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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희망을 줍다.

편집부   
입력 : 2018-04-30  | 수정 :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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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눅눅한 날은 햇볕을 찾아 나선다. 풍양면 청곡리의 삼수정을 거쳐 우망리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 길로 들어선다. 길이 쓴 동화책이다. 산과 강이 이웃이면서 서로 먼산바라기만 하는데 테크로드가 끼어들어 어깨동무한다. 길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 본래의 모습이 다치지 않게 길을 내느라 애쓴 이의 노고가 고맙기 그지없다. 휠체어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품이 넉넉하다.

통통통. 통나무 밟는 소리가 뒤따라오고 간간이 바람이 기웃거린다. 눈은 쉼 없이 주변을 살피고 귀는 산과 강, 길의 이야기를 듣는다. 외갓집 동네에 온 듯 익숙하다. 허리 굽은 외할머니가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며 어딘가에 서 계실 것 같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동화책은 쪽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마음의 습기를 훔쳐낸다. 그네의자에 산 그림자가 졸고 있다. 강물의 노래가 자장가로 들렸나 보다. 덥석 앉으니 산 그림자가 놀라 미끄러진다. 내 안의 아이가 치마를 나풀거리며 그네를 탄다. 솜사탕 같은 웃음이 강물처럼 퍼진다.

앞동산 소나무에 아버지가 메어 준 그네가 있었다. 혼자 힘으론 하늘 높이 날 수 없어 아버지를 졸라 밤중에 그네를 탔다. 신이 나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타다가 엄마가 찾으러 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야 했다. 종일 들일 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철없는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좋기만 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젠 내가 그네를 태워 드리고 싶다.

젖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바람이 얼른 다음 장을 넘긴다. 강물에 물고기가 떼 지어 다닌다. 자라 가족도 물놀이가 한창이다. 어떤 녀석은 바위에 앉아 햇볕 바라기를 한다. 한쪽 구석엔 피라미 새끼가 오불오불 모여 먹이를 찾는다.

아버지 고무신에 담긴 물고기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들일 하러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가 냇가에서 고기를 잡았다. 고무신에 가득 잡아 이름을 물으니 ‘눈쟁이’라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고기가 하도 작아 눈밖에 보이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살이 오르고 몸집이 커지면 피라미가 된다고 하셨다.

쌍절암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쌍절암은 암자가 아니라 바위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곳 동래정씨의 집성촌에 침범했다. 음력 5월 2일 사재감 참봉 정영후의 부인 청주한씨와 시누이 처녀가 따라오는 왜병을 피해 절벽 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하여 정절을 지킨 곳이다. 진퇴양난에 처한 두 여인을 도와줄 수 없었던 바위의 심정은 어땠을까. 애연한 마음에 바위를 눈으로 쓰다듬는다.

또 걷는다. 스님이 수행 중이니 조용히 하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주위를 살핀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암자가 나그네를 내려다본다. 관세암이다. 마루 끝에 스님이 그림처럼 앉아 계신다. 올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긴장한 몸을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른다. 등에는 땀이 골을 타고 흐르고 손바닥은 축축하다.

암자에 도착하니 뻣뻣하던 조금 전의 그 몸이 아니다. 활기가 돈다. 법당으로 향한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예를 올리고 나오니 스님이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햇살도 마루 가득 황금 장판을 깐다. 작은 암자라 대접할 게 변변치 않다며 차를 따른다. 노란 국화꽃이 금방 피어난 듯 동동 떠 있다. 알싸한 향기에 마음을 씻는다.

“여기가 전망대인 셈이지요. 이 길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 있어요. 이렇게 마음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는 암자도 있고요. 사실 작고 소박한 것이 울림은 깊답니다. 평평한 길을 마음 놓고 걷다가 힘드셨지요. 인생길에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지요. 갑자기 급경사와 맞닥뜨리면 순간 숨이 막힐지도 몰라요. 보는 것만으로도 지레 겁먹고 마음이 먼저 나서서 몸을 가로 막습니다. 마음과 몸은 한 몸이면서 때로는 제각각이거든요. 졸아든 마음을 달래며 한 걸음 두 걸음 가다 보면 고지에 다다르게 되지요. 아마 평지를 여유롭게 걸어온 시간이 이럴 때 힘이 될 것입니다.”

스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춧돌처럼 가슴 밑바닥에 자리 잡는다.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