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진각종 1

편집부   
입력 : 2013-08-19  | 수정 : 201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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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적 노선의 확립과정 / "교설의 전거마련 위해 역경사업 추진"

한국의 대표적 밀교중흥종단인 진각종은 서기 1947년 6월 14일 개교한 이래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재세기간 동안 밀교적 교판을 확립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확고히 정립된 체제와는 교리와 수행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진각종의 역사 속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밀교적 노선의 표방일 것이다. 진기 11(1957)년 8월 12일 회당대종사는 정진증오로써 교주를 법신 비로자나불로 하고, 육대사만삼밀을 체상용으로 하는 밀교적 교리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진각의 체상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육자진언 염송공덕의 내증결과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회당대종사는 육자진언의 염송을 통해서 오불삼십칠존과 상응한 진각의 개념, 즉 육대사만삼밀을 '대승기신론'의 체상용 삼대의 교리와 회통시켜서 교판확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진언염송을 기반으로 한 수행정진 방법에 밀교의 교리를 회통시킨 회당대종사는 교설에 대한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개교이래 처음으로 역경사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심인불교가 교판의 구체적 내용을 정립해 가는 초기단계라고 볼 수 있다.

먼저 회당대종사는 역경에 착수하여 '응화성전'(應化聖典)을 편찬하기 위한 경전들의 번역사업을 시작했고, 당시 교리의 핵심이자 교화방편인 경(經)과 해인(海印)을 종서(縱書)로 변경하는 작업을 했다. 그 중에는 '대일경', '보리심론' 등의 역경편찬사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수행에서 삼밀선정법이 행해지면서 훗날 삼밀관행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래 이 삼밀선정법은 당나라의 선무외삼장이 번역한 '무외삼장선요'에서 현밀회통(顯密會通)의 수행법으로 확립된 것이었으며, '총지법장'에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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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불교에서 '총지법장'의 편찬은 교판확립에서 육자진언의 염송과 삼밀선정, 밀교의 교리를 체계화하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시도를 한 것은 심인불교 이외의 그 어느 종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총지법장'에는 그와 같은 노력의 단면들이 '법만다라와 예참', '무외삼장선요', '다라니본심진언', '수오계팔계문', '보리심의', '유가총지교문', '밀교와 현교', '불법과 외도법' 등을 통해서 나타나 있다. 교판이 확립되어 가면서 삼밀선정을 할 때 본심진언에 오불과 금강의 제보살을 표시하여 실시하였고 모든 신교도들에게도 육자진언을 염송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심인당 장엄에서 삼십칠존의 법만다라를 서울 하왕십리 심인당에 시험적으로 부착하였으며, 염송할 때 금강지권(金剛智拳)을 결하도록 하였다. 심인불교에서 이와 같은 행법이 성립된 것은 선정과 육자진언과 삼밀행을 회통시킨 교판의 확립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선정의 개념에 결인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진언염송을 부가한 형태의 삼밀선정법은 심인불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진법은 지권인과 육자진언과 육자관을 가지고 행하는 삼밀선정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교판에서는 밀교적인 것을 충실히 연구하고, 그것을 수용하였다.

진기 12(1958)년 4월 20일에는 대구 남산동 심인당에서 경남, 북의 스승들이 참석한 가운데 '총지법장'의 배포불사가 이루어졌고, 그 해 6월 15일에는 '응화성전'이 간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심인불교는 전통답습의 불교를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교판과 정진법을 갖춘 밀교적 색채의 불교로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그 해 11월에는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심인불교의 대표단이 참가하였고, 그 후 심인불교는 교리판석에서 더 적극적으로 밀교적 색채를 심화시켜 갔다.

진기 13(1959)년 4월 27일에는 '현밀이교론'을 게송으로 만들어서 해인꽂이에 걸도록 하고, '다라니경'과 '보리심의'를 대형 석판으로 인쇄하여 각 심인당에 배부하였다. 아울러 진기 14(1960)년 2월 20일에는 다라니불교의 교리를 밝힌 '법불교'와 '응화성전' 중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 '응화방편문'을 게송으로 편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해 5월 20일 '진각교전'의 초판본을 발행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같은 달 24일에서 25일 사이에 서울 하왕십리에서 실시된 1차 임시강공과 같은 달 31일부터 다음 달 6월 1일 사이에 개최된 경북지구 임시강공에서 '법불교'와 '응화방편문'으로 구성된 '진각교전'을 전국에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심인불교는 종파의 성립에 손색이 없는 교판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해서 제도 및 법규의 정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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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간 심인불교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종파불교로써의 형색을 갖추어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개교당시의 종교활동에 밀교의 교리를 수용한 양상의 신행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당의 장엄에서 안치해야 할 주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불상의 안치문제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4일에는 인회(印會)의 회칙을 개정하여 금강회(金剛會)로 바꾸었고, 밀교의 도량정화법인 결계법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인회나 금강회는 금강계만다라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이며, 결계법(結界法)은 밀교 전반에 걸쳐서 수행처의 정화를 위해서 행하는 법이다.

이와 같이 밀교적 색채를 더해가면서 진기 16(1962)년 8월 25일에는 종명을 대한비밀불교진각종(大韓秘密佛敎眞覺宗)으로 바꾸었다. 확실하게 비밀불교라는 용어를 대내외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이 때 금강지권과 금강권의 결인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진기 17(1963)년 3월 15일에는 금강계삼십칠존을 법만다라로 부착하기로 함으로써 불상안치결의는 폐기되었다.

이와 같이 17년 간의 교화활동 속에서 종파의 교리판석을 완성하려고 부단히 정진하던 회당대종사는 진기 17(1963)년 10월 16일 열반에 들었다. 우리들은 회당대종사의 원력으로 열매를 맺은 오늘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밀교종단 진각종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ahuh.jpg  허일범 교수 / 진각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