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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성초 총인예하 진기 68년 춘기스승강공 법어

편집부   
입력 : 2014-04-16  | 수정 : 201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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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성의 근원은 심인이다

진각종은 심인공부를 수행의 으뜸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인공부의 구경은 즉신성불입니다. 즉신성불은 일상생활 중에서 성불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성불의 생활을 하는 즉신성불은 진각행자의 수행의 이상입니다.

심인공부는 심인을 밝혀서 참회하고 진각을 실현하는 공부입니다. 심인을 밝혀서 참회하고 진각을 실현하여 가면 일상생활 중에서 성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심인을 밝히면 지혜()가 밝아지고 자비()가 일어나고 용맹()이 솟아납니다. 지혜가 밝아지면 항상 맑고 고요한 평정심으로(염송念誦), 일상생활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며(지혜방편智慧方便)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자비가 일어나면 무엇이든 서로 나누고(희사喜捨) 자신을 잘 다스려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계행戒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용맹이 솟아나면 관용과 인내로써 자신을 낮추고(하심下心) 끊임없이 전력을 다하여 노력하는(용맹勇猛) 생활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 중에서 지비용(智悲勇)을 일으키고 육행(六行)을 실천하는 것이 즉신성불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즉신성불은 자신의 본래모습, 진면목(眞面目)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인을 밝혀서 지비용(智悲勇)을 일으키고 육행(六行)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현재모습을 바르게 살피는 참회를 하게 되고, 참회로써 자신의 현재 모습을 여실하게 알게 되면 심인을 밝히는 행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인을 밝히고 참회하는 수행이 상승(相乘) 작용을 하여 본래 완전한 심인의 경지를 회복하는 진각을 실현하여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심인 참회 진각의 이득(已得) 과정에서 항시 지비용을 일으키고 육행을 실천하여 가는 생활을 즉신성불의 생활이라 합니다.

따라서 심인공부를 통하여 즉신성불의 생활을 하는 것은 자심(自心심인)을 여실하게 깨닫고 밝히는 생활이 됩니다. 자심의 본래 모습을 깨닫고 밝혀서 살아가는 완전한 행위(육행六行)는 의뢰적(依賴的)인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자주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심인공부는 세간적인 입장에서 자주성을 함양하는 자주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각성존 종조께서는 자주성을 함양하여 자주적인 생활을 하도록 강조 하십니다.

종조께서는 먼저 불교는 구경에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일체 사리에 자심(自心)이 통달하게 되니 이것이 곧 자주력이 되는 것이다고 일러 주십니다.

법계에는 본래 청정한 심인(자성)이 변만(遍滿)하여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에 미쳐 있는 심인(자심)을 밝히면 세상의 모든 사실과 이치에 통달할 수 있게 되고, 거기서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주력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조께서 불교는 깨달아서 성불하게 하는 교리인 까닭이라깨닫는 그 사람의 불교 그 가정의 불교 그 나라의 불교가 되는 것이다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심인을 밝혀서 즉신성불의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이기 때문에 누구든 심인을 밝히면 개인 가정 사회 국가를 자주 발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성을 함양하여 자주력을 일으켜서 자주적인 생활을 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자주성의 근원(根源)은 심인이고 심인을 밝히면 자주력이 솟아나고 육행을 실천하면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종조께서 가르치신 자주성을 함양하여 자주적인 생활을 하는 속뜻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주(自主)는 심인에서 시작합니다. 자심(自心)의 실상이 심인이라는 사실을 믿는데서 자주를 세울 수 있습니다. 종조께서는 불심인이 내 마음의 주인공이 되어 자리 잡고 있으면 중생심은 도망을 간다고 하십니다. 심인이 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등상불(等像佛)에 의뢰하는 신앙보다 무등상(無等像), 나아가 무상불(無相佛)의 신행이 수승(殊勝)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실지 많은 사람들은 심인에 대한 믿음이 박약(薄弱)하여 자신감이 없고 등상불의 신앙에 전도됩니다.

둘째, 자주성은 밝은 참회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주적인 밝은 참회는 내가 먼저 환희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진각종의 참회는 자주적이고 긍정적인 밝은 참회입니다. 종조께서는 상대 허물 보지 말고 내 허물을 고칠지니 내 허물이 없어질 때 저이 허물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도로 복이 되고 일체 고통이 소멸됩니다. 나아가 상대 허물 보일 때는 혹은 위해 정진하고 혹은 위해 단시하면 상대 허물 발라지고 나는 도로 복이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자주적이고 밝은 참회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참회에서 심인을 밝히려는 수행을 하게 되고 즉신성불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를 원망하고 그에게 참회를 기대하면 의뢰적인 참회가 됩니다. 남이 변해야 내가 변한다는 심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주성은 이원원리를 실천하여 상승(相乘)의 조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진각성존께서는 이원주의는 큰 길이니 전문적이며 상대적이고 도회지와 같이 분업적이며 인의(仁義)가 대립이 되니 자주가 된다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심인을 갖추고, 모든 사물은 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상대를 세워서 상대의 특성을 전문적으로 발휘하게 하면 전체적으로 서로 상보(相補)가 이루어지고, 상보는 다시 상승(相乘)의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세상은 상호 영향 상호 반영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만을 세우는 일원원리는 전문(專門)이 아닌 통솔(統率)이 되어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의뢰적인 생활을 하게 합니다. 심인에 어두운 탐진치의 마음은 자주가 아닌 의뢰심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통솔하려 합니다.

넷째, 자주정신은 생활을 혁신하고 사회를 개혁하여 창조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종조께서는 체구용신(體舊用新), 옛 것을 기본으로 하되 늘 새롭게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옛 것이란 고금에 통하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기본 체로 하고 그것을 시대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이 개선되고 사회가 개혁되어 창조적인 발전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모습에 집착하면 의뢰가 되어 새로운 발전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각종은 심인을 공부의 주체로 하는 심인불교입니다. 심인불교는 심인공부를 통하여 심인을 밝히고 참회하여 진각을 실현하는 즉신성불의 생활을 이상으로 합니다. 심인은 위없이 깊고 미묘하며 부처와 보살과 중생의 본심입니다.

진각(眞覺)은 심인을 분명히 알아서 생활 중에 깨닫고 참회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을 구하고 기도만 하는 불교는 의뢰불교가 되고 심인을 깨쳐서 행하는 불교는 자주불교가 됩니다. 유상이 지극하여 의뢰하여 들어가게 되면 미신이 됩니다. 유상은 의뢰하여 외도(外道)가 되어 사()를 부릅니다. ()는 자신에 집착하는 사심(私心)을 일으켜서 공도(公道)를 파하여 사회의 분열을 가져옵니다. 무상(無相)은 자주(自主)로서 정도가 되어 정()을 부릅니다. ()은 중생의 안락을 위한 공심(公心)을 일으켜서 사도(私道)를 다스려서 사회의 번영을 가져옵니다.

심인공부는 무상의 자주를 세우고 공도를 일으켜서 현세정화를 하여 은혜로운 국토를 일구어 갑니다. 따라서 심인공부의 깨달음은 자주이고 자주는 실천입니다. 여기서 의뢰심으로 남을 비방하지 말고 참회의 큰 길을 열어야 합니다. 참회는 자주(自主)입니다. 자신의 수행을 참회로써 바르게 살펴갈 때 참으로 자주가 세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