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북한의 현존 사찰

북한의 현존사찰 41-황해남도 패엽사지
오봉산 패엽사지황해도의 구월산은 1914년 김윤식의 <운양집> ‘한산사중수기’에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우리나라에 4대 명산이 있다고 하는데, 구월산이 그중 하나이다.”1976년 10월 백두산·묘향산·금강산·오가산·칠보산과 함께 6개소의 자연보호구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때부터 북한 5대 명산의 한 곳으로 불리고 있다.구월산은 서산대사의 전설이 깃든 ‘아달메’라는 이름이 전한다. 1994년에 출판된 <구월산 전설>에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명대사가 백성들이 어두운 밤까지 구월산성 복구에 힘을 쏟는 것을 보고, 도술을 부려 그의 육환장을 땅에 박아 아홉 개의 밝은 달을 솟아나게 하여 그날 밤에 성을 다 축조할 수 있었는데, 그로부터 ‘아홉 개의 달이 떤 산’이라 하여 아달메라 이름이 붙었다.” 1287년 고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의 다른 이름인 아달메이다. 아사달이 ‘앗달’, ‘압달(아읍달)’로도 불리어 아홉 ...
2021-04-09
북한의 현존사찰 40-황해남도 월정사
아사봉 월정사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와 황해도 월정사는 남북을 대표하는 같은 이름의 전통사찰이다. 구월산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천년 가람인데, 아미타 도량으로 알려진 곳이다.구한말 최남선은 1947년 발행한《조선의 산수》에서 “신천, 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 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 봉오리 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일출봉ㆍ광봉ㆍ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산이 구월산이다.”라고 설명했다.이 내용은 북한의 문학예술종합출판사가 1994년 발행한《구월산 전설》에 다시 인용하면서 알려졌다. 이 책에는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古記)>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이라는 것이다. 단군이 하늘에서 맨...
2021-03-23
북한의 현존사찰 39 -황해남도 현암
장수산 현암 황해도의 명산 장수산은 최고봉인 보적봉과 보장봉ㆍ관봉ㆍ하니봉 등 500∼700m 안팎의 봉우리들이 재령평야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웅장해 보인다. 서쪽 방면에 열두 굽이의 기묘한 계곡이 절경을 만들어 내는 석동 12곡과 맑고 맑은 벽계수로 이름난 벽바위골ㆍ가파른 벼랑으로 된 보적봉 중턱의 천길 바위ㆍ큰 바위들이 가까이 마주 선 관봉석문ㆍ채진암 석문과 금은굴ㆍ관음굴과 같은 자연 굴들이 모두 명소이다. 석동 12곡의 길이는 12km, 너비는 50∼150m이며, 양쪽에는 높이 150∼200m의 높은 벼랑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대협곡이다. 원래 ‘산에 꿩이 많아 치악산(雉岳山)’이라 불렀다. 이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많은 피난민이 이 산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여 그 뒤로 장수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 줄기의 단층곡인데, 서쪽 계곡은 12곡(曲), 중앙 계곡은 벽암계곡과 하금강, 동쪽 계곡은 ...
2021-03-08
북한의 현존사찰 38-황해남도 자혜사
천봉산 자혜사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해주 광조사를 원찰로 삼고, 수양이란 군호까지 수양산에서 차용하였다. 효령대군이 황해도 자혜사를 원찰로 정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불교에 심취했던 효령대군이 무슨 이유로 자혜사를 원찰로 정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한 자혜보살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관음보살의 능력과 자비와 복덕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경전에서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마흔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관음보살의 뿌리는 아미타불에게서 나왔기에, 자혜사 본전의 주불로 아미타여래를 봉안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황해도 자혜사에 관한 창건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 유일한 단서는 1010년 12월 거란군이 침공했을 때, 고려의 군사를 자혜사에 주둔시켰다는‘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뿐이다. 이전의 기록은 사찰의 이름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혜대사가 680년경에 창건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의상대...
2021-02-16
북한의 현존사찰 37-황해남도 금사사지
낙가산 금사사지 우리 사회에서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 평가절하는 것이 안 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탄생한 영웅 이야기는 어느덧 사회적인 합의 수준에까지 이른 담론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편에는 그늘진 곳이 있듯이 세종대왕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도 오늘날의 상황 인식과는 다른 대목이 있다.《세종실록》에서와 같이 세종은 왜(倭) 나라의 대장경 요청에 대해 ‘그냥 주어버리면 될 일’이라고까지 평했다. 무슨 곡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겠지만, 자꾸 달라고 조르던 타국에 자국의 문화재를 한꺼번에 줄뻔한 아찔한 일까지 있었다. 실제로 이행된 것은 아니지만, 유교 이념과 명나라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고려가 만든 대장경과 같은 민족 문화재를 소홀하게 여겼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신수대장경》...
2021-01-25
북한의 현존사찰 36-황해남도 송월암
송월암과 학림사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라고 하여 서해로 불렀지만, 1961년 4월 22일 국립지리원 지명위원회가 의결, 고시한 명칭은 황해(黃海)로서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지칭한 것이 참으로 의아스럽다. 중국 황하로부터 다량의 토사가 실려 내려와 바닷물을 누렇게 물들인다는 뜻으로 쓰인 황해는 중국에서 붙인 이름이고, 서해는 우리식의 이름이다. 18세기 이전 동양의 문헌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황해라는 이름의 바다는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다. 황해란 이름은 역사의 주도권을 움켜쥐었던 서양세력에 의해 붙인 이름이다. 중국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오라총관 목극등과 프랑스 선교사인 조아생 부베와 레지스 등이 1717년 공동 제작한 ‘황여전람도’에 황해가 등장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당빌이 1734년에 제작한 ‘신중국지도첩’에 ‘HOANG-HAI OU MER JAUNE’이라고 처...
2020-12-17
북한의 현존사찰35-황해남도 신광사지
북숭산 신광사지 황해도 해주의 명산, 북숭산(北崇山)은 남숭산(경북 구미의 금오산)과 2대 명산의 짝을 이뤘다.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도 등장하는 중국의 5대 명산인 태산, 화산, 형산,항산을 비롯한 가운데 산,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고 하여 고려 후기 때부터 유명해진 산이다. 해주 서북쪽의 북숭산에는 이름난 잠양폭포가 있다. 이 폭포와 신광사를 배경으로 조선 정조 때 김홍도가 그린 '산사귀승도'가 전한다. 2018년 9월 20일 단원의 사후 200년 만에 다시 빛을 본 그림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 밖에는 ‘김단원홍도’란 제명이 쓰여있고, 왼쪽 밖에는 새로 글자로 “애석하도다. 단원의 낙관이 이미 뭉개졌고, 쓴 시 또한 반은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솜씨가 매우 좋은데, 찍어둔 낙관이 완전하고 볼 만하여 보배로 갈무리할 매우 좋은 작품이다. 위창노인이 쓰다”라고 20세기 초, 오세창의 글과 낙관이 남아...
2020-11-30
북한의 현존사찰 34-황해남도 광조사지
수양산 광조사지 위성지도에 보면, 한반도의 동서 길이는 321㎞(786리)이다. 서쪽으로 제아무리 넓혀보아도 옹진반도가 그 전부다. 1823년의 ‘해동역사’에는 “황해도는 1018년 고려시대에 서해도(西海道)였다. 1395년 풍천과 해주의 이름을 따서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 때에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황해도는 1417년에 황주와 해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해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군의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이름을 해주라 하였다.” 1899년 편찬된 ‘해주지’에 해주는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이었는데, 지성 또는 장지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 때 폭지라고 개칭했으며, 고려 태조가 ‘군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다’고 하여 이름을 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정인지는 ‘향교기’에서 “해주 지역은 살기 좋은 바다 고을”이라고 했듯이, 동해의 원산과 남해의 통영ㆍ여수와 아울러 진남포와 함...
2020-11-12
북한의 현존사찰 33-황해남도 강서사 (하)
백마산 강서사 오늘날 황해남도 배천군의 강서사 화단에는 아주 유명한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61호 ‘강호 염주나무’는 1913년에 발견되었는데, 피나무류와도 비슷하고 열매는 10월 말에 여무는데, 이를 따서 염주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또 한 그루는 참중나무에 감겨 올라가는 강호 능소화 때문에 같이 유명해졌는데, 실제로는 세 그루인 셈이다. 천연기념물 제162호 ‘강호 능소화’는 1840년대에 참중나무와 함께 옮겨심은 것으로 일명 ‘능소나무’라 불린다. 강호 능소화는 높이 20m, 밑 둘레가 55㎝, 가슴높이 둘레가 48㎝가 되는 큰 덩굴나무다. 특별히 고운 꽃 색깔로 유명한 이 능소화는 7~8월경에 긴 나팔 모양의 꽃이 약 한 달 동안 피는데, 색깔은 노란색이 감도는 붉은색이다. 조선 후기까지 강서사에서 유명했던 물품은 돗자리 ‘용수석(龍鬚席)’이었다. 1798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 <자찬묘지...
2020-10-27
북한의 현존사찰 32-황해남도 강서사(중)
견불산 강서사 고구려와 백제는 ‘반걸양 전투’를 치렀다고 1948년 신채호가 발행한 ‘조선상고사’에 전한다. 기원후 369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기병과 보병을 합친 2만의 군사를 청·백·적·흑·황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 아래에 거느리고 벽란나루 즉, 반걸양에까지 침공했으나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패하는 전쟁이 치러졌다. 이렇듯 양국은 삼국통일 이전까지 벽란도와 장단 등지에서 치열하게 충돌했다. 그로부터 400년 후, 예성강에는 세기적 평화가 도래하고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나라 이름인 고려가 포르투갈어인 ‘꼬리아’로 파생될 만큼 국제 무역도시가 이곳에 탄생했다. 10세기 초기부터 1392년까지 이어진 국제 무역은 불야성의 벽란도를 만들었다. 한편으로 대장경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젊은이들은 대거 개경으로, 벽란도로 갈 것을 외쳤다. 경전 연구에 나선 승려들은 신학문의 인텔리로, 통역과 번역을 통한 저술 활동 그리고 고려대장경의 ...
2020-10-12
북한의 현존사찰 31-황해남도 강서사(상)
예성강 강서사고려의 해상관문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면서 더 유명해진 예성강은 황해도의 황금 젖줄이다.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는 황해도 수안의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배천·개성을 거쳐 서해 강화만에 흘러드는 강으로 총길이 187.4km이다. 조강으로까지 불리는 한강 어귀에서 합수하는 동쪽의 임진강과 달리 서북쪽에 자리하는 강이다. 한강 입구에서 예성강을 따라 10~15리 더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자리한 벽란도는 고려 최대의 해문(海門)이었다. 벽란도는 고려 도읍지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항의 언덕에다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기 위해 지은 객관인 벽란정(碧瀾亭)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려와 요나라의 전쟁이 끝나갈 11세기 무렵부터 예성항구가 국제 무역항으로 발돋움하면서 붙여진 통상적인 명칭인데, 강원도 총석정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과 같다. 그 영화롭던 모습은 한림원의 공사로 1207년에 몇 달 동안 벽란도를 오갔던 고려의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바닷물이 물결치는 대로, 오...
2020-09-22
북한의 현존사찰30-개성특급시 화장사(하)
보봉산 화장사 실학자 박지원은 1771년에 송도유람 때, 화장산 연암골에 은거하기를 기약하여 자호를 연암이라 했다. 연암에게 은둔과 자조의 땅, 통곡의 장이던 연암 골짜기는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데, 고려말에 목은 이색, 익재 이제현 등이 살았던 곳이다. 연암이 장단의 화장사에 가서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여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서 가 본 곳이다. 이처럼 연암이 점지한 땅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보봉산 화장사로 가야 한다. 또 이 절은 고려 후기에 공민왕의 예술 마당이었다. 1671년 김창협의 ‘송경유기’에는 화장사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보물로 공민왕 자화상, 지공의 등신상, 패엽경과 전단향을 지목했을 만큼 고려 말의 미술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14세기 고려왕실의 지원으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던 고려 불화(佛畵)는 세계적으로 16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
2020-08-28
북한의 현존사찰 29-개성특급시 화장사(상)
18세기 이중환은 1751년의 <택리지>에서 화장사 지역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관대작의 무덤이 많아 사람들이 (중국)낙양의 북망산에 견준다”라고 했다. 저승의 수미산으로 불리는 북망산은 중국 허난성 낙양 북쪽에 있는 낮은 산인데,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 이후 제왕과 귀인, 명사 무덤이 만들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묻힌다는 ‘북망산천’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유명하게 된 때는 1194년 주자가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상소한 <산릉의장(山陵議狀)>이란 글로부터 비롯됐다. 그 후, 이 상소문은 중국과 조선 풍수지리에 관한 일종의 지침서였다. 심지어 주자의 이 글은 조정에서 풍수를 논할 때마다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까지 언급될 정도였다. 개경의 북망산으로 부르는 만수산과 화장산은 저승의 명당으로 꼽혔다. 서북쪽의 만수산 남쪽 일대에는 고려왕과 왕후의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다. 개성역사유적에 포...
2020-08-10
북한의 현존사찰 27-개성특급시 영통사(말)
오관산 영통사 개성 영통사는 오관산(五冠山)의 남쪽 기슭에 있다. 북쪽은 5개의 기묘한 봉우리를 가진 오관산과 애기봉의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쪽에는 문수봉, 서쪽에는 재봉이 솟아 있다.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쌌지만, 남쪽은 얼마간 트인 편이면서 나지막한 흙산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의 산천경계는 ‘고려사’에 “산수의 수려함은 송경에서 으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멀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 막히고 시냇물이 감돌아 흐른다. 수림은 울창하다. 그 시루의 경개는 송도에서 제일이다”라고 했다. 절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북쪽 오관산에서 시작된 시냇물이 재봉의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는 시루봉 골짜기에서 시작된 다른 하나의 자그마한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이 물줄기는 영통사 입구에 이르러 서로 합쳐서 아담한 못을 이루고, 저 멀리 동강으로 흘러간다. ...
2020-07-28
북한의 현존사찰 27-개성특급시 영통사 (하)
관모산 영통사 2007년도 이후, 영통사를 취재했던 남측 언론이 오관산의 봉우리가 흡사 관모를 덮어쓴 것 같다고 하여 관모산이라 보도한 것은 사실과 같다. 박달산으로 지칭한 것은 문헌 기록에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지명을 쓴 것이다. 흔히 오관산으로 부르고 사용하는데, 옛 문인들과 일부 학자는 보관을 쓴 산이란 의미로 관모산이라 했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영통사는 1027년에 창건되어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1598년경 임진ㆍ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다가 2005년 10월 30일을 기해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됐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2년 9월 발간한 ‘영통사유적발굴보고’에 의하면, 영통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한 고려의 이름 있는 절간의 하나다. 고려의 숭불정책의 역사적 배경에서 세워진 절 건물 중의 하나다. 또 고려 천태종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의 사적이 깃들여 있...
2020-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