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보시를 왜 해야 하나요?

밀교신문   
입력 :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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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경전 말씀에 ‘아이 하나를 두고 다툰 두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 여인이 한 남자아이를 데려와서는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싸우자, 왕이 이렇게 명령하지요.

 

“아이 팔을 한쪽씩 붙잡고 힘껏 잡아당겨라. 아이를 빼앗는 쪽이 아이 엄마이니라.”

 

그러자 한 여인은 죽을힘을 쓰며 아이 팔을 잡아당겼고, 또 한 여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아파하는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때 왕은 아이의 친어머니를 가려내어 아이 팔을 힘껏 잡아당긴 여인을 감옥에 가두라고 판결합니다.

 

이처럼 뭐든지 힘으로 해결한다고 되지는 않습니다. 힘보다 중요한 건 바로 진정성이지요. ‘소유’ 역시 마찬가집니다. 뭐든 많이 가졌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에요. 흔히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얘기할 때 “나라는 잘사는데 국민은 가난한 나라”라는 평가를 줄곧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보면 좁은 공간에도 잘 적응하며 사는 걸 알 수 있어요.

 

일본인만큼 ‘무상(無常)’의 당체법문을 자주 접한 민족이 과연 있을까요?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드는 지진과 쓰나미의 공포는 그들에게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제행무상의 철학을 일찍부터 뇌리에 깊숙이 각인시켰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다소 융통성이 없는 면도 있지만, 대체로 낭비벽이나 허세가 심하지 않다는 장점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땅이 흔들리고 내가 사라질지 모르는데 많이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내가 가졌다고 해서 자랑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일본인의 많은 사랑을 받는 꽃인 벚꽃은 일찍 피었다가 일찍 져 버리는 게 특징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체념의 미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들의 성품을 닮은 꽃이기도 하지요.

 

모든 재앙에는 교훈이 있듯이, 지진도 그렇습니다. 어떤 일본인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진을 통해 ‘많이 가진다고 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평상시에는 누가 놀러 오면 “이 집은 왜 이리 휑해?”라고 할 정도로 가구가 없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진 당시 큰 TV, 큰 장식장, 큰 책장이 없어 다친 가족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절실히 느꼈다는 거예요. 지진이라는 경험으로 인해 되도록 크고 거한 것, 필요 이상의 것은 사지도, 원하지도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거지요.
방사능 사고를 몸소 체험한 그들……. 그 후로 얼마나 많은 불편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을까요? 사고 당시 뉴스 기사를 보니 먹는 것 하나하나 산지를 따지고, 물은 꼭 사 먹는다고 하더군요. 정말이지 피곤하고 어려운 일일 겁니다. 장을 볼 때마다 사고 이전의 평범했던 생활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가 하고 느낀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은 어쩌면 평범함 속에 행복이 있다는 작은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흑암천일는지도 몰라요.

 

의상 대사의 법어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라.”
‘간다 간다 하지만 본래 그 자리요, 닿았다 닿았다 하지만 떠난 그 자리’라는 뜻이에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소유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조 원을 벌어 놓아도 갈 때는 결국에는 빈손인 걸 알아야 해요. 돈의 위력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벌들도 역시 갈 때는 빈손으로 갑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얼마나 모았느냐가 중요한 게 결코 아니겠지요.

 

불교에서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 늘 상대에게 베풀라고 가르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기쁘게 버리는 ‘희사’의 실천을 강조하신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서 그 답을 구해 봅니다.
“보시는 자기만 가지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실행론’ 4-6-8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