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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본 회당사상 8
[2014-03-03 14:04]
농림촌에 가는 인연계기를 만나다 


대종사가 국가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구법순례를 하면서 많은 사찰과 대덕들을 만나면서 식민지상황의 나라에 대한 담화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광공업정책과 산미증산정책을 직접 겪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처음에는 자신의 수행정진과 연계시켜서 구체화하였다. 그 일이 계전의 생활이다. 대종사는 상원동으로 이사를 한 후 고향 계전에 전답(田畓)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밭을 심수전(心修田)이라 하였다. 그 밭은 단순히 곡식을 경작하는 노동의 장소가 아니라, 수행정진을 하는 '마음을 닦는 밭'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행으로서 계전에 머물러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문중(門中)의 재실(齋室·松憲齎, 二松亭)에서 지내면서 수행정진 하였다. 대종사의 계전교화에서 가장 측근에서 도우고 계전교화를 이어받은 분들의 체험담을 전해 듣고, 역시 계전교화 시기에 직접수행을 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당시 대종사는 심한 고행정진을 하였다.

심수전은 비학산(飛鶴山) 남쪽 신분릉(新墳陵) 자락에 있다. 비학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과 기북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762미터의 산이다. 대종사는 1940년 즈음에 그 산자락을 몸소 개간하여 심수전이라 이름 짓고 고행지로 삼았다. 지금 신수심인당의 뒷길에서 북쪽으로 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아직도 그 당시 대종사가 접목한 감나무가 고목으로 남아 있다. 대종사는 처음 일가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다가 그 일이 잦아지자 자신이 직접 재실(齋室)에서 끼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생식을 시작하면서 끼니는 자연스럽게 해결하였다. 대종사는 염천(炎天)의 여름철에는 햇볕이 비교적 약한 아침과 늦은 오후 농부들이 일할 때 재실에서 심공(心工) 하고, 그들이 쉬는 한낮에는 들에 나가 노동일을 하였다. 그리고 엄동설한의 겨울철이 오면 농부들이 일하는 한 낮에는 재실에서 심공하고, 그들이 쉬는 아침과 저녁에는 들에 나가 일하였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는 강렬한 햇볕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윗도리를 벗고 일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햇살에 몸이 그을리고 피부가 타서 수포가 생기는 등 상처가 심하였고, 겨울에는 혹한(酷寒)에 동상(凍傷)에 걸려 마비성 부종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치료할 것을 권유하면 "세상 사람들은 약물로써 치료하지만 나는 '마음 쓰는 요법'[심령요법·心靈療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治癒)하였다. 손수 심수전을 개간하여 수행정진의 고행처로 삼은 대종사의 체험하고 증득하는 실행정신을 읽을 수 있다. 훗날 대종사가 "자신이 체험증득 하지 않은 법을 설하지 말라"는 법문을 하신 까닭도 여기서 연유한다.

이처럼 대종사는 계전을 수행정진의 본처(本處)로 삼고 포항과 계전, 그리고 주요한 사찰과 인사들을 찾아서 법답을 나누고 고행정진을 하였다. 그런데 대종사가 현실 정치에 뜻을 두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종사의 6대조[월성손씨 16세]인 무민재(无悶齎) 문집을 편찬하면서 맞게 되었다. 무민재(1785∼1858)의 휘(諱)는 염조(念祖)이고, 자(字)는 백원(白源), 별호(別號)는 약서(藥西)이며, 무민재는 후호(後號)이다. 그는 정조 9년 을사(乙巳·1785)년에 기계면 계동(桂洞)에서 탄생하여 철종 9년 무오(戊午·1858)년에 74세로 명을 다하였다. 그는 문행(文行)이 뛰어났으며 말년인 1848년에 무민정(無悶亭(齋?)을 지어서 학구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무민정은 지금 계전에 학고정(鶴皐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후손들이 이씨 가문(家門)에 넘겼기 때문이다. 무민공은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재실과 다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후일에 문집 4권으로 인간(印刊)되었다. 대종사가 문집의 간행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문집의 서문은 1944년 5월에 썼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문집의 후기에 해당하는 근지(謹識) 중에는 1923년에 쓴 글이 있다. 이것은 곧 문집의 간행을 그 이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일러 주고 있다. 문집 끝에는 그 연유를 밝힌 대종사의 근지도 있다. 대종사의 근지 내용을 감안하면 그 일을 대종사의 부친이 진행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종사가 이즈음에 문집 간행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1950년 석판인쇄로 최종적으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대종사는 문집을 간행하면서 변영만(卞榮晩·1889∼1954)에게 서문을 청탁하였다. 실지 문집에는 그의 아들 민보(敏甫)가 1944년 5월에 찬(撰)한 서문이 실려있다. 아마도 대종사의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아들에게 맡긴 것으로 보인다. 변영만은 법률을 전공하여 법관과 변호사로서 활동하고, 한문학의 대가로서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등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대종사는 문집간행을 계기로 자연히 변영만과 친분을 쌓으면서 나라의 상황과 정치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변영로(卞榮魯·1897∼1961)를 소개받았다. 변영로는 영문학자이면서 시인으로서 나라를 걱정하던 지식인이었다. 대종사는 변영만의 형제들을 통하여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는 인사는 백관수(白寬洙·1889∼?)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대종사는 1945년 추석 이튿날 측근을 대동하고 상경하였다. 측근들은 대종사를 오랫동안 도우고 종단의 종무원으로 있으면서 종단 교화에 많은 일을 하였다. 대종사는 자신이 구상한 '도덕정치'의 강령을 만들어 변영로, 백관수 등의 지식인 정치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서울을 떠날 때 자신이 운영하는 포목점의 양복옷감을 가져가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해방정국의 정치상황은 미소양국이 남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남한에는 민주,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50여 개의 정당들이 난립하여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또한 정치적 무질서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경제상태는 더욱 혼란하였다. 대종사는 많은 인사들과 해방 후의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런데 해방정국의 현실정치의 냉혹성과 혼란을 목격하고 정치적 사회참여의 길을 석 달만에 접고 동짓달에 하향하였다.

대종사는 하향하던 중 대구에서 한 달 여간 머물며 그간의 심경을 정리하였다. 그 때 아들(서주 손제석)이 경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설(1946. 2. 2)이 다가오자 포항에 돌아 왔다. 대종사가 설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자 대종사의 모친이 생식중단을 권유하였다. 대종사는 생식을 일 년 넘게 하면서 수행정진과 사회활동을 병행하였다. 효순심이 강한 대종사는 모친의 권유에 수순하고 화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설을 지내고 대종사는 득병을 하였다. 득병의 직접 원인은 화식전환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대종사는 생식과 수행정진, 그리고 사회활동, 특히 상경의 생활 등으로 심신의 무리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대종사는 사업과 김두하의 재산관리, 그리고 삼사건 등으로 심려가 깊었다. 그런데 그 당시 널리 퍼진 점염병(이질)이 또한 큰 작용을 하였다.

대종사는 득병의 고통을 느끼면서 약을 쓰지 않았다. 득병의 치유를 위해 수행정진에 용맹을 더하였다. 약을 쓸 것을 권유하던 모친도 대종사의 불공에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더하여 갔다. 그러자 그 해 가을에 아들과 함께 대구의 아들이 기거하는 집으로 갔다. 치병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병세는 사경(死境)으로 몰아갔다. 대종사의 부인(원정각 전 총인)은 수의(壽衣)를 지었다. 이처럼 대종사의 득병은 모든 것을 놓도록 이끌어 갔다. 대종사는 득병의 인연계기에 의해서 농림촌의 구법대정진과 중생교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종사의 득병은 대종사가 세간생활에서 출세간생활로 대 전환하도록 하는 인연계기로서 나타난 것이었다.(계속)

 경정 정사/진각종 기로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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