 개척사업을 추진하여 4척의 배에 모집 민간인 16가구 54명과 식량과 종자(種子) 등을 싣고 울릉도에 이주 정착시켰다. 그 때부터 중앙정부는 울릉도를 다스리는 정식관리를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의 퇴거를 명령하였다. 울릉도의 근대사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종조 회당대종사는 경주손씨 22세손이다. 대종사의 선조는 경주에서 상주(尙州), 순흥(順興·안동), 영천, 군위를 거처 영일계전(桂田·12세조世祖 득상得尙, 송헌宋憲)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증조부(수호洙浩·1831신묘∼1889기축)의 사망은 1889년이고, 조부(병수秉秀, 1859기미∼1937정축)의 탄생은 1859년인 것을 감안하면 울릉도에 이주는 조부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확한 연대는 1883년에서 대종사의 탄생(1902) 전해인 1901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식적인 개척정책 이후 울릉도의 생활여건과 별다른 이주 모집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1883년 개척선(開拓船)을 탓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1890년과 1892년에 도민에 대한 구휼활동이 있었고, 1894년에는 흉년에 의하여 도민이 도탄에 빠진 사실을 볼 수 있다. 부친(윤섭允燮·1984갑신∼1927정묘)의 탄생이 1884년이나 출생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울릉도 이주 시기는 추정할 수 없다.

진각성존은 울릉도에서 탄생하였다. 그리고 진각종을 창종(創宗)하고 대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敎主)로 세웠다. 대비로자나부처님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널리 세상을 비추는 부처님이다. 세간에서 세상을 가장 널리 비추는 태양(일日)에 비견하여 부르는 칭호가 대일여래이다. 태양은 세상을 두루 비추어 밝히지만, 밤낮과 안팎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대일여래는 어떠한 조건과 제약도 받지 않고 중생의 심전(心田)을 비추어 밝힌다. 회당대종사의 조부는 왜 울릉도로 이주하였을까? 그 까닭은 간단하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회당대종사가 탄생하던 시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일본이 한국통치 야욕을 노골적으로 진행하여 가던 시기였고, 사회적으로는 개화의 새 기운이 무르익던 때였다. 당시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주민들의 생존이 힘들었다. 회당대종사의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한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적인 세간적 이유이다. 출세간적인 의미, 즉 연기적(緣起的) 의미로서의 이유는 무엇일까?  대종사의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한 인연계기(因緣契機)의 가운데는 회당대종사가 자리하고 있다. 진각성존의 탄생을 위한 기연(機緣)을 맺은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법계 진리의 작용이고, 전생 업력의 소산이다. 언제인가 대일여래의 큰 가르침을 전수(傳授)할 진각성존은 그래서 아침마다 가장 먼저 온 몸을 밝히는 울릉도 성인봉과 기연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불기 2446(1902)년 5월 10일 울릉도 사동(沙洞) 중령(中領) 외가에서 육신을 나투었다. 진각성존의 탄생은 곧 대일여래의 광명을 받아 중생의 심전을 밝히는 대종사의 한 생애를 예고(豫告)한 것이다. 항시 동해의 서광(瑞光)을 가장 먼저 몸에 두르는 성인봉(聖人峰)의 명칭은 미래 성인의 탄생을 짐짓 지시한 예언적 이름이 아닌가.

회당대종사의 부친은 한의(韓醫)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학문의 깊이도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선대(先代)부터 소문난 한의의 집안이었다. 그래서 조부도 주위의 병고를 많이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회당대종사도 한의에 대한 식견이 깊고 관심도 많았다. 이처럼 중생의 신병의 치유와 더불어 심병을 다스리는 이원방편(二元方便)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후에 회당대종사는 이러한 사실을 "의사는 육체병을 고치고 법신불은 정신병을 고친다"고 설하고 있다. 중생의 신병을 넘어 심병을 치유하는 일이 회당대종사의 탄생의 의미이다. 그리고 중생의 심병을 다스리는 방편은 태양의 광명이 세상에 두루 하듯이, 법계에 변만(遍滿)한 대일여래의 자비광명을 체득하는 것이다. 진각성존은 바로 중생의 심전을 다스리는 대일여래의 서원력을 받아서 동해 울릉도를 인연지(因緣地)로 삼아서 몸을 나투신 것이다. 이 인연계기를 아침 태양광명을 가장 먼저 받는 울릉도 성인봉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진각성존은 장차 대일여래의 가르침을 세상에 펼 준비활동으로서 유·소년기를 울릉도에서 보낸다.   

경정 정사 / 신덕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