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알기쉬운 교리문답 77

편집부   
입력 : 2018-07-02  | 수정 :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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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양극화로 인해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해결책이 있을까요?

미세먼지와 소음이 심한 곳에 있을 때와,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에 있을 때 그 기분은 사뭇 다르지요. 이처럼 똑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행복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똑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각각의 입장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옆집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그 아이 엄마에게는 흐뭇한 선율로 들릴지 몰라도, 옆집 수험생에게는 소음이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각자의 성품이나 심리적 요건에 따라 같은 환경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요. 한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인도 성지순례를 가면 수백 명이 함께 다니는데,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호텔에서 자고 똑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어떤 이들은 연신 즐거워하고, 어떤 이들은 힘들다고 울상이라는 겁니다. 어쩌다 불편한 트럭이라도 타게 되면 “언제 또 이런 걸 타보겠냐”면서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걸 어떻게 타느냐”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어요. 이처럼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울고 계신 할아버지를 보고는 이유를 물었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 왈,
“두 아들이 있는데 큰놈이 우산장수고 작은놈이 소금장수라오. 오늘같이 해가 나면 큰놈 장사가 걱정이 되어 울고, 비가 오면 작은놈 걱정이 되어 운다오.”
그 말을 들은 나그네가 웃으며 한마디 합니다.
“영감님, 복도 참 많으십니다. 비가 오면 큰아들이 돈을 벌고, 해가 뜨면 작은아들이 돈을 버니, 날마다 돈 버는 날 아닙니까?!”
 두 아들은 그저 자기 인생을 살아갈 뿐이지요. 문제는 할아버지예요.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이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 중에 놀랍게도 불행을 더 많이 선택하는 거예요. 행복으로 살아가도 되건만, 기어이 자신을 불행 쪽으로 몰고 가서는 불행한 인생을 자처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하냐”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해요. 귀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즘 GDP가 높아졌네, 어쩌네 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이 엄청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지만, 국민 대다수인 서민들은 체감조차 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2015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보고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우리나라 상위 10% 소득은 전체의 47.77%로 집계되었어요. 쉽게 말해 국민 소득의 거의 절반은 상위 10%의 부자들이 챙긴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누리는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지옥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지옥이 뭔지 아십니까? 정답은 바로 ‘천국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지옥’이랍니다. 절대적 빈곤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상대적 빈곤이에요. 소위 많이 가진 이들도 더 많이 가진 이들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러나 조금은 내려놓고 생각해 보세요. ‘상향비교’보다는 ‘하향비교’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행복은 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 불평의 문으로 나가게 되어 있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에 대해 감사를 선택하면 감사할 일만 생기고, 반대로 불평을 선택하면 불평할 일만 생기지 않을까요?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봉건시대에는 사람의 이목(耳目)이 두려워서 그릇된 일을 할 수 없었고, 현대 자유시대에는 법신불의 은혜로써 행복하게 사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아는 죄는 사람이 다스리고 모르는 죄는 법계에서 다스린다.” (‘실행론’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