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47

편집부   
입력 : 2017-07-31  | 수정 :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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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일불공
“뜰에 심은 저 나무가 매일 자라나지만 항상 보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 심공 과정에도 매일 성품 좋아지나 항상 보는 사람들은 좋아진 줄 모르지만 오륙칠 년 지나보면 좋은 성품 보일지라. 이 이치를 미리 알고 가족 간에 서로 도와 꾸준하게 교를 믿고 성품 날을 지킬지라.”(‘실행론’ 제3편 제5장 제1절 다)

생명 있는 것은 자란다

“마음은 변화무쌍한 것이니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해 이랬다저랬다 한다. 개구쟁이와 같이 몸은 여기 있는데 안 가는 데가 없다.”

노 보살은 눈을 감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려니 온갖 생각들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몰려와서 덮치는 듯 했다. 처리해야할 일도, 돌봐야할 것도, 결정하고 판단해야할 일까지 차고도 넘쳤다.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일 무더기는 감고 있는 눈 뒤에서 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애써 외면해 보려 마음중생을 다른 곳으로 유배라도 보내고 싶었다.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던 터다. 치밀 듯 몰려드는 상념에 꺼들려 다녔다가는 아예 다시는 일어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주변 사람들의 윽박지름과 스스로 느끼는 강박감이 뒤섞여 가슴은 더 세게 콩닥거렸다. 눈을 감고 억지로라도 절대안정을 유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안정을 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특별히 신경을 기울여서 조절해 놓은 병실의 낮은 조도 등 온갖 분위기에 휩쓸려 억지안정을 조금은 취할 수 있었다.

이내 살포시 눈을 떴다. ‘법신으로부터 생기는 마음의 작용을 백억 화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변화무쌍한 마음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실천강령인 희사, 계행, 하심, 용맹, 염송, 지혜 등 육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들으며 실천했던 것이 먼 기억처럼 아슴푸레하게 떠오른 순간이었다. 심술을 부리듯이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면서 들쑤셔 놓던 마음중생은 어디를 갔는지 요동치던 생각이 조금은 진정되면서 얼마간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노 보살은 눈물을 훔쳐냈다. 간호를 한다고 병실에 남아있던 사람이 없어서 딱히 훔쳐보거나 흉을 볼 누군가도 없었지만 그저 약한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 싫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서둘러 닦았다. 여든 일곱. 안타까운 나이다. 젊은이들이 쓰는 말처럼 시세로 봐서야 그렇게 많다고도 할 수 없지만 적잖은 나이인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벌써 이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한숨이 새어나왔다. 20대 때는 하루가 길고도 길었다. 빨리 나이가 들고 키가 커서 어른들이 다니던 극장도 가고, 디스코텍도 가고, 남자친구 손을 잡고 1박 2일 정도의 비교적 먼 곳으로 몰래여행도 가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나이 때는 그렇게도 가지 않던 느리고 더디던 세월이지 않던가? 그 세월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벌써 흰머리를 내고 허리를, 다리를 병들게 하며 끝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상신세까지 지게 한단 말인가? 이순신 장군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다지만, 내게는 태산같은 할 일이 한 타스는 남았는데, 싶었다. 하소연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할 것인가. 이순신 장군은 장계를 올릴 임금과 나라라도 있었지만 늙음을 하소연할 상대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내 캄캄하던 것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아스라이 진실의 빛이 반짝였다. 귀울림 인 듯 들려온 소리는 육바라밀 찬가였다. 갑자기 병실이 환해지듯 하더니 마음 한 곳으로부터 환희가 일었다.

“과수원의 과일 수확을 마무리해서 분부하신 대로 처분하는 것까지 모두 잘 마쳤습니다. 중간에 한 번은 오실 줄 알았는데 어째서 한 번도 안 오셨는지요? 궁금해서 문자 드렸습니다.”

간병인이 핸드폰을 건네 주었다. 새로운 문자가 와 있었다. 노 보살이 금명간 한번 간다간다고 말만 하다가 덜컥 병원에 드러눕는 바람에 가지를 못했던 과수원 관리인이 보낸 전갈이었다.

좋으나 싫으나 한평생 더불어 살았던 남편에 대한 추억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남편은 다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도 없어 그야말로 허둥지둥 부산스럽게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남겨 놓은 유언 같은 것도 있을 리 없었지만 노 보살은 평소 생각했던 대로 자연장을 결심했다. 장소는 두 말 할 것 없이 남편이 주말농장처럼 운영하고 있던 과수원으로 택했다. 과수원이라 할 것도 없을 정도로 과실나무를 심고 보듬기에 바쁜 어설픈 곳이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정착하면서 과실나무를 돌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담아 남편이 정성을 쏟았던 곳이기에 다른 데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의 장례를 과수원 과실나무 주변 자연장으로 치른 후 그 곳에서 수확한 과실은 모두 고아원이나 양로원, 경로당 등으로 보내 남편의 영원한 봉사와 희사정신으로 기렸다. 노 보살의 배려였다. 남편에 대한 그윽한 애정이 담긴 최후의 답사이기도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몇 해 동안 노 보살은 아예 과수원을 찾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일어나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그렇다고 과수원을 처분할 수도, 내팽개칠 수만도 없어 동네 사람들을 수소문해 돌봐줄 사람을 찾아서 맡겨두었다. 그렇게 잊다시피 지내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수확할 때가 됐다는 연락을 받고 과수원을 찾았을 때 과실나무는 몰라볼 정도로 훌쩍 자라 있었다. 노 보살의 키보다도 더 컸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출장을 가거나 하는 주말이면 남편을 대신해 어린 과실나무에 거름을 주고 주변을 덮을 정도로 수북히 자란 잡초를 제거하며 보살피기에 온갖 정성을 다할 때와는 천양지차로 달라 있었다. 자주 들락거릴 때는 그렇게도 크지 않는다고 늘 투덜대던 남편의 치기 어린 푸념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 듯 했다.

남편은 한 번의 수확도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뿌리내린 과실나무의 수확을 하는 것은 노 보살 몫이었다. 처음에는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첫 수확을 하는 날 노 보살은 눈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과실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에서 처음에는 먼 세상으로 떠나보냈던 남편을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뻤다가 이내 눈앞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야 했다. 땅을 일구고 묘목을 옮겨 심으며 거름을 주는 일까지 알뜰살뜰 챙기면서 가꾸다가 열매 하나 만져보지 못하고 떠난 그 모습이 눈에 선해 도저히 입에 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노 보살은 과수원에서 나오는 모든 과실은 절대로 먹지 않을 것이며 팔지도 않겠다고……. 모두 고아원이나 양로원, 경로당 등으로 보내 남편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기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일을 수확해서 처분하는 일까지 마무리했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올해도 하나 남김 없이 다 처분하고 말았겠군요. 댁의 식구들이 먹을 정도는 남겨두시라고 신신 당부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들러서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하다가 올해도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다음부터는 식구들이 먹을 만큼은 반드시 남겨두셨다가 객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에게 보내도 주고 집으로 찾아오거든 맛있게 나눠 드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만 하다가 미처 댁의 사정을 생각지도 못하고 이 지경까지 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