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솟는 그리움… 아련한 흔적…

편집부   
입력 : 2007-07-02  | 수정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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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사의 자취


금광사를 창건한 명랑법사의 손길이 필시 여기까지 닿았으리라.

지금으로서 신인사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고증자료는 없으나 일본의 한 역사학자가 경주시 배반동 산 69번지 현재의 옥룡암 부근에서 발굴조사를 벌이다가 '신인사(神印寺)'라고 쓰여있는 막새기와를 찾아 확인함으로써 그의 존재는 물론 금오산 옥룡암이 신인종 관련 사찰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경주문화재를 소개하는 문화해설가 일부에서도 옥룡암이 신인종과 관계 있으며, 밀교사찰이었을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신인사'라고 쓰여있다는 막새기와는 정작 일본으로 건너가 있어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신인사지였을 법한 이곳이 또 달리 불무사(佛無寺)로 알려지고도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신라 효소왕 때 진신 석가모니부처님이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신인사지 근처에 있는 탑곡마애조상군, 일명 부처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이로 인해 효소왕이 절을 세우고 불무사라 했다'는 데 근거를 둔 견해이다. 이곳이 실제 금광사지와는 물론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 또한 신인사지로 추정해볼 만한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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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경주 남산어귀에 있는 신인사지는 부처골 근동의 탑곡이다. 현존하는 옥룡암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신인사로서의 사격을 유지하며 한때의 영화와 위용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신인사지를 찾아가는 길에는 개울을 벗하며 도열해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먼저 반긴다. 눈비가 올 때면 우산이 되고, 따가운 햇살이 내려 쬘 때는 양산이 되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울울창창 하늘을 가리고 서있다. 그러기에 푸른 자태를 드러낼 때는 푸르름으로 싱싱해서 좋고, 단풍이 들 때면 호국의 염원인양 불타는 단심(丹心)을 여과 없이 드러내 좋다. 개울을 따라 골골이 흘러내리는 청아한 계곡 물소리 또한 신인사지를 찾아 들어가며 들을 수 있는 불국정토의 성악(聖樂)이요, 해탈삼매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경주 남산 깊은 곳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휘감고 돌아 옥룡암 용왕당을 거쳐 망망대해로 흘러가는 개울물은 저 혼자서라도 신인사의 내력을 더 멀리 전하고 있겠지.

옥룡암 대웅전 앞의 매화나무를 잠시 완상하고 옆으로 돌아서면 보물 제201호(1963년 1월 21일 지정) 탑곡 마애조상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불무사의 전설을 되새기며 일명 '부처바위'를 향해 합장 예경하고 찬찬히 살피면 어느새 사방사불정토가 바로 여긴 듯 하다. 높이가 10미터에 달하고 둘레는 3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마애조상군은 크기며, 사면에 조상된 규모로 보아서 달리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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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 중 북면은 영산회상을 구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연화좌에 앉은 채 천상에서 내려오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완전히 갖춘 신라시대 목탑형식의 크고 화려한 탑 2기가 있다. 동탑은 9층이고 서탑은 7층이다. 이 가운데서 9층탑은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을 본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해 당시 목조탑 등의 형태를 추정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앉아 있는 부처님상 위에는 햇빛을 가려주는 일산 같은 것이 있고 그 위로는 비천상이 있으며, 탑 아래에는 사자 한 쌍이 호위하고 있다. 그리고 동면에는 삼존불과 공양하는 승려, 6비구의 비천상,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협시보살로 서 있다. 두 그루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에 든 듯한 스님이 있으며, 높이 4미터나 되는 기둥바위에도 스님상이 자리하고 있다. 남면 동쪽에는 또 삼존불 좌상이 있고 서쪽에는 얇은 감실 속에 여래상이 조각돼 있다. 서면에 조상된 것은 한 분의 부처님과 몇 가지 장식물을 비롯한 비천상이다. 이처럼 탑곡 마애조상군에는 4여래, 3보살, 2탑, 5승상, 1신장, 2사자, 11비천, 1가릉빈가, 1보리수 등 모두 34상이 도상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애조상군이 사방사불을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조심스럽게나마 밀엄정토를 구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탑곡 마애조상군에 비로자나부처님이 중방으로 모셔진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중방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사불을 모신 정토를 사방사불정토라 하기에 신인사의 존재가 보다 여실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옥룡암은 이와 더불어 폐질환을 앓았던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가 38세 때인 1942년, 말년을 보내며 요양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인이 머문 곳은 시가 남기 마련이듯 2004년 7월에 발굴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육사의 미발표 시조 두 편이 남아 있었던 것도 인연이다. '뵈울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와 '잠조차 없는 밤에 촉(燭)태워 안젓으니/리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저달 상기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란 시조는 이육사가 쓴 여러 가지 글 중 시조로서는 첫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기에 그리움이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