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보덕암(下)

밀교신문   
입력 :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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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폭동, 신화와 전설을 담다

법기봉 보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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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고 19세기 말,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금강산을 두고 한 말이다.
 
1894년 이후 4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그녀는 서양 여성으로 금강산을 최초로 찾았다. 1898년 영국에서 출간된《금강산으로의 여정》에는 “저 여름의 맛깔스러운 푸르름 속으로. 이런 묘사는 한갓 카달로그일 뿐이다.” 지구촌에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마운틴(Mountain)’이라 알렸다.
 
그녀는 “확실히 17.7km에 달하는 이 만폭동 계곡의 이름다움은 이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을 것이다. 장엄한 절벽들, 솟아오른 산악과 산림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잿빛 산정, 층층이 뿌리 내린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푸른 하늘에 맞닿아 한 줄기 실낱처럼 좁혀들었다. 그 둘레에 맑은 물이 맴돌듯 흐르다가 미끄러져 내려가 분홍빛 화강암이 잠긴 분홍빛 여울로 모여들어 에메랄드의 푸른빛보다 더 찬란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모여드는 여울 위에는 다양한 형태로 솟아오른 암벽들이 있었다.” 검푸른 물색은 맑은 물에 게르마늄 성분이 들어 있고, 하얀 바위 못에 물이 담겨서 더 파랗게 보인다.
 
1349년 고려의 이곡은《동유기》에서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풍악에 구경 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띠면서 말없이 기도를 드렸다.” 조선 초기의 권근은 “내가 어릴 때 일찍이 들으니, 천하 사람 중에 와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다. 그곳에 가서 보지 못함을 한탄하여 심지어는 그림을 걸어 두고 예를 갖추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근세기의 이광수는《금강산유기》에서 “나는 천지 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고 내금강을 표현했다. “금강산은 결국 만폭동 계곡 하나를 보러 오는 것이다”라고 최남선이《금강예찬》에서 한 말이다. ‘금강산의 깨끗한 속살’ 같은 내금강은 2007년 6월 시범 관광으로 잠시 열렸을 뿐 지금도 닫혀 있다.
 
부처와 신선의 땅, 만폭동
천연기념물 제455호 내금강 만폭동은 신생대의 단층운동과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곳이다. 만폭 8담은 검푸른 용 같은 흑룡담, 비파 선율을 타는 비파담, 물안개가 푸른 파도 같은 벽파담(벽하담), 하얀 눈을 뿜어내는 분설담, 보석처럼 아름다운 진주담, 거북바위 구담, 못의 모양이 배 같은 선담은 모양이 변해서 뚜렷하지 않다.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용이 입으로 불을 토해내는 것 같다는 화룡담이 제8담이다. 외금강의 상팔담과 구별하기 위해 내금강 팔담이라 한다, 골짜기 너비는 일정하지 않고, 깊이는 약 50∼70m로 골짜기의 양사면은 거의 다 절벽이다.
 
15세기 남효온은《추강집》에서 “냇물이 여기에 이르면 더욱 신기하고 아름답다. 10여 리에 걸쳐서 하나의 흰 바위가 끊어지지 않고 곳곳이 폭포이다. 그 아래는 깊은 못이고, 못 아래에 또한 폭포가 있으므로 골짜기 이름을 만폭동이라 하였으니, 폭포가 하나뿐이 아님을 표시한 것이다”고 했다. 16세기의 봉래 양사언은《봉래집》<금강산> 시에서 신선들의 세계라 했다.
 
산 위에 산 솟으니 하늘 위에 땅 생기고(山上有山天出地)
물가에 물 흐르니 물 가운데 하늘 있네 (水邊流水水中天)
아득해라 이내 몸 허공 중에 떠 있는가(蒼茫身在空虚裏)
신선 세계 아니거니 신선도 아니여라(不是煙霞不是仙)
 
16세기의 휴정 서산대사는《청허당집》<만폭동> 시에서 부처님의 땅이라 했다.
 
넓고 넓은 이 세상에 가사 한 벌 걸치고(乾坤萬里一肩衲)
흰 구름 나는 곳을 몇 번이나 걸었더냐(幾處白雲飛短筇)
금강산 만폭동이 부처의 나라 분명쿠나(楓岳洞天眞佛國)
흐르는 물 구슬이요 봉우리는 옥이로세(琉璃為水玉為峰)
 
1710년 겸재 정선은 “골짜기로 100가지의 물이 쏟아지는데 그 모습이 모두 달라 ‘만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그의《금강전도》에 이 그림들엔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천금물전(千金勿傳)’이란 도장이 남아 있다. 1788년 강세황은《유금강산기》에서 “어째서인가. 금강산이 유람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고 금강산이 유독 바다와 산의 선계(仙界)이기 때문인데, 신령한 풍광과 동굴과 거처는 온 나라의 명성을 크게 드날려, 아이나 아녀자도 어려서부터 귀에 익고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만폭동은 만 개의 폭포가 있으니 만 개의 바위가 있고, 만 개의 못(潭)이 있으니 만 개의 울림소리(聲)가 난다고 한다. 안내를 맡은 승려들은 가는 곳마다 불교 관련 전설을 이야기하고, 유산객에게 금강산은 걷는 걸음걸음마다 불국이 아님이 없었다.
 
만폭동 찬가의 백미, 암각자
내금강 만폭동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봉래 양사언의 ‘봉래풍악(蓬萊楓岳) 원화동천(元化洞天)’이라 새긴 여덟 글자를 먼저 찾는다. 오죽하면 18세기부터 이 글씨를 두고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중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라 말할 정도였다.
 
1566년 강원도 회양 부사가 된 양사언은 자주 왕래하면서 만폭동 계곡 초입에 해당하는 금강대 아래의 청룡담 위에 길이 200m, 너비 15m의 너럭바위에다 “봉래ㆍ풍악산은 으뜸의 조화를 이룬 동천이다”라는 뜻의 한자를 새겼다. 그 옆에는 ‘만폭동’ 세 글자도 초서로 같이 새겨 놓았다.
 
불멸의 금석문으로 평가되는 양사언의 여덟 글자는 웅장하고 힘찬 필세는 금강산과 견줄 만큼 뛰어난 신품이라 회자됐다. 16세기 양대박은《금강산기행록》에서 “골짜기 입구에 봉래풍악원화동천 여덟 글자가 있었다. 자획이 서까래만 한 큰 붓을 휘두른 듯 훌륭하였고, 바위 면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쓴 것인지 모르겠다. 백 겁을 지나서도 어제 쓴 듯할 것 같았다”고 했다. 또 조경은《용주유고》에서 “그가 회양 부사로 있을 때 만폭동 입구에 여덟 글자를 새겼다.” 홍여하는《풍악만록》에서 “필획이 기이하고 위엄이 있어 산중의 공안(公案)이 될 만하였다.” 1711년 법종선사는《유금강록》에 “청룡담에 이르니 그 아래에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초서의 필세가 규룡(虯龍)이 화가 나서 질주하는 듯하고, 은 갈고리에 쇠줄을 이어놓은 듯하여 비록 왕희지의 필법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으니 참으로 산속의 보배로운 구경거리였다.” 또 “청룡담 위쪽 편에 있는 바위에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이라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곡운 김수증은《풍악일기》에서 “1680년 9월 청룡담에서 약간 올라가 수건바위 아래에 그 여섯 글자를 크게 써서 석공에게 새기게 했다.”
 
조선 말기의 이유원은《임하필기》에서 “청학대 아래 바위에 ‘소동령령(疎桐泠泠) 풍패청청(風佩淸淸), 봉래풍악원화동천, 만폭동’ 문구는 모두 양봉래의 글씨다. 또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이란 글씨는 김곡운의 글씨였다. 또 돌 면에 바둑판이 새긴 이름은 삼산국(三山局)이라 했다.” 봄ㆍ여름ㆍ가을에만 바둑을 두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밖에도 “무수한 바위는 빼어남을 다투고, 온갖 계곡물은 앞다투어 흐른다”는 여덟 큰 글씨가 새겨져 있어 만폭동 절경을 더 운치 있게 만들어 준다.
 
조선 후기의 윤휴는 ‘만폭동의 경치를 신선의 세계(洞天)’이라 칭했다. 금강대 암벽에는 1975년 새긴 ‘지원(志遠)’이란 커다란 글자가 있는데, 새길 당시에 바위틈에서 국보 제25호 금제미륵보살좌상 등 불상과 1379년 제작 명문을 새긴 불감 등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현재,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나옹선사가 쓴 선서
 
만폭팔담의 6번째 거북소 너럭바위에 있다. 잘못된 기록으로 인해 금강대 즉, 청룡담 아래 너럭바위 새긴 여섯 글자와 헷갈리기도 한다. 1709년 이의현은《유금강산기》에서 “구담에 곡운옹이 팔분체로 쓴 ‘천하제일명산’이란 여섯 개의 큰 글자가 있었다.” 또 “벽하담의 ‘천암경수만학쟁류’ 여덟 글자도 곡운의 필체인 듯하다”고 했다. 나옹왕사의 별호가 곡운옹(谷雲翁)인데, 1366년 표훈사에서 16성상을 조성할 때 쓴 것으로 700년 남짓한 선의 글씨이다.
 
법기보살의 문패, 암각자
법기봉 정상, 오른쪽의 큰 바위는 무엇을 가르치는 듯하고, 작은 바위는 공손히 머리를 수그린 채 가르침을 받는 듯한데 법기암과 파륜암이다. 법기봉 맞은 편, 소향로봉의 경사면 아래쪽 벼랑에 ‘석가모니불, 법기보살, 천하기절’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법기봉을 향해 합장하듯 새겨져 있다. 1920년 표훈사 주지 김명오의 시주금으로 만들었다고《유점사본말사지》에 기록됐다. 해강 김규진이 초서를 쓰고, 일본인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그라인더로 음각했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암각글자다.
 
보덕각시 전설의 영아지
보덕암 벼랑 아래쪽, 만폭동 개울에는 금강산의 요정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고 화장했다는 옥녀세두분이라는 너럭바위가 있다. 여기에는 직경 40㎝, 깊이 40㎝의 둥근 돌확이 있는데, 고려 중기에 회정선사가 샘물에 비친 관음보살을 보았다고 하여 영아지(影娥池)이라 부른다. 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덕각시가 세수하고 수건을 걸었다는 수십 길 절벽인 수건바위가 있다.
 
한편, 관음담 벼랑에는 육당이 “기쁨의 더덕인 금강산에서 오직 한 눈물로 대할 곳은 이곳이다. 애각의 밑은 청룡담이니 구태여 이 근처에서 돌이 약간 붉은 기운을 띠어 마치 임을 여의고 울던 당시 매월당의 피 섞인 눈물에 물든 듯하매 구경보다도 느꺼운 생각이 앞선다”고 한 것처럼 ‘1479년 가을에 44세 노인이 여덟 번째 와서 쓰다’라는 36자 매월당의 암각 글씨가 새겨져 시대적 아픔을 전하고 있다.

10면-만폭동계곡 암각글씨 _이지범 사진.jpg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