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서 배우고 깨닫는다 2

편집부   
입력 : 2013-08-19  | 수정 : 201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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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탈(蟬脫·매미 허물을 벗다)

장마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이젠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다. 다행히 습도는 그리 높지 않아 그늘에 들어가면 견딜 만하다. 심인당 뒤편 숲 언덕에서 "쏴아-" 하고 울어재끼는 말매미 노래소리 또한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매미라고 해서 다 노래하지는 않는다. 오직 숫매미만이 노래를 한다. 진동판을 자극하여 소리를 내어서 씨를 받을 암매미들을 유혹한단다.

산책로 옆 나뭇가지 군데군데에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도 보인다. 문득 서울하고도 강남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지인의 불평을 떠올린다. "매미가 밤낮 없이 울어대는 통에 요즘 통 잠을 잠 수 없어요." 매미의 잘못이 아니다. 한밤중에도 환하게 켜놓은 가로등 때문에 매미가 밤을 낮으로 착각한 것이니 그건 오롯이 인간들의 잘못이며 불면은 곧 자업자득인 셈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미란 가엾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종류에 따라 어둡고 습기 찬 땅속에서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다가 완전체인 매미로 환생한 다음 많아야 한 달 정도 살다 죽어야한다니 말이다. 그나마 매미로서의 일생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새 먹이가 되거나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잡혀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법신의 세계 즉 우주의 섭리 또는 매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일생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억울해할 일이 추호도 없다. 평균 70세 이상의 수명을 누리면서도 더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과는 달리 매미는 자연이 준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부처의 삶을 산다. 매미가 부처의 삶을 산다? 자연의 섭리를 자의로 변경하거나 뭇 생명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자손을 퍼뜨린 다음 흙으로 돌아가는 매미의 삶이 부처의 삶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매미는 속으로 법신세계를 함부로 어지럽히는 우리 인간들을 책망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참매미의 경우, 나무껍질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낳은 알은 1년 후 부화하여 애벌레가 된다. 애벌레는 나무 기둥을 타고 내려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뿌리에 기생하며 수액을 빨아먹으면서 살아간다. 땅속에서 1∼2년을 지낸 후 7월 즈음 맑은 날을 골라 대체로 저녁 해질 무렵 땅위로 기어 나와 나뭇가지 등에 몸을 고정시킨 후 선탈(蟬脫) 즉 허물[脫]을 벗고 비로소 매미가 된다. 선탈이란 말은 종종 '낡은 형식을 벗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 과정은 2∼3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TV에서 방영되는 허물벗기를 보고 있노라면 당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여겨진다.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에서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고 하여 번잡한 세상일에서 떠나 즐겁게 지내는 도연(陶然)한 도교(道敎)적 모습을 그린 바 있다.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아 신선이 된다는 것은 선탈 즉 '지난날의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 나아가 '자신의 허물[過]를 참회함으로써 부처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과 무에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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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보장 각자 / 보정심인당 신교도



매미는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나르며
나는 허물을 씻고 심인을 밝힌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성 동쪽 근교 미가라마티에 계실 때이다.

여름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인 칠월 십오일, 해가 지고 달이 뜨자 부처님을 비롯한 오백 명의 대중들이 넓은 마당에 나와 마주 보고 빙 둘러앉았다. 사회자 직책을 맡은 비구가 이 모임의 뜻을 선포한다.

"대중들이여, 오늘은 참회[Pavarana·自恣]가 있는 날,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참회를 행하려하오."

부처님께서 가장 먼저 대중 앞에 나서, 대중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합장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외치셨다.

"대중들이여, 나 이제 참회를 행하노니, 내 행동과 말에서 비난할 만한 것을 보고 듣고, 또 의심나는 생각을 지니지 않았던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부디 나를 가엾이 여겨 지적해 주오. 죄를 알면 마땅히 그 죄를 제거하리니."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매순간 몸과 입과 뜻으로 죄를 짓게 된다. 그래서 계율이 필요하고 참회가 필요하다. 계율은 최소한 알고 짓는 죄를 예방하고, 참회는 모르고 지은 죄까지 누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다. 계율은 진흙 속에 빠지지 않게 하는 등불이고, 참회는 몸에 묻은 때[垢]를 씻어주는 청정수인 것이다.

자기에게 허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무지와 오만은 없다. 그러한 무지와 오만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수는 없다.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이러한 일체의 차별을 떠나는 불교는 참회를 통하여 무지와 오만을 일깨우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당대종사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시로 교리참회, 회향참회, 실천참회의 참회문을 마음에 새기라고 강조하셨다. 참회와 발원은 사람만이 가진 축복이자 은혜이다. 그리고 참회에는 반드시 서원(誓願)과 발원(發願)이 따라야 한다. 뉘우침 뒤에는 새로운 희망이 따르며 죄가 소멸한 빈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참회와 발원이라는 수행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허물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새로운 빛이 내린다. 발원은 곧 신념의 표시이며,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한 참회 뒤에 따르는 서원과 맹세, 발원을 통하여 수행자는 진리의 빛을 잃지 않게 된다.

그런즉 어찌 우리가 대중 앞에 무릎 꿇고 없는 허물조차 씻고자 하신 부처님의 참회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 어찌 우리가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죄를 다 드러내어 참회하나이다"라 하시어 무엇보다 참회를 강조하신 회당대종사님의 뜻을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참회는 지난 삶에 대한 절절한 반성이며,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발원이다. 선탈이요, 우화등선이며 무지로 가려져 있던 밝은 마음이 본래의 자리(본심·심인)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범부의 지혜인 분별지[識]를 바꾸어 무분별지인 반야지혜[佛智]를 얻는 '전식득지'(轉識得智)도 참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매미의 선탈에서 참회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듯이 순간순간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의 지혜와 진리, 불심을 구할 수 있다.

제 짝을 찾은 것일까? 매미 울음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강남 사는 지인에게 문자라도 넣어야겠다. 왜 요즘 매미들이 밤낮을 잊고 사는지 그 까닭을, 매미의 선탈이 곧 참회하는 마음의 비유라는 것을.

"실상같이 자심 알아 내 잘못을 깨달아서 지심으로 참회하고 실천함이 정도니라."(종조법어)

dukil.jpg 덕일 정사 / 보원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