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20, 바라보다

밀교신문   
입력 : 2018-08-13  | 수정 :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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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길

kakaotalk_20170814_094604632(1)(1)(1)(1)(1)(2)(1)(4)(1)(1)(1).jpg어느 날 바쁜 출근길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에 오르고 보니 출입문 쪽은 사람들로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였고, 안쪽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좀 멀리 가야했던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실례합니다. 좀 들어갈게요.”
연신 이렇게 양해를 구하면서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사히 자리를 잡고 섰는데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강하게 의식되는 쪽을 바라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떤 여성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을 파고드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오를 텐데 멀리 가야 하는 내가 문 쪽에 서 있는 것이 오히려 민폐가 아닐까 했지요. 게다가 충분히 양해를 구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여성은 듣지 못했나 봅니다. 어쩌면 내가 그녀의 무엇인가를 불쾌하게 건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를 놀랍게 한 것은 그녀의 눈길이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런 눈길은 처음 받아봤습니다.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거나 나를 밀쳤다면 나았을 것입니다. 뭘 잘못했는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쏘아보기만 했습니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뒤통수가 따가워 나도 모르게 다시 쳐다봤는데 그녀는 여전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길에 담겨 있던 냉랭하고 사나운 기운이란….
그 때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저 눈길을 계속 받다가는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
좀 지나친 생각이었겠지만, 그 사나운 눈길을 계속 받다가는 제명을 다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눈길을 보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 내게는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 눈길과 그 행위로도 다른 생명체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언제나 중생을 향해서 말로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실하고 알차며 때에 알맞습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습니다. 의미나 형식도 완벽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혹은 보살님들은 오로지 말씀으로만 중생들을 대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바라보는 눈길도 남다릅니다. 초기경전인 <디가니까야>에 실린 ‘32상경’은 부처님의 육체적 특징 서른두 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경입니다. 그 중에 부처님의 눈과 관련한 세 가지 특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속눈썹은 길다.
*부처님 눈동자는 검푸르다.
*부처님 속눈썹은 황소 눈썹처럼 풍성하다.
우리나라 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이런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 인도 땅에서는 부처님을 이런 눈을 지닌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특징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 속눈썹이 긴 것은, 오래 전 보살로 살아가면서 보살행을 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았으며 저들을 해치거나 겁을 줄 만한 무기를 손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고 마음에 자애를 품으며 모든 생명체에게 이로운 길을 찾아 다녔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늘 겁에 질려 있기에 그런 이들을 향해 연민을 품었습니다.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호했기 때문에 그 선업의 과보로 이번 생에는 스스로도 긴 수명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속눈썹이 길다는 특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둘째, 부처님 눈동자는 검푸르며, 셋째, 속눈썹이 황소 눈썹처럼 풍성한 것도 오래 전부터 선업을 지어왔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때 눈을 흘기지 않았고 노려보지 않았으며 훔쳐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상대방을 향할 때면 그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고, 눈빛에 자애를 담아서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선업’을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지어왔기 때문에 이번 생에 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남을 바라볼 때 눈을 흘기지 않고 째려보지 않고 훔쳐보지 않는 것도 선업에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무엇인가를 하염없이 베풀고 자신의 희생하는 것만이 선업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느냐도 선업 혹은 악업으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감추고 가식적으로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선입견을 버려두고서 오직 상대방을 그가 존재하는 모습 그 자체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길에는 자애로운 기운을 담고서 말이지요. 그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해오면서 어떤 이를 만나더라도 이런 마음과 눈길로 대했다면 그는 이번 생에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늘 그를 보고 싶어 하고,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느 마을에선가 안거를 마친 뒤 떠나실 때면 언제나 사람들이 이렇게 청했습니다.
“조금만 더 우리 마을에 머물러 주십시오.”
늘 곁에서 함께 있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중생들은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떠나신다니 안타까움에 부처님이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내용은 경전에 자주 등장합니다.
세상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품은 수행자는 그 대상이 미물이라 하더라도, 원수라 하더라도 그를 향해 눈을 홀기지 않고 노려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몰래 훔쳐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눈길은 훌륭한 보시가 되기도 합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에 들어 있는 눈의 보시가 그것입니다. 무재칠시란 굳이 재물을 가지고 남에게 베풀어야만 보시가 아니며, 돈 없이도 보시를 할 수 있으니 일곱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란, 눈의 보시(眼施), 밝고 환한 얼굴로 상대방을 대하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부드러운 말을 건네는 언사시(言辭施), 몸을 일으켜서 상대방을 맞이하는 신시(身施), 기쁘고 착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심시(心施), 부모나 어른, 수행자에게 자리를 펴드리거나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 자신의 집을 내주면서 상대방을 쉬거나 묵어가게 하는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이때 눈의 보시에 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언제나 따듯한 눈으로 부모와 어른, 수행자를 바라보되 사악한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눈의 보시라고 한다. 그리하면 죽은 뒤에 청정한 눈을 얻게 될 것이요, 미래에 부처를 이루어 하늘의 눈과 부처의 눈을 얻을 것이니 이것을 첫 번째 과보라고 한다.”(<잡보장경> 제6권)
부처님께서 생애 마지막 시절, 그동안 당신이 지나셨던 도시를 마지막으로 들르신 뒤 도시를 벗어날 때 코끼리처럼 온몸을 돌려 그 도시를 지그시 바라보셨다고 합니다. 두리번거리거나 흘깃거리지 않고 코끼리처럼 온몸을 돌렸다는 것은 정면으로 그 대상을 마주보았다는 말이요, 이것은 무엇을 대하든 누구를 마주하든 그 때 그 대상이 부처님에게는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열린 마음으로 그를 향하고, 반듯하게 그를 바라보되 눈길에 분노를 담지 않고 연민을 담습니다.
그런 부처님을 마주한다면 상대방은 어떨까요? 아마도 기쁨에 가볍게 몸을 떨지도 모릅니다.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온전히 이해하려 하는 자세가 눈길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따금 지하철에서 마주 했던 그 눈길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를 향해 그런 눈길을 보낸 적은 없는지 돌이켜봅니다. 사는 게 전쟁 같은데 보살 같은 소리만 한다고 핀잔하시렵니까? 다 나처럼 힘든 사람들입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은 만큼 저 사람도 그러하겠지요. 동병상련의 따뜻한 배려를 눈길에 담아 보내보는 것 어떨까요.

20. 바라보다 삽화.jpg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