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21-웃다

밀교신문   
입력 :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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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미소에 담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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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가 셔터를 누르려다 말고 허리를 펴고 이렇게 주문할 때가 있습니다.

, 활짝 웃으세요.”

 

카메라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집니다. 웃는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묘하게 근육이 굳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인화된 사진을 볼 때 다들 활짝 웃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확실히 웃음은 주변을 기분 좋게 해줍니다. 한 사람의 행복한 미소는 옆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우리는 이것을 웃음 바이러스, 해피 바이러스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웃어라!”가 명령어가 되어버린 것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고객을 상대하든 만면에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대해야 합니다. 앞서 무척 힘들고 속이 상한 일을 겪어도 다음 번 고객 앞에서 그걸 내색하면 안 됩니다. 웃음지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이 감정 노동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웃으세요.”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요. 그럼 또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자꾸 웃으세요. 그럼 진짜 웃을 일이 생겨납니다.”

우습지도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라는 것이지요. 이걸 보면 웃음이 무척 작위적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떠했을까요?

 

초기경전을 비롯해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경전 속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얼마나 자주 웃으셨을까요? 부처님은 즐거운 일에 미소를 지으셨을까요? 행복해서 껄껄껄 호탕하게 그야말로 파안대소하셨을까요?

뜻밖에도 부처님과 당시 승가에서는 깔깔깔 껄껄껄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부처님이 활짝 웃으시거나, 그 제자들이 너무 웃어서 요절복통할 것 같았다는 문장은 단언컨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과 제자들은 웃음에 좀 인색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길을 가시다 싱긋 미소를 짓는 경우는 이따금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큰스님이셨던 제자 중에서도 문득 싱긋 미소를 짓는 일이 있습니다. 박수를 쳐대며 허리가 끊어져라 호탕하게 웃지는 않지만 어느 한 순간에 가만히, 주변 사람들이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일이 워낙 드물기 때문에 곁에 있던 제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꼭 여쭙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경전인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경)>의 문장을 소개합니다.

 

어느 때에 세존께서 길을 벗어나 어떤 장소에 이르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존자 아난다는 여래는 이유 없이 미소를 보이지 않으신다. 어떤 이유에서 미소를 보이셨을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그런 아난다는 어김없이 부처님에게 여쭙고, 부처님은 그에 대답하십니다.

아난다여, 예전에 이곳은 아주 부유하고 번영했으며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았던 대도시였다. 그 시절 이 땅에 부처님께서 나셨으니(이하 생략).”

 

이처럼 부처님이 은은하게 미소를 짓는 경우는 대체로 아주 먼 옛날 과거부처님 시절을 말씀하시려거나,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을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것이 궁금하지도 않기 때문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어떤 특별한 감흥에 사로잡혀 일부러 제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십니다. 그것이 미소라는 동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소와 관련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대중 앞에 보이시자 가섭 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게 궁금합니다. 도대체 저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든 것에 무슨 뜻이 담겨 있단 말일까? 가섭 존자는 왜 웃었고, 부처님은 말 한 마디 없이 가섭존자만이 당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하신 건 또 뭘까?

 

이심전심의 차원까지 공부가 나아가지 못했으니 이 염화시중의 미소에 담긴 사연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만, 이때 가섭 존자의 은은한 미소 역시, 보통 사람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를 상징합니다. 이 경지를 말로 표현하자면 말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저 빙긋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만으로 행동한 자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읽고 있자니 독자들은 아마 더 답답할 것 같습니다. 더 궁금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아닐까요?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의 잔잔한 미소는 사람들 마음에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저 깊은 속내는 무엇일까?

무엇이 저토록 점잖은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걸까?

 

이렇게 애가 닳게 만들면서 어떻게 하면 나도 저 미소의 뜻을 알 수 있을까?’하는 열망을 품게 만듭니다. 기분 좋게 목젖이 드러나도록 박장대소를 하진 않지만 저 은은한 미소처럼 편안한 경지에서 노닐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그 순간, 어쩌면 이것이 발심하는 때가 아닐까 합니다. 저 미소의 주인공인 부처님이나 가섭 존자 같은 아라한,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번 보면 반하고 마는 반가사유상의 경지를 자신도 얻고 싶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마리안 라프랑스의 책 <웃음의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 얼굴 밑에는 표정을 만들어내는 43가지 근육이 있다고 합니다. 이 근육들이 포개지고 교차하면서 다양한 얼굴표정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가령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칩니다.

김치~”

 

이 말을 따라서 김치라고 발음하면 웃는 표정이 되는데, 이 발음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입꼬리를 위로 당기는 큰광대뼈 근육을 자극하는 동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웃는 척 하는 김치가 아닙니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 누군가를 의식하거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자연스레 짓는 미소입니다. 이런 미소를 지을 때면 얼굴 전체가 달라집니다. 입꼬리만 올라가지 않고 볼이 함께 올라가며 두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잔잔하고 은은한 미소를 지어서 대중에게 호기심과 선망을 불러 일으켰다면, 중국으로 옮겨온 불보살님들은 기분 좋게 껄껄껄 웃는 표정입니다. 세상 근심 하나도 없이 포만감에 젖어 한없이 너그럽게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 하나 없는 듯,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 배가 불룩 나왔고,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묵직한 보따리도 옆에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고단한 사람들에게 마치 뭐가 필요하지? 나한테 말해봐. 내가 다 줄게.”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중국의 포대화상이 딱 이런 모습이며, 서양에서는 포대화상을 가리켜 웃는 붓다(Laughing Buddh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부처님을 모시면 집안에 재물이 들어온다고 해서 집집마다 사찰마다 포대화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역시 배부르고 등 따신 데에서 더 바랄 것 없는 미소가 지어진다는 뜻일까요?

 

하지만 포대화상의 푸짐한 미소보다 우리를 더 달뜨게 만드는 미소가 있습니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입니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반가사유상의 보살님처럼 알 듯 모를 듯 은은하게 지은 미소가 아닙니다. 중국의 포대화상처럼 옷자락을 다 풀어헤치고 넉넉함이 넘쳐흐르는 기름진 파안대소도 아닙니다. 둥그런 눈과 도톰한 눈 밑 살에 웃음기가 서려 있고, 양볼살은 입가의 미소로 한껏 푸짐합니다. 오른손으로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에게 두려움을 없애주겠노라고 안심을 시켜주고, 왼손으로는 바라는 것이 있는 이들에게 그 소원을 다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따뜻하고 순수하고 기분 좋게 짓는 미소가 압권입니다. 이런 미소를 얼굴에 띠지 않고 두려움을 없애주겠노라는 수인만을 하고 계셨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산마애삼존불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부처님의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세상살이에 지친 중생들은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단 한번 지어보이는 진실하고 따뜻한 미소, 그런 웃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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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