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국가안위를 위해…

편집부   
입력 : 2007-07-02  | 수정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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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의 발원(發願)


서라벌 동남쪽 20여 길,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기슭. 당시 바다에서 쳐들어 올 왜적들이 경주(황성)로 들어오는 길을 막는 곳으로, 관문산성이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다. 이러한 곳 고즈넉한 새벽 산사의 어스름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간단없이 들리더니 이내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잇달아 울렸다. 원원사의 특별한 새벽예불이 시작될 찰나다.

때는 신라가 통일불사를 막 마무리한 무렵이었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간신히 달성하기는 했지만 당나라와의 힘겨운 싸움으로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걸려 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 바다 쪽에서는 왜구가 호시탐탐 탐욕의 혀를 날름거리며 위협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군신과 국가의 대사를 책임지고자 하는 지사(志士)들에 의해 세워진 원원사의 서원은 바로 이러한 당나라의 오랑캐와 왜적을 일격에 물리치고 통일신라를 영원히 번창시켜가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에 원원사의 새별예불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불사가 특별하고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안위를 발원하는 호국불사이기 때문이다.

불전사물의 울림이 잦아들자 원원사의 금당에는 명랑법사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두 아사리가 앞자리를 찾아 정좌했다. 그 뒤로 멀찌감치 대중스님들 역시 자리를 했다. 정적이 감돌았다. 법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싸늘한 기운마저 금새 달아올라 열기로 덮여지며 후끈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한 절에서 기거하는 대중스님들이라고는 하나 두 아사리를 함부로 범접할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달리 예불시간에는 특별히 더 그러했다. 하물며 일반 대중들로서야 먼발치에서라도 이 광경을 지켜볼 기회를 얻을 양이면 더 없는 법락(法樂)이요, 불은(佛恩)으로 여겼던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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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금강저와 또 다른 법구 든 손을 장삼자락 속에 감추고 고요히 앉아 있던 두 아사리가 동시에 일갈을 토했다. 진언염송이 시작됐다. 두 아사리의 진언염송은 한참동안 계속 이어졌다. 바로 문두루비법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스님들은 두 아사리가 염송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행동이 아니라 무형의 의식으로 비법이 행해진 것이다. 대중스님들로서는 언제 시작되고, 언제 마치는 의식인지조차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두 아사리가 염송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야 비로소 대중스님들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대중불사의식이 행해지는 것이다.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통일신라가 강건한 국가로 영원할 것을 염원하며 세운 원원사. 통일신라 시기부터 고려전기까지 신인종의 근본도량으로 문두루비법을 행한 밀교의 중심지였으며, 조선후기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원원사의 창건시기에 관해 정확한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은 통일신라 직후 명랑법사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등 대덕과 김유신, 김의원, 김종술 등이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라는 정도가 있을 뿐이다. 금당터 앞에 현재 남아있는 두 기의 3층석탑과 석등 또한 후대에 복원된 것이라 원원사의 창건시기를 고증할만한 자료는 못된다. 게다가 복원된 것이기는 하나 3층석탑의 탑신에 조각이 새겨진 것으로 미루어 학자들은 석탑이 8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원원사 창건설화와 탑의 양식에는 시기적으로 100여 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 또한 난감한 일이다. 무상한 세월이라지만, 흘러가 버린 역사를 거슬러 올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6호로 지정된 원원사 터에는 현재 금당터가 고스란히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그 앞에는 7m 높이의 3층석탑 2기가 좌우로 서 있다. 2005년 4월 7일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된 3층석탑에는 사천왕상(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과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있어 호국의 신주만다라를 구현한 것이라는 학설도 보인다.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하나 있다. 그리고 금당터에서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용왕을 모신 작은 누각이 있는데, 누각 내부에는 용왕 그림과 용당이라는 우물이 있다. 또 원원사 터 동쪽과 서쪽 계곡에는 4기의 부도가 나누어져 있다. 부도는 4대덕(안혜, 낭융, 광학, 대연)의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곳을 사령산(四靈山)이라 하기도 하고, 원원사를 조사암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4대덕 모두 명랑법사의 후계자인 밀교의 고승이기는 하나 광학, 대연 두 스님이 원원사의 창건에 관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의견이 있다. 그것은 두 스님이 고려 태조 때의 스님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삼국유사 신주편'과 '돌백사 주첩주각'에는 '경주 호장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아지녀요,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요,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의 아들(광학대덕과 대연삼중)이 둘 있는데 이들 형제는 모두 신인종으로 귀의했다. 장흥(후당 명종의 연호) 2년 신묘(931)년 태조를 따라 상경해 임금을 받들고 분향하며 수도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왕업을 시작할 때 해적이 와서 침범하므로 명랑과 안혜, 낭융의 후계자인 광학, 대연 등 두 대사를 청해 비법을 써서 적병을 물리치게 했다'는 것이다.

천년만년동안 영원할 것을 서원했던 나라와 사찰은 이제 역사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통일신라에까지 뿌리가 뻗어 있을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전설을 호지(護持)하듯 터를 감싸고 있는 석축 아래에는 근래에 창건된 새로운 원원사가 옛 원원사의 영화를 이을 양으로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때마침 목탁소리와 함께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염불소리가 옛 소식 한 자락을 실어오는 듯해 반갑기 그지없다.

'원원사 가는 길은 풀벌레 오늘을 울고/더불어 사는 행로 진각을 만나리니/그윽한 천불전당에 목탁소리 생동한다//달빛은 바람에 흘러 청태 낀 불탑둘레에/업보숨결 되짚으며 염주 알에 쉬노라니/고매한 사령삼장의 뜻 누리 가득 빛나네//옛 가람 홍법불도 세월 끝에 풍경 달고/비바람 건너와서 구국위법 귀감되니/혁혁한 배달 얼의 화신 청사 깃을 여민다.'

원원사 터를 찾아가는 길 어귀 바위에 새겨져 있는 오민필 시조시인의 '산사로 가는 길'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