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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대도 5

편집부   
입력 : 2014-01-13  | 수정 : 201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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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진리로 상 닦는 것이 참회공부의 근본


지난 시간에는 종단 초기의 가르침 중에서 무상(無相)에 대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종단 초기에 있어서 무상의 가르침은 마음공부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종조님께서 깨달으신 심인에 속히 이르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무상의 가르침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 같은 대답이 '금강경'의 대의이기도 하다.

'금강경'의 둘째 품인 선현계청분에서 선남자 선여인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 때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라는 수보리의 두 가지 질문이 '금강경'의 핵심 주제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대답은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의 열반으로 인도하나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으니, 만약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인 불자가 보리심을 일으킨 후 항상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그 대답은 항상 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하여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데 마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질문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 좋은 일을 한다는 상(相)이나 일체의 분별심이 생겨나므로 이 같은 상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한 중생도 제도함이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 중생이라는 변함 없는 어떤 것이 있다면 중생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기에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 실체(實體)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아서 보시니 이 세상 만물 모두는 실체적인 것이 없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긴 연기적(緣起的)인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중생도 인연으로 있고, 부처님도 인연으로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중생의 인연을 지어서 중생으로 살고 있고, 부처님은 부처님이 될 인연을 지어서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중생도 부처님 될 인연을 지어 모으면 결국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며, 인연 지은 대로 변해 가는 것이니 보살이 '중생을 제도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중생'이 마치 실체적으로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내가 너[중생]를 제도했다는 상대적인 분별심 조차도 있어서는 참된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에서 상을 닦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무상(無相)이 되어야 앞서 말한 일체만물에 실체가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의 진리에 부합되기 때문이며, 그래야 지고한 선(善)에 들어가게 되고 성불의 공덕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상이 되지 않으면 상대적 선에 머무르게 되고, 이것은 보상심리 등이 있어서 그에 대한 대가나 보상 등의 집착심이 있어서 도리어 나중에 상대에 대한 원망심 등을 낳게 되어 선이 도로 악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이 되어야 상대성을 초월한 영원성(永遠性)에 들어가는 부처되는 공덕이 된다는 것이다.

보살의 모든 실천은 결국 상(相) 없는 것이 되어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모두 멸하게 된다. 종단초기 '참회공부문답'이라는 제목으로 미혹한 사람(종교사상 없는 사람)과 닦는 이(종교사상 있는 사람)의 상 닦는 공부를 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혹한 사람의 사상(四相)으로 아상은 재물, 학문, 형제, 일가를 위세하여 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인상은 인의예지신을 알아 행한다고 하여 널리 공경하지 않고 남을 천대하는 것이며, 중생상은 좋은 것은 내가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며, 수자상은 경계하여 취하고 버리는 것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닦는 이의 사상으로는 아상은 내가 능한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허물을 보고 원망하고 가벼이 여기는 것을 말하며, 인상은 겉으로만 계행을 지키며 마음에 어진 계행이 없어서 계행 파한 사람을 경만하는 것을 말하며, 중생상은 지옥은 싫어하고 천상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며, 수자상은 오래 살고 신선된다고 하여 복업을 닦으며 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공부를 '무상(無相)공부'라고 하여, 무상공부는 현상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 '자성중생을 없애는 공부'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자성중생에 아홉 가지 성질이 있으니 그것을 '태생 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약비유상약비무상'으로 들고 있다. 태생은 태중에 윤회하는 것이며, 난생은 마음이 어두워서 악습(惡習)을 짓는 것이며, 습생은 사(邪)에 따라서 마음을 질정할 수 없는 것이며, 화생은 지취(志趣)를 보아서 빠지고 떨어지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유색은 미혹하여 사심과 허영에 빠져서 무상이 세에 합당함이 없는 것이며, 무색은 마음으로만 굳게 지키고 부처님께 공경과 공양이 없는 것이며, 유상은 부처님 행과 하나님 뜻을 말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며, 무상은 무식한 사람이 좌선을 행하여 헛된 생각만 가지고 자비 희사 지혜 방편을 배우지 않고 나무와 돌과 같이 작용이 없는 것이며, 약비유상약비무상은 두 법상에 집착함이 없고 이 사이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설하고 있다. 끝으로 보살은 항상 공경하는 마음으로 중생에게 널리(자비 희사 지혜 방편을) 행하고 남을 경만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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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님 당시 필사하여 공부하신 '금강경육조해' 필사본

이 '참회공부문답'의 가르침에서 앞 부분의 미혹한 이와 닦는 이의 사상공부는 '금강경육조해'(금강경에 대한 육조혜능 스님의 풀이)를 참고로 하여 종조님께서 설하신 것이고, 뒤의 무상공부와 자성중생에 대한 해석은 종조님의 독창적인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묘유(妙有), 무주(無住), 무상(無相)을 설하여 묘유는 진리를 알아 행하여 미묘하게 실상 있음을 보는 것이며, 무주는 신상단엄과 오욕쾌락을 구하지 않고 탐하고 아낌없이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며, 무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또한 '금강경'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종조님께서 설하시고자 하는 바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단 초기에 행해졌던 '참회공부문답'의 가르침에서 이 같은 '금강경'의 상 닦는 공부를 설하신 것을 보면 종조님께서 설하신 참회공부는 바로 이 금강경의 무상(無相) 공부를 말하는 것이며, 이 참회는 일상적으로 잘못한 일을 참회하는 사참(事懺)보다도 우리들이 상(相)을 가짐으로써 참된 진리에 배반되고 잘못한 것을 참회하는 이참(理懺)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이참공부와 함께 사참공부로써 설하신 것이 십악참회이다. 그 내용과 함께 교사에서 설하신 순서를 볼 때 진리로써 상을 닦는 이참이 '금강경' 사구게 무주상법이 먼저 나와있고, 뒤에 십악참회가 았는 것을 보아도 이참이 종조님 참회사상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종과 밀교가 성불의 빠른 길이 된다는 것도 바로 진리로써 참회하는 무상사상을 근본으로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이참을 통하여 종조님께서는 속히 심인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가르침을 설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금강경'은 근본불교의 연기설을 근본으로 한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가르침을 대승불교에 와서 무자성, 공이라는 반야의 가르침으로 설한 반야경에 속하는 경전이며, 금강경에서는 모든 만물이 무자성이며 공이므로 일체의 상(相)을 가져서는 안되며 만약 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집착이며 중생이 되고, 진리의 실상을 알아서 집착을 닦아서 무상의 가르침에 머무르며 오직 중생을 이롭게 하는 차원에서 마음을 쓸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부터 설하는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 공(空), 무상(無相)이라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금강경'의 무상공부는 밀교경전이자 종단의 소의경전인 '대일경' 초품(初品)인 주심품(住心品)의 핵심사상으로 계승되고 있다. 주심품은 품의 제목 그대로 '중생의 마음 실상에 바로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참답게 알면 바로 부처님과 같은 일체지자(一切智者)라는 것'을 설하는 품이다. 여기서 또한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에 머무는 것이 주심(住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금강경'에서 설하는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진리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대일경' 구연품에서는 '아자(阿字) 본불생(本不生)'의 원리로써 '반야경'에서 설하는 무자성의 이치를 닦는 것을 설하고 있다. 결국 '대일경' 또한 반야경전인 '금강경'의 원리를 토대로 한 경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란 바로 무자성의 진리를 아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닦아야 올바르게 피안의 언덕에 건너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단의 소의경론인 '보리심론'에서 설하는 승의보리심의 내용도 일체법 무자성의 반야사상을 설하고 있다. 행원보리심은 자비를 닦는 것을 설하는 것이며, 승의보리심은 반야의 지혜를 닦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으며, 삼마지보리심에서는 밀교수행에서의 삼매를 닦는 삼밀수행의 수행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종단 초기에 종조님께서 강조하신 '금강경'의 상 닦는 공부는 '대일경'으로 이어지고, '보리심론'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종조님께서 설하신 종단 초기의 가르침이 무상의 진리가 밀교의 교리와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밀교종이 되었다고 해서 대승반야의 진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종단 초기의 상 닦는 공부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를 바르게 닦지 않는다면 밀교의 진리에도 바르게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교의 교리와 삼밀수행의 방편은 종조님께서 당신이 깨달으신 심인을 진언행자가 하루속히 깨달을 수 있는 교리방편으로 체계화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귀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 글을 통하여 진언행자들은 확인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진각종의 참회법은 '금강경'에서 설하는 바와 같은 무상진리로써 상 닦는 공부를 참회공부의 근본으로 하고[이참], 십악참회로써 함께 참회를 닦는 것이[사참] 진각종의 참회공부라는 것을 종단 초기의 가르침인 '참회공부문답'의 프린트 해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bupkyung.jpg 법경 정사 / 시복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