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 8.법바라밀

밀교신문   
입력 : 2018-05-18  | 수정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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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하게 관찰하는 지혜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한결같지 않다. 봄철에 피어나는 하얀 목련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맑고 정갈한 꽃이라 하면서 기뻐하기도 하며,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인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각 개인의 받아들임은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붉은 장미를 보고서 좋은 일이 있었다면 그 기억이 붉은 장미를 볼 때마다 떠올라 장미가 특별히 아름다운 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미가시에 찔려서 아파본 사람은 장미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장미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보는 것만이 아니다. 김치와 같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감각은 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이렇듯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에는 내가 들어가 있다. 내가 본다거나 내가 듣는다, 내가 느낀다 등은 모두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대상을 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는 대상에 나의 기억이 겹쳐진다는 것은 나를 분별해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좋아하는 만큼 보이고, 자기 그릇만큼 보여서 주관적인 감각수용에 의해 외부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외부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라는 분별과 함께 하는 일이 된다. 

 

시각에 ‘나’라는 분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청각에도 ‘나’라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선 음악을 듣더라도 이 음악을 듣는 것이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도록 고상한 음악을 들으려고 한다. 후각, 미각, 촉각도 마찬가지이며 의식도 모두 ‘나’라는 분별에 의지한다. 그래서 이 여섯 가지 마음은 항상 자아에 물들어 있다. 자아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감각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아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은 어떻게 인식하는가? 먼저 대상이 되는 존재는 어떠한 모습인지 수많은 불교경전에 설해진 바에 의하면 모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空) 그 자체이다. 마치 김춘수시인의 시에 나오는 꽃과 같은 존재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의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내가 바라볼 때 존재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물질이든 마음이든 끊임없이 흐르는 변화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 대상을 인식할 때에 그 대상은 우리에게 존재로 다가온다. 인식은 그러한 대상에 모습을 주고 의미를 주고 명칭을 주어서 끊임없는 흐름을 정지시킨 채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며 사라지게 되어 있다.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고 모두 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과 귀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은 의식은 순수하게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전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과거 인식의 그림자로서 ‘나’라는 분별이 겹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환상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있는 것이라 착각하여 스스로 일으킨 인식에 속박된다.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속박되어 자재하지 못하니 이것을 대상을 분별하는 속박이라 한다. 주관도 환상이고 객관도 환상인데 환상인 줄 모르고 분별 속에 속아서 산다. 

즉 ‘나’라는 의식이 있으면 우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어 보는 대상마다 ‘나’라는 분별이 들어가 반응한다. 그래서 반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인식하는 내용들이 전부 다 분별망상이다. 일체의 법은 모두 허깨비 같고 꿈과 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므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져 말을 따르는 자가 말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별망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다시 우리의 의식을 수행의 주체로 활용해야 한다. 의식은 바뀌어야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통해서 깨닫기 때문이다. 의식 가운데 ‘나’라는 의식을 놓아버리고 대상을 인식하면 대상이 환상인줄 알게 된다. 환상이라고 알게 되면 ‘나’라는 의식이 힘을 잃고 소멸해버리며, 이때 인식하는 대상을 알고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자기 몸도 환상이고 보이는 세계도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물질이나 형상에 걸리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고 자유롭게 본다. 

이렇게 의식이 자유롭게 관찰하는 것을 묘관찰지라 한다. 묘(妙)란 연기하는 일체의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묘하다. 관찰이란 산란한 경계의 모습을 그치고 인연으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순수함이 익숙해지면 이전에 있었던 ‘나’라는 개념을 덧붙인 복합적 인식이 아니라 사물을 대함에 분별없이 바로 관찰이 명백해져서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지혜를 묘관찰지라고 한다. 이때 보이는 대상은 환상이면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실행론에 ‘마음이 항상 새로우면 어떠한 것이라도 항상 새로운 것을 맛볼 수 있다’고 함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의식으로 포착하는 모든 것은 그 순간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저 나름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가꾸어가며 살려가는 것은 매번 새로운 마음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묘관찰지는 서방 아미타불의 지혜로서 비로자나불의 수용지혜신을 나타내며, 그 수용신의 성격을 계승하여 법바라밀이 출생한다. '성위경'에는 법바라밀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대연화지혜삼마지지를 증득하고, 자수용인 까닭에 대연화지혜삼마지지로부터 연화광명을 유출하고,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의 객진번뇌를 맑히며,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한 까닭에 법바라밀의 형상을 이루고 비로자나여래의 뒤쪽 월륜에 머문다.


법바라밀은 바로 비로자나여래의 연화광명이 그 출생의 근거가 된다. 연화광명이 시방세계에 방사되면서 모든 중생들의 객진번뇌를 청정하게 함이 그 작용이다. '삼십칠존심요'에서도 ‘모든 부처의 법금강으로서 자성청정하기에 모든 탐염을 청정하게 한다’고 설한다. 이 법바라밀은 본래 자성이 청정한 까닭에 그 경지에서는 모든 탐욕과 물들음을 모두 청정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일체의 법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생명적 나툼이므로 청정하거나 더럽다거나 하는 상대적인 가치를 떠나 절대청정하다. 절대청정한 가운데에서 성립되는 무한한 관계는 인연의 얽매임이 아니라 즐겨야 할 기쁨이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이 수용지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법바라밀은 아미타불의 속성인 수용지혜의 활동, 즉 아미타불이 일체법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무한한 자비를 나투는 법열의 활동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 보살은 청정심의 법열의 경지를 상징하며 이것으로 대일여래에 공양한다. 이 법바라밀에서 일체의 지혜문여래가 출생하여 중생의 객진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법을 설한다. 모든 법을 언제나 새롭게 관찰하여 바른 것과 삿된 것을 정확히 분별하고, 중생의 근기를 맞추어 부사의한 능력을 나타내며, 그들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즐거워하는가에 따라 막힘이 없는 말솜씨로써 온갖 오묘한 법을 말씀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절대안락에 들어가게 하는 지혜가 법바라밀의 묘관찰지인 것이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서남각의 법바라밀천은 무량수여래에 속한다. 인계와 관상이 다 무량수여래와 같다’고 하는 것처럼, 인상은 아미타불과 같은 법계정인이다. 성신회의 존상은 육색의 천녀형으로 갈마의를 입고 미타정인을 한 형상에 불경을 담은 상자를 얹은 연화줄기를 가지고 있다. 공양회에서는 독고저를 얹은 연화줄기를 양손에 들고 있다. 기타 다른 존상과 삼매야형도 법열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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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바라밀

 


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