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본 회당사상 6

편집부   
입력 : 2014-01-13  | 수정 : 201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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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을 만나다


대종사는 사업의 규모가 넓어가자 자신의 호를 춘농(春 )이라 하고, 사업장을 '춘농상회'라 하였다. 춘농상회에 사랑방을 마련하고 사업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경학(經學)도 함께 논의하면서 교유하였다. 사서(四書) 삼경(三經)을 읽고 토론하는 등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특히 주역과 풍수지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아마도 식민지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생활상을 염려한 까닭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포항에서 유력 사업가로 등장하였다. 그 즈음 대종사의 36(1937)세 9월(27일)에 조부가 돌아갔다. 조부는 가솔을 이끌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대종사의 조모가 돌아간 후(1923년)와 부친이 돌아간 후(1927)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支柱)로서 집안을 다스렸다. 또한 집안의 어른으로 처음에 포항 이사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조부가 돌아가자 모친이 조부의 극락왕생과 가정의 액운을 소멸하기 위하여 포항 죽림사(竹林寺)에서 사십구제불공을 올리겠다고 상의하였다. 대종사는 모친의 불심이 돈독하고, 한편 그 즈음 장남 등 몇 자녀가 단명한지라 동의하였다. 조부의 49제 회향일은 11월에 있었다. 모친은 아들에게 조부의 49제 회향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아들인 대종사는 흔쾌히 수락하고 49제 회향제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부의 열반은 대종사의 생애에 대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회향제가 끝나고 모친은 귀가하였다. 대종사는 주지스님과 법담을 나누고 가겠다며 뒤에 남았다. 대종사는 회향제 동참할 때 가족에게는 잠깐 갔다 오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종사는 그 이튿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 왔다. 몹시 환희한 모습으로 귀가하였다. 대종사는 주지스님과 불법, 인생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밤을 새우면서 토론하여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불법에 대하여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가족에게 그 이튿날부터 일 년 동안 새벽불공을 하겠다고 하였다. 대종사는 아마도 가까이는 자녀들의 단명과 조부의 극락왕생, 그리고 멀리는 사업과 인생에 대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일년 새벽불공이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찬물에 몸을 청결히 한 후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경전을 독송하고 절에 가서 희사를 한 후 독경과 절 등의 기도를 하고 돌아 왔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접하고 마음이 결정되면 하고야 마는 대종사의 성품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일년불공은 이처럼 용맹정진으로 지속되었다. 일년불공 회향 13일 전날 아침 아주 환희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기상 직전 꿈결에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대웅전 불전(佛前)에서 절을 하고 있던 중 부처님으로부터 둥근 불덩이가 눈부시게 굴러 와서 대종사의 가슴에 안겼다. 그렇게 꿈을 깨었다. 이렇게 해서 일년 새벽기도는 용맹정진으로 회향하였다. 불공을 회향한 며칠 후 주지스님이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예금통장을 내 놓았다. 불공 동안 희사한 금액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어서 예금하여 두었다는 것이다. 대종사는 희사한 것인데 왜 그러느냐며 불법을 위해서 알아서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자라면 더 보태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스님은 지장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대종사가 비용을 더 보태어 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하였다. 일년기도 후에도 대종사는 더욱 용맹정진을 계속하였다. 불상을 조성하기로 상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종사는 또한 상서로운 현몽(現夢)을 하였다. 대종사가 기도를 하기 위해 절을 찾아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스님이 차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대종사 가까이 와서 차에서 내리고 대종사에게 차를 타고 올라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스님은 사라져 버리고 대종사는 차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꿈을 깨었다.

대종사는 이러한 일련의 현몽이 불법에 신심을 더욱 북돋우라는 뜻으로 여겼다. 그 이듬해(38세·1939) 초이튿날 대종사는 명주옷을 새로 갈아입고 형산(兄山) 절을 찾아 기도불공을 하였다. 집에 돌아올 때 새 바지의 무릎이 헐어 있었다. 그 만큼 용맹정진을 한 것이다. 형산 절은 그저 형산에 있는 절로서 구체적으로 무슨 절인지 모른다. 대종사께서 형산 절에 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형산에는 암자 규모의 절이 몇 있기는 하다. 형산은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와 포항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본래 유금 뜰과 포항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형제산으로 불렀다. 산이 가로막아 강물이 잘 흐르지 못하여 유금 뜰에 침수가 심하자 용(龍)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서 산을 두 쪽으로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남쪽의 산을 형산, 북쪽 산을 제산이라 부르고, 그 강을 형산강이라 부르고 있다. 대종사는 형산 절의 정진에서 돌아온 후부터 가족에게도 모두 알리지 않고 구법의 길을 나섰다. 우선 기림사(祇林寺)를 비롯한 주위의 절과 스님들을 찾아 기도하고 법담을 나누는 것부터 하였다. 그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은 모른다. 대종사는 그 때부터 사업은 지인에게 맡기고 구법순례를 시작하였다. 한번 집을 나가면 열흘 정도만에 돌아오는 등 구법에 열중하였다.
대종사의 구법은 개인의 수행부터 챙기기 시작하였다. 금주(禁酒), 금연(禁煙)부터 하였다. 금연을 하면서 마치 친한 친구를 이별한 것처럼 섭섭하다고 인간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전을 인쇄,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대종사의 일과는 거의 정진과 독경, 그리고 경전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법화경'을 반포하였다. 인쇄한 경전은 주로 법보시하였다. '법화경'을 가장 먼저 인쇄한 것을 보면 그 당시도 '법화경'이 가장 신심을 일으키는 경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을 반포하였다. 그렇지만 역시 구체적인 경전이름은 확실히 모른다. 그런데 후에 참회원을 열면서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일컫는 것으로 봐서 '금강경'도 인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법화경' 외에 이름이 알려진 경이 '고왕관음경'(高王觀音經)이다. 모친과 스님의 권유로 '고왕경'을 인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녀 등 가족과 친지에게 외우도록 하였다. 사실 아들 서주(西宙) 손제석(孫製錫) 전 문교부장관은 그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고왕경'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영험담에 대한 일화를 품고 있는 경전이다. 중국 동위(東魏·원위 元魏)의 왕인 고환(顧歡)이 서사(書寫)한 관음보살의 영험경이라는 의미에서 '고왕관음경'(高王觀音經)이라 부른다. 또한 관음보살의 영험을 입어서 죽음의 위기를 면하고 연명(延命)하게 한 열한 구(句)로 되어 있는 경전이어서 '연명십구관음경'(延命十句觀音經), 또는 '연명관음경'(延命高王經) 등으로 불린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꿈속에서 받은 경이라는 뜻에서 '몽수경'(夢受經)이라고 더 알려져 있다. '연명관음경'(延命高王經)은 십구(十句) 42자의 짧은 경전이기 때문에 외워서 암송하기 좋은 경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외워서 수지하도록 권한 것이다. 일종의 관음기도의 경전이기 때문에 후에 농림촌의 관음정진과도 인연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종사의 구법정진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구법순례(求法巡禮)이고, 둘째는 구법활동(佛事活動)이다. 대종사는 구법수행을 위해서 특정의 장소나 인물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다. 자신이 알아낸 사찰과 인물을 찾아 수행정진하고 문법토론(聞法討論)을 통하여 구법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수행과 더불어 직접적 전법활동으로 이어졌다.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일,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독경을 권유하여 불법으로 인도하였다. 그 가운데 대종사가 불법의 실천을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 일화가 있다. 그것은 가계의 화재사건이다. 대종사는 39세(1940) 때는 본정(本町·상원동 504)으로 이사를 한다.

kyungjung.jpg 경정 정사 / 진각종 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