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본 회당사상 2

편집부   
입력 : 2013-08-05  | 수정 :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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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한다  


회당대종사는 푸른 바다가 내려 보이는 산기슭 언덕진 곳, 지금은 금강원(金剛園)이라 부르는 사동(沙洞) 중령(中嶺)에서 탄생하였다. 종조 회당대종사의 모친은 월성김씨(양삼·良三·1883계미∼1949기축) 가문 출신으로 매우 자애롭고 사려가 깊었다. 대종사의 외가가 언제부터 울릉도에 거주하였는지 모른다. 외조부(김병두·金秉斗)가 울릉도에 거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호적도 찾을 수 없다. 대종사의 모친은 지중한 인연으로 회당대종사를 출산하고 열반에 들 때(1949년 8월 9일)까지 뒷바라지하였다. 회당대종사의 삶에는 모친의 정성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회당대종사는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세 명, 남동생이 두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첫째 남동생과 둘째 여동생은 단명하였다. 그래서 실지 2남 3녀의 장남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대다수 가정은 자녀를 많이 두었으나 단명한 경우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종사는 태어나면서 가족의 분위기에 따라서 배움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졌다. 특히 부친의 문학적 소양과 의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당대종사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찍이 배움을 시작하였다.

울릉도에는 개척이전까지 교육이 없었다. 개척 후 육지에서 글을 읽던 사람들이 서당을 열거나 필요에 따라서 훈장을 육지에서 초빙하거나 하였다. 나리서당(羅里書堂), 중저서당(中苧書堂) 등 13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제강점기에 폐쇄 당했다. 사동서당(沙洞書堂)은 사동 1리의 옥류재(玉流齋)라는 재실(齋室)에서 시작하였다. 김광호(金光鎬)라는 분이 훈장을 맡았다. 그리고 사동 2리 옥천에 옥천서당이 있었다. 박시현이라는 분이 훈장이었으며, 박시현은 북면 석포에서 서당을 차려 훈장으로 있다가 옥천으로 이주하면서 옥천서당을 설립하였다. 김광호 훈장이 옥류동에서 이주하자, 사동서당은 사동 삼리(간령)로 옮겨 간령서당(簡嶺書堂)이 되었다. 그리고 사동서당은 폐쇄되고 지금은 옥류재 터만 남아 있다. 회당대종사는 7세 때에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렇다면 대종사가 들어간 서당은 어디일까? 그간의 전언(傳言)을 검토하여 보면 사동서당으로 보여 진다. 부친의 밑에서 천자문 등을 공부하고 7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훈장 김광호가 1910년 11월 18일 도동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렇다면 사동서당의 김광호 훈장 밑에서 3년 간 공부 한 것으로 보인다. 김광호 훈장은 울릉도에 들어오기 전에 육지에서 감찰벼슬을 하였다고 하여 세칭 김 감찰로 통하였으며 울릉도 교육공로자로 여겨지고 있다.

회당대종사의 총명은 서당에서 나타난다. 지금 대종사가 7세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미완성의 한시(漢詩) 시구(詩句)가 남아 있다. 그 시구는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하고(심일당천만·心一當千萬)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질백화단청·質白畵丹靑)'라는 이구(二句)로서 미완성의 오언시(五言詩)이다. 한시는 보통 절구(絶句·사구·四句), 율시(律詩·팔구·八句), 배율(排律·십구·十句 이상) 등의 형식이 있다. 대종사의 오언시구는 어떤 형식의 일부인지 모른다. 본래 미완성의 시구인지, 아니면 일부의 시구가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7세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본래부터 미완의 시구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구가 정말로 7세에 지은 것인지, 아니면 그 으름의 시작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7세에서 9세 사이거나 아니면 13세 사이의 시작일 것이다. 첫째 김광호 훈장이 대종사 9세인 1910년에 서당을 그만 두고 신명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김광호 훈장이 서당을 떠나자 대종사도 서당의 수학을 그만 두었다면 9세까지 서당생활을 하였다. 또는 간령으로 옮겨 새롭게 문을 연 간령서당이나 아니면 다른 서당에서 계속 공부하였다면 13세까지 서당의 수학을 하였을 것이다. 대종사는 1915년 14세(4월 2일)에 울릉보통학교(鬱陵普通學校)에 입학하였기 때문이다.

대종사의 시구는 대종사의 삶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구에는 불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이 시구가 본래 시의 전반부인지 후반부인지는 모른다. 마치 설산동자가 무상게(無常偈)를 들을 때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갈구하던 말씀, 그러나 미완성의 말씀을 모두 듣기 위해 살신(殺身)의 깊은 믿음을 보이던 설산동자, 우리 진언행자의 그런 신심(信心)이 있어야 미완성의 시구가 우리 앞에 나투어 질 것인가? 어린 종조님의 총명에 바다와 하늘이 감싸고 투영되어서 마치 명경(明鏡)같은 광경이 눈앞에 어린다. 세상만사를 품안에 안고 있는 저 푸른 바다, 온갖 모양을 다 그리고 싶은 청명한 하늘, 그것은 비단 바다와 창공이 아니라 맑고 티 없는 자신의 순수 속에서 투영되어 나온 영감이요, 심비(深秘)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종사의 생득적 순수성과 총명을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대종사는 가실 길이 예견되어 있고, 이 예견된 길의 인연 나툼이 성서 농림촌의 대각(大覺)까지 생애이다. 이 인연 나툼의 이면의 진실을 보려는 것이 우리 진언행자의 목마름이지만 대종사의 순수, 총명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 가지(加持)가 없으면 영원히 거기 그대로 있을지 모른다. 이는 곧 이 시구를 바라보는 외경(畏敬)의 심경이기도 하다.

수평선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땅에서는 지평선이 있다. 수평선은 있기는 있지만 그 지점은 없다. 어디가 수평선인가? 수평선은 있지만 보는 위치 따라서 그 위치가 변한다. 그렇지만 수평선은 있다. 대종사의 어린 시절, 이 시구의 이해를 위해서 울릉도에 가서 대종사의 생가와 어린 시절 공부하던 서당 터를 찾아보고 돌아오신 분의 말씀이다. 그 서당에 이르는 길목에서 내려 보이는 수평선, 그 수평선을 기점으로 바다의 모습이 밀려온다. 울릉도는 수평선에서 나타났다가, 수평선에서 사라져 버린다. 울릉도는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수평선만은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은 수평선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 수평선은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종조님의 총명하신 마음은 이 수평선의 비밀을 찾아 길 없는 여행, 사색의 여로를 넘나들었을 것이며, 이 수평선의 비밀을 이와 같은 시구로 읊으셨다고 측량하여 보는 것이다.

마음하나[心一]의 경지, 이는 곧 수평선의 경지가 아닌가. 거기서 만상이 나투고 사라지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곳, 그 경지, 그것이 무엇인가. 공(空)이라 할까, 진실(眞實)이라 할까, 심(心)이라 할까. 무엇이라 하여도 그것은 그렇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눈앞에 전개하고 있는 세계, 이 신비한 우주 세계의 비밀한 경지를 종조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마음하나[心一]라는 말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이 시구 중의 하나는 지식에 대한 지혜의 경지를 가리키며, 이 지혜의 경지는 안[內]의 경지를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나아가 이 지혜의 경지는 밖에 나타난 현상세계, 물질세계의 이면에 숨어있는,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보는 경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혜안(慧眼)에 비친 경지는 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생명적 교감을 나누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 하나의 생명적 흐름, 여기서 뭇 상대적 현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바탕, 이를 마음하나[心一]라 나타내신 것일까. 말이 궁하여 마음[心]이지만, 심(心)은 본래 너와 나의 상대적 마음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주 법계에 보편적으로 흐르고 있는 의식, 즉 생명성이라 보아도 된다. "의식의 흐름이 세계다"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말하면 "생명의 흐름이 이 법계다." 그래서 이 뭇 생명의 원천이요, 근원인 이 전일생명(全一生命)의 경지를 부처님의 세계라 보시고, '하나부처님'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부처)님'이다. 여기서 대종사의 마음하나(心一)의 사색은 종교적 세계를 펼쳐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정 정사 / 신덕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