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경계에서 배달된 눈부신 시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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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s://www.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39622작성 : 밀교신문
9월에는 24절기 중 백로와 추분이 함께 들어있다. 백로에는 본격적인 가을의 시작과 더불어 초가을 정취가 완연해진다. 추분이 되면 태양이 적도 상공을 지나기 때문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 추분이 지나면 북반구에서는 밤이 길어지고, 옷차림도 짧은 소매에서 긴소매로 바뀌고, 기온은 조금씩 떨어진다. 옛 선인들에 의하면 추분 무렵 다가올 추위를 대비해 동면할 벌레들이 흙으로 창문을 막았다는 얘기도 있다.
제주서 맞이하는 첫가을이다. 제주서 맞는 추분은 육지서 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섬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안개와 흐린 날이 많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맑고 쾌청했다. 아마 혹자들은 구월이나 시월을 생각하면 독서의 계절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름내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성찰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고요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 오롯이 자신에게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기후조건이 최적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백로와 추분 사이 계절의 경계에서 심인당으로 시집 8권과 에세이집 2권이 배달되었다. 책 택배 상자를 여는 순간 솔직히 말하자면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쓸데도 돈 안 되고 쓰고 나서는 더더욱 돈 안 되는 시집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으나 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서 그와 통화하는 내내 그 대책 없음과 무모함과 열정을 사랑하고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인과 대형 출판사에 맞서 작은 출판사를 후원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렇게 큰일이 되어 버렸다고. 어찌 된 일이지 그의 무모하리만큼 계산하지 않는 마음이 짠하고 찡했다.
추분 무렵의 늦은 저녁 왠지 오늘따라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낮과 밤이 같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낮과 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듯 우리의 삶 또한 그 너머에 있는 타인의 삶을 수시로 함께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사람과 시를 수시로 불러내야 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시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대책 없이 지른 그 작은 용기가 상처 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치유하고 바꾸는지, 새로운 변화가 생각의 전환을 만들고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는지를 우리는 매번 지켜볼 것이다.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것도 좋지만, 삶이 곧 시가 되는 그런 삶이 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 테니까. 어찌 보면 불가에서 말하는 선승들은 다 위대한 시인이었다고.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바람과 함께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감히 자부한다.
종조님께서 10세 때 지었다는 “심일당천만 질백화단청(心一當千萬 質白畵丹靑)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하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한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성법신과 심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성법신과 법계법신이 일과 수행이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비로자나 부처님은 시방 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시의 힘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 빛과 어둠, 마침과 시작의 엄연한 진리 앞에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의 힘이 시에는 있다.
추분 무렵 정희성 시인의 시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의 “전 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라는 시구가 오래 머물렀다 간다. 8권의 눈부신 시집과 함께.
수진주 전수/식재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