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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본 회당사상 7
[2014-01-29 14:41]

쌀 농사를 시작하다



대종사는 그 때까지 김두하가 제공한 포항동 집에서 10여 년 간 살았다. 그리고 이때 본인이 마련한 집으로 이사한 것이다. 대종사는 29세(1930) 때인 음력 9월 포항으로 옮겼다.(호적부에는 1931년 1월 27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사 후에 호적정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터가 포항면 포항동(남빈동) 487번지이다. 그 일대는 김두하 형제의 땅이 많이 있었다. 대종사는 포항에 이사한지 10년 후 39(1940)세 2월 21일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다. 그곳이 영일군 포항읍 본정(상원동) 504번지이다. 그것은 사업의 규모가 그 만큼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이즈음 대종사는 포목과 제과업을 중심으로 양돈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제과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를 당하여 공장을 다 태웠는데도 주인인 대종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걱정을 하면서 찾았다. 그런데 대종사는 죽림사 법당에서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관음정진을 하고 있었다. 제과공장의 큰 화재를 당한 와중에서도 먼저 법당을 찾아서 정진을 하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화재를 당하고 재산의 손실 앞에서 법당을 찾아서 자신을 추스르고 주위 사람들을 안심하게 한 것이다. 대종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다스려 그 상황을 잘 수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대종사의 관음정진은 '연명관음경'(延命觀音經)을 소의(所依)로 하고 있다. 이 경은 10구 42자의 극히 짧은 경으로서 '관세음(觀世音) 나무불(南無佛)'로 시작한다. '관세음을 부르면 곧 부처님에게 귀명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전은 "부처님에게 귀명하면 그대로 부처님[불佛]과 부처님의 가르침[법法],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공동체[승僧]와 인연을 맺고 살게 된다. 이처럼 불법승과 인연을 맺고 살면 늘 기쁘게 삶의 의미를 느끼며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연명관음경'(延命觀音經)은 '염념종심기(念念從心起) 염념불이심(念念不離心)'으로 끝을 맺는다. 이 부분이 대종사가 극히 중요하게 여긴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의 바로 앞에는 '조념관세음(朝念觀世音) 모념관세음(暮念觀世音)'이라는 구절이 놓여 있다. 이것은 "아침에 관세음을 염(念)하고 저녁에도 관세음을 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념념종심기'에서 '심'(心)은 '관세음을 염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념념종심기 념념불이심'은 "생각(순간) 생각(순간)이 관세음을 염하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생각(순간) 생각(순간)이 관세음을 염하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관세음을 염하는 것'은 그대로 불법승과 인연을 맺는 것이고, 결국 부처님에게 귀명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침에서 저녁까지, 즉 언제 어디서나 일상생활에서 늘 부처님의 마음(불성·佛性, 심인·心印)으로 살게 되고, 부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제과점의 화재를 당하고 대종사가 법당을 찾아서 '관세음' 정진을 한 까닭을 읽을 수 있다. 관세음을 염하면서 '념념종심기 념념불이심'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게 대종사는 수행정진을 하면서 불교의 불성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연명관음경'(延命觀音經)에서 그 실천의 길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농림촌에서의 '관세음' 정진에서 '육자진언'의 정진으로 심화(深化)하여 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종사는 관세음 염불(念佛)에서 육자진언 염송(念誦)의 수행으로 이득과정(利得過程)을 거친 것이다. 따라서 '연명관음경'(延命觀音經)의 내용에서 '관세음'을 '옴마니반메훔'으로 대치하여 수행하는 길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제과점 화재사건이후 대종사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다. 수행정진 중에서도 사업의 큰 가닥은 직접 구상하고 그 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것은 광산업이었다. 광산업은 일본이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미일전쟁(1941)을 거치면서 시행한 군비증강 정책의 하나였다. 금광탐사의 비용을 지원하고 금을 비싸게 사들이자 많은 사람들이 광산업에 뛰어 들었다. 그래서 광산업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종사가 광산업을 시작한 것은 민족자본의 문제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은 한국의 산업을 독점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광업은 90% 이상 일본인의 자본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자본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광산업의 비약적인 진흥은 일본의 획책인 것을 알고 나서 광산업을 불시에 중지하였다.

그 즈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대종사가 교화의 문을 여신 후에도 가끔씩 주위 사람들에게 언급한 일이었다. 그것은 삼[대마·大麻] 사건이다. 그 당시 삼 장사도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김두하가 먼저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종사에게 삼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 대마업에 대해서 정보가 밝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웃에 살면서 자주 대종사와도 관계가 있던 젊은이였다. 대종사는 그 사람에게 대마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대마 구입비를 받아서 대마를 구입한다면서 이북으로 가서 소식이 없었다. 대마 구입비용은 적지 않았다. 대종사는 결과적으로 대마 구입비를 갚아야 하였다. 물론 김두하는 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교화시작 이후 가끔 법문을 하면서 당시의 일을 참회하기도 하였다. 대마 구입비를 온전히 갚지 못한 것이다. 그 남은 부분이 늘 대종사의 마음에 남은 것이다. 무엇이든 갚을 것은 갚고 살아야 한다는 법문은 그래서 더 설득력을 얻게 한다. 

대종사의 수행정진은 계속되었다. 금주, 금연에 이어 불교의 생식법을 알고서 생식수행을 시작하였다. 대종사의 43(1944)세의 일이다. 생식의 시작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일본은 광산업뿐만 아니라 산미증산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본의 산미증산 정책은 1918년 일본의 쌀 부족 파동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1940년대에는 조선의 산미증산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래서 생산한 쌀은 일본으로 가져가서 국내에는 쌀이 무척 귀하였다. 대종사의 생식수행은 국민들이 겪고 있는 쌀 부족의 고통을 함께 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고향인 계전에 땅을 더 구입하여 쌀 농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생산한 쌀을 비밀리에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종사는 계전에 머물면서 약초를 심고 동네 사람들에게 유교, 불교 등의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수행을 하면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약초도 기르고 교육도 하였다. 후에 첫 교화지로서 계전을 택한 것도 이러한 경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종사는 사회와 나라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종사는 젊은 시절 유교경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 특히 '대학'(大學) 경문(經文) 첫 장의 소위 삼대강령과 팔조목의 본말의 이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즉 "물사(物事)에는 본말(本末)과 종시(終始)가 있고 그 선후(先後)를 알면 도(道)에 가깝게 된다"는 이치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실천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대종사는 치국평천하는 곧 삼강령인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善)에 머무르는 것"이 근본이 되는 것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후에 불교의 불성사상(佛性思想)을 만나고서 불성의 실현(實現)이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대종사의 아들 서주(西宙)는 "남자는 활동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부친의 말씀이 계기가 되어서 정치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종사가 일컫는 '활동적인 일'에는 정치라는 함의(含意)를 품고 있는 것이다. 대종사는 불성(佛性)의 실현을 위한 수행정진은 결국 치국평천하로 회향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종사는 국가와 사회의 문제 해결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참여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정치문화를 생각하였다. 치국평천하의 정치문화가 국가와 사회문제 해결의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도덕정치'(道德政治)라는 정치강령을 구상하고 소위 정법정치의 길을 모색하였다.(계속)

 경정 정사 / 진각종 기로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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