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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탐라국,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

밀교신문   
입력 : 2024-12-27  | 수정 :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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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첫날 어느 호텔인지 기억에 없지만 10년 뒤 제주도에 다시 오자고 언약을 했었다. 그 말이 씨가 되어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30년 뒤, 1127일 제주 식재심인당으로 발령이 나 아예 살게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인연 지은 대로 받는 것일 터인데, 인연 짓지 않고 우연히 형성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 몇 년 사이 아니, 결정적 계기는 아사리과 제주 졸업여행 때였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제주도에서 마지막 교화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었었다. 제주도로 결정하게 된 더 결정적 계기는 모 선배 스승님께서 울릉도로 떠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제주 온 첫날은 비가 내리고 날씨도 차가웠다. 첫날 밤을 새우며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 심정으로 이전과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비심 가득한 일상으로 거듭나기를 서원했다. 딱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몇 년 사이 나는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첫날 수요불사를 지키는데 그렇게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처음 교화지를 떠올렸다. 그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던가. 늘 초발심으로 가자. 늘 처음처럼 살아보자고. 은혜로운 삶이 되자. 그리하여 천지자연과 우주에 다시 되돌려 주는 선물이 되는 삶, 어쩌면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꿈꾸어 왔던 바른 회향의 삶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종조님께서는 은혜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은혜를 갚는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은혜를 알기만 해도 지혜로운 사람이거늘 종조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혜를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진짜 실천하는 참된 사람이 되라 하셨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은 푸른 뱀의 해다. 뱀은 지혜와 통찰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뱀의 날카로운 직관력은 중요한 순간마다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 즉 참회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꾼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새해에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새해에는 감사함과 미안함이 삶을 지탱하고 있는 힘으로. 새해에는 동시에 나의 행복이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비롯됨을 절실히 깨닫자. 그래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자.

 

최근에 만난 기도 시들은 새해 아침을 맑게 열어 준 눈부시고 고마운 시들이었다. 어떤 시는 절망의 터널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때 따뜻한 등불로 다가와 손을 건네기도 했다. 인도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라다크리슈난은 조금 알면 오만해지고 조금 더 알면 질문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기도하게 된다.”고 읊조렸다. 기도하는 자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준 자성의 목소리였다.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비둘기 먹이도 잊지 말고)” 등 기도 시에는 수행자의 아상을 깨트리는 죽비 소리가 되어준 가슴 서늘한 시들이 올곧게 실려있었다.

 

을사년 새해에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참회의 침묵으로 오래 기다려보자.

 

수진주 전수/식재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