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불로 통했던 국어학자의 '회향'

편집부   
입력 : 2010-05-21  | 수정 : 201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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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범 강복수 박사 열반

국어학자이자 영남대학교 제7대 대학원장, 제10대 학교법인 회당학원 이사장을 지낸 우촌(불명 운범) 강복수 박사가 5월 21일 오전 10시 10분께 열반에 들었다.

불기 2554년 부처님오신날 열반에 든 강복수 박사는 영남대 교수시절부터 국어국문학과 동료와 선후배 교수들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불교, 특히 진각종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늘날의 심인중고등학교 설립에 큰 역할을 하고, 진각종 종헌종법의 기초가 된 헌법을 제정할 때 전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고인에 대한 생불이라는 별칭은 늘 육자진언의 삼밀수행을 하면서 흐트러짐이 없고 강직한 생각과 꼿꼿한 앉음새, 준엄한 가르침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주어진 수사였다.

국어문법 전공학자인 강복수 박사는 1974년 영남어문학회(현 한민족어문학회)를 조직해 첫 번 째 회원으로 등록하고 5·16 군사혁명정권 때는 사회단체의 강압적 통합을 반대하며 학회를 지켜낸 학자적 본분을 보여주었다. 학술적 업적으로는 1972년 박사학위논문 '국어 문법사 연구'를 위시해 1958년 청구대학논문집에 발표한 '국어문법연구의 사적동향', 1963년 청구대학논문집에 게재한 '타칭 대명사에 대한 고찰', 1969년 동양문화연구소 발행 동양문화에 실린 '국어 문법의식의 발달에 대하여-형태부를 중심으로', 1971년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회가 발행하는 국어국문학연구에 등재한 '국어 문법학의 계보', 한메 김영기 선생 고희기념논문집에 참여한 '국어문법에 미친 외국문법의 영향' 등의 논문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단행본으로는 '1960년 이후 국어 문법연구의 사적동향'(1978)과 '(인문계고등학교)문법'(형설출판사, 1975년) 등이 있으며 우촌 강복수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한국어문논총(형설출판사, 1976년)과 고희기념호 영남어문학 제13집(영남어문학회, 1986년) 등도 있다. 
실상행 전수가 모친이었던 강복수 박사는 대학 교단에서 은퇴한 후에는 진각종단에 몸을 담고 전문연구원으로서 진각성존 회당종조 관련 초기연구와 교육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관(전 코오롱유화부문 사장), 영(전 한국은행 국장), 인(전 대동은행 지점장), 열(능인고 교사), 진경(삼성코닝정밀소재 전무)씨가 있다. 장례식장은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4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5월 25일 오전 6시에 진행됐다.

정유제 기자 refine51@milgyonews.net

 

(조사/진각종 교육원장 경정 정사)

군사정권 맞서 영남어문학회 지킨 학자
범성불이의 경지를 넘나든 진언 수행자


운범님, 어디에 계십니까?

경정이 여기 왔습니다. 왜 그 환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항시 기운이 솟는 듯한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 꼿꼿한 앉음새가 제 앞에 보이지 않습니까? 어이된 영문입니까? 정열에 넘치는 눈빛으로 지칠 줄 모르게 나누시던 담소가 들리지 않습니다. 지난 3월 말 어느 날 아파트 뜰에서 다시 찾아 뵙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날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자주 만나서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시는 뜻을 항시 바쁘다는 구실로 미룬 것이 서운하신 것입니까?

'밥 짓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라'면서 손수 지으신 식사를 같이 하자고 왜 권유하지 않으십니까? 밥 짓는 일을 여든이 넘어 시작하였지만, 십 년 가까이 지으니 내가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며 외식을 사양하시더니, 어디 외식하러 가신 것입니까? 그렇게 운범님은 인생수순의 삶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인생은 영원한 현역이고 직장은 출장이라 하셨지요. 그래서 퇴직이 없는 인생직장에서 출퇴근 시간을 스스로 정하여 새벽 육자진언의 삼밀수행을 시작으로 생활을 즐기시더니, 그래도 인생직장에서 이제 퇴직을 하신 것입니까? 젊음은 나이에 있지 않고 삶의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젊음도 나이를 어찌 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나 '꽃잎은 져도 꽃은 지지 않고,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말씀처럼 늘 그렇게 계십시오. 이처럼 운범님은 인생긍정의 생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박사님, 강복수 박사님.

박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셋 째 아드님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서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건강을 회복하시고 못다 나눈 말씀을 할 것으로 믿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열반의 소식입니까? 박사님은 일찍이 '새 불교가 나왔다'는 모친 실상행 스승님의 말씀에 이끌리고, '마음 고치는 공부'가 마음에 들어서 진각종의 종조 회당 대종사님을 뵈었다지요. 그 때부터 종조님께서 초기 헌법을 제정하실 때 전문위원을 맡는 등 종단과 깊은 인연을 쌓으셨지요. 그것이 어느 듯 예순 해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박사님은 회당 대종사의 말씀을 허실 없이 정리하여 남기시는 일을 숙명처럼 느끼셨나 봅니다. 그 속에 '마음 고치는 공부'의 진실법이 담겨 있다고 하시면서 진실행을 유달리 마음에 두셨지 않습니까? 박사님은 그 진실행을 마음에 담아 사회단체의 강압적 통합을 추진하던 5·16 군사혁명정권에 맞서서 영남어문학회를 지키는 학자적 본분을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본인이 1번 회원인데 넷 째 아드님이 500번 째 회원이 되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우촌 선생님.

산 첩첩 굽이굽이 물길이 감아 돌아 길이 없는 듯 보여도 버드나무가 넘실거리며 꽃이 피는 또 하나의 마을이 있듯이(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남송시대 육유의 '유산서촌' 중에서) 인생 여정에도 늘 내일의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스스로 호를 또 하나의 마을, '우촌'이라 하시며 그 길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늘 샘물처럼 흐르는 신선한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기운은 분명히 절망을 넘어 또 하나의 희망의 마을을 찾게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일과 학업에 지쳐 병을 얻어서 휴학을 하려는 제자에게 '휴학을 하면 너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매서운 질책으로 향학의 분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제자가 정년퇴직기념논문을 노 스승을 찾아와서 바치고, 그 논집에 유학 길에서 스승에게 보낸 서간문을 실어 놓은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지요. 선생님은 진정 시대에 걸림이 없는 선생의 길, 스승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운범님, 운범 각자님.

각자님께서 '운범(云凡)'이라는 불명을 받으시고 '범부라고 일러라'며 뜻을 풀이하면서 천진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마음을 스칩니다. 스스로 범부라 하셨지만 각자님은 범성불이(凡聖不二)의 경지에 넘나드신 수행자였습니다. 절제를 넘어 수행의 경지에서 스스로를 다스려도 남에게 한 치의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셨지 않습니까? 운범님은 참으로 깨달음의 씨앗을 꽃피우는 각자님의 길을 가셨습니다.

운범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날은 부처님오신날로서 무척 화창하였습니다. 아마도 운범님은 부처님 오시는 길을 마중하려 가신 것인가 봅니다. 그래도 운범님의 열반 소식에 한참 동안 책상 언저리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하여 보면 제가 운범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말이었지요. 그 때 자택 서재에서 한복차림의 꼿꼿한 자세로 시간 흐르는 줄 모르고 말씀을 하셨지요. 그 인연으로 '대일결사'를 결성하여 담론시간을 가지는 등 회당 대종사의 가르침에 대한 천착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만남이 아쉬웠는지 운범님은 대학에서 퇴직하시고 종단의 요청으로 전문연구원 자격으로 총인원 경내에서 10여 년 동안 생애에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종조님의 연보를 만들고 종조법어를 수집하여 정리하며 때로는 걱정도 하고, 때로는 토론
도 하면서 저와 같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지요. 그 결과로 종단의 교학적 내실이 충실하여 지고 지금도 그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운범님께서는 그래도 미덥지 않아서 오매불망 종조법어의 '원천적 중심'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정진하여 오셨습니다. 그 마지막 결과로 '참 깨달음의 길-진각밀교의 기본교리'라는 소책자를 편집하셨는데, 그 마지막 완성본을 보시지 못하고 가셨습니까? 무엇이든 자신을 드러내고 세간적 흔적을 남기시는 것을 꺼려하시더니 마지막까지 무주, 무상의 마음을 다잡으신 것인가요? 운범님은 그토록 종조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만큼 더 운범님의 삶의 족적은 선명하여지고 진각종사에 빛이 되실 것입니다.

운범님.

편히 가십시오. 당신이 그리던 회당 대종사님의 회상에 가셔서 법담 널리 나누십시오. 당신이 가벼운 걸음으로 오가던 총인원 뜰에는 당신을 보내는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습니다. 운범님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운범님과 만남을 나눈 것만으로도 행복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디 편히 비로자나궁전에서 성불의 복락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