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정양사(上)

밀교신문   
입력 : 2019-03-25  | 수정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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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비경을 모두 품다

내금강 정양사(正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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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사는 최고의 ‘금강산 관측 명당’이다. 삼한시대로부터 고려와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인정한 조망대다.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어 뭇 준봉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다. 금강산을 다 품은 절로, 내금강의 가장 중심자리에 있다.
 
13세기 후반, 고려의 묵헌 민지는 <금강산> 시에서 “하늘과 땅을 버티고 높다랗게 솟은 네 모습, 크기로나 높이로나 누가 감히 따르랴”고 했다. 14세기 중엽의 가정 이곡은 <정양암에 올라> 시에서 “기기하고 묘묘해라 금강산의 그 모습, 시인이며 화공들 시름도 많았구나”며 시로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 다 그릴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장쾌하다고 했다.
 
조선 후기의 조지겸은 <정양사> 시에서 “옥으로 만든 연꽃인가 높이 솟은 비로봉아. 만 이천 봉 가운데서 네 모습 으뜸일세. 정양사 바깥경치 그 중에도 장관이다.” 17세기 후반의 오도일은 <헐성루> 시에서 “대를 묶어 세웠느냐. 일만 이천 봉우리, 그 누가 헐성루 앞에 옮겨다 놓았가. … 이 누대 오르면은 누구나 신선일세.” 금강산 탐승기인《동유기》를 쓴 김창협은 "금강산은 부질없이 시일 허비해 구석구석 볼 것이 아니라 정양사에만 오르면 온 산의 면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진규는 <헐성루> 시에서 “금강산 참 경치 비 온 뒤에 드러나거니, 기이한 봉우리들 명실공히 한결같네. 이 산의 절승경계 등급을 매긴다면, 헐성루가 으뜸이라 서슴없이 말하겠노라”고 했다.
 
58세의 겸재 정선이 1734년에 그린《금강전도》는 정양사 혈성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래서 조선 진경산수의 시원적 현장이다. 만폭동을 중심으로 그린 금강내산(金剛內山)은 겸재의 눈과 마음으로 본 금강산을 압축한 진경화법의 진수였다. 실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금강산 12,000봉은 순전히 돌봉우리·멧부리·마을․샘․못․폭포가 모두 흰 돌로 이루어졌다. 금강산을 개골산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 움큼의 흙도 없는 까닭이다. 만 길 산꼭대기와 100길 못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나의 돌이다. 이런 풍경은 천하에 둘도 없다”고 했다. 조선 말기의 이상수는《동행산수기》에서 "정양사가 금강산에 있음은 마치 궁실에 대청이 있음과 같다. 장하여라. 그 산들의 생김생김이여! 겹겹이 서로 굴곡이 복잡하여 도무지 그 갈피를 찾을 길 없더니 여기에서는 눈앞에 가로 쫙 벌려 한 폭의 병풍을 이루니 정양사 헐성루의 전망이 곧 그것이다. 우리 금강산이 다른 산수보다 뛰어나 천하의 절정이라 함에 누가 감히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은 오직 금강산만이 가진 그 풍모 때문이다. … 천하에 이름난 산에서도 또한 없을 것이다”고 비유했다. 이처럼 금강산 정양사는 뭇 시인과 화사들의 극찬으로 간택된 곳이다. 특히 신의 조화로움에 비견될 겸재의 한 수가 발휘된 관측 명당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정양사의 위치는 1916년에 일본인이 발행한《금강산》사진첩에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대변된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좌우의 영랑봉과 백운대 등 47여 개의 뭇 준봉들이 한눈에 쫙 들어오는 풍광은 스펙타클하다.
 
하늘과 하나 되는 명승지, 정양사
어찌, 사람과 하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가 없을 때, “귀신이 씻나락(볍씨) 까먹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양사의 헐성루에 오르면, 하늘과 맞닿아 서는 기분이 정말 난다. 하늘은 손에 잡힐 듯 확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강희맹은 <금강산으로 가는 일암을 보내면서> 시에는 “개미처럼 기어올라 상상봉에 이르니, 이제 뭇 봉 모양 한눈에 다 들어오네. 사람 같은 천 개 바위들 꼿꼿한 만개 봉우리가 두 다 비로봉을 향하여 절하는 듯 …”하다. 봉래 양사언은 <금강산> 시에서 “산 위에 산 솟으니 하늘 위에 땅 생기고, 물가에 물 흐르니 물 가운데 하늘 있네. 아득해라, 이내 몸 허공 중에 떠 있는가. 신선 세계 아니거니 신선도 아니여라. … 만 이천 봉우리는 백옥이다”고 했다. 시의 제목까지도 사대부들의 탄원을 받지 않으려던 서산대사는 <풍악산> 시에서 “장할시고 풍악산 높이도 솟았구나. 비바람 수없이 겪어왔으련만 푸르른 네 등줄기 굽히지 않았구나”라 했다.
 
17세기의 허목은 <비로봉> 시에서 “손은 한 자만 더 길면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홍우원은 <정양사의 가을 풍경>에서 “천만 겹 기이한 봉우리 푸른 하늘에 꽂혔다”고 했다. 이경석은《풍악록》에서 “기괴한 모양과 이상한 모습, 맑고 깨끗한 자태 등 하나나 거론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무릇 인간 세상에서 볼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없었다. 천상의 것을 어찌 비유할 수 있겠는가마는 마치 옥녀나 신선 상아(常娥)가 있어 구름 같은 머릿결, 옥비녀에 구름 귀걸이, 깃으로 만든 옷에 무지개 치마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많은 우리가 학처럼 우뚝 서고 난새처럼 높이 솟아올라 백옥루 광한전의 꼭대기에서 몸 뒤척이며 춤을 춘다고 하면 아마도 가능할는지. 인간 세계에서 추측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참으로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 어느덧 석양이 비켜 산색이 더욱 밝아지니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18세기, 표암 강세황은《유금강산기》에서 “헐성루는 금강산의 전모(全貌)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재촉해 헐성루에 올라 앞쪽 난간에 기대어 보니 만 개의 봉우리가 첩첩이 쌓여 있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 동북쪽으로 가장 먼 곳에 흰 바위기둥이 화살촉처럼 꽂혀 있고 그 위에 둥근 봉우리가 덮여 있는데, 물어보지 않아도 중향성(衆香城)과 비로봉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각 앞은 모든 봉우리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했지만, 이는 이 산속에 늘 있는 풍광이고, 중향성 같은 봉우리는 옥 죽순이 다투어 돋아나고 서릿발 같은 칼날이 배열한 듯했다. 이는 이 산에서 제일 기묘하고 환상적인 곳이니,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산에서 찾더라도 다신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종이를 가져다 대략 눈에 보이는 바를 그리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또 어유봉은《유금강산기》에서 “(정양사) 절 안으로 들어와 헐성루에 앉았는데 눈으로 보이는 거리가 천일대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비로봉과 중향성은 가장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하늘은 맑고 햇빛이 깨끗하여 음산한 기운이 모두 말끔히 사라지고 석양이 점점 물드니, 흰 옥 같은 산봉우리가 모두 그림 속에 들어간 듯하여 더욱 기이하였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산에 들어온 자는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좋은 날씨를 허락받는 것이 제일 어려우니 감히 여러 공에게 축하를 드립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 헐성루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있어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 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 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거대한 금강산호의 키, 정양사
 
백두대간의 1/2 지점에 솟아있는 금강산은 높이 1,638m의 비로봉이 주봉이다. 동·서 폭은 40㎞, 남북길이는 약 60㎞, 넓이는 약 530㎢에 이른다. 이 산의 주인은 비로자나불(Vairocana)인데, 산봉우리를 통해 알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큰 빛의 부처님이 금강산으로 정하고 부처와 보살로 나타난 곳이다.
 
비로봉의 정기가 맺힌 곳이 정양사(正陽寺)다. 내금강의 핵으로 혈맥의 중심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의 기본이 되는 맥(正脈)이다. 그런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고 했다. 가장 양지바른 곳이란 의미도 있다. 정양사에서는 해와 보름달이 뜨면 겨울에도 춥지도 않다. 또 여름에는 모기와도 싸우지 않는다. 흙산인 방광대의 가슴 지점에 자리한 정양사는 산사태와 홍수로 피해를 많이 보았다. 금강산은 만폭동계곡을 기준으로 동쪽은 바위산이지만, 서쪽은 주로 흙산이다. 겸재 정선의《금강전도》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표훈사가 법기보살이 탄 유람선(Cruise)의 키(舵)라면, 정양사는 거대한 항공모함인 금강산호의 중심 키(Key)이다. 조선 말기의 이유원은《임하필기》에서 “불전에는 가산을 설치하여 금강을 형상하고 두 칸의 감실을 만들어 담무갈보살을 봉안했다. 신라의 승려 법기가 그렇게 했다. 법기는 금강산에서 도를 깨치고 그 상을 만들어 주벽으로 삼았다. 불전의 남쪽에는 불좌를 동쪽으로 향해서 설치했다. 그것은 이 지대가 움직이는 배처럼 생겼기 때문에 키(舵)에 앉은 모양으로 부처를 봉안한 것이다”며 표훈사의 지리적인 형태까지 기록했다.
 
정양사 반야전에는 법기보살을 모셨다. 법기보살 신앙은 14세기 초,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고려의 이색이 쓴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에는 지공대사가 “동쪽 … 금강산 법기도량에 참례하였다.” 인도 출신의 지공대사는 1326년 고려에 입국하여 거의 2년간 머물면서 풍악산을 찾았다. 장안사와 보현암, 표훈사와 정양사 등을 순례하고 중국과 서역에까지 금강산을 알리는 홍보대사를 맡았다.
 
조선 전기의 신숙주는 <임금을 모시고 풍악산 구경> 시에서 “풍악은 명산이라 온 세상이 보고 싶어하는 산”이라 했다. 실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당연히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명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고려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랴”고 기록했다.
 
이처럼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은 불교에 의한 성지, 나라를 위한 명산, 만백성들이 꿈에 그리던 다이아몬드 마운틴이다. ‘명산에는 명찰(名刹)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유점사와 장안사 그리고 현존하는 표훈사와 더불어 다시 복원된 외금강 신계사가 옛 4대 고찰이었다. 여기에다 108개의 사찰이 해방 전까지 금강산에 골골이 자리했었다.
 
다가올 금강산관광 시즌에, 정양사로 갈 적에는 광학렌즈나 와이드 카메라를 꼭 준비해야 한다. 거대한 자연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그나마 챙겨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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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사 전경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