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북한의 현존사찰- 강원도 마하연 (上)

밀교신문   
입력 : 2019-06-04  | 수정 :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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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선의 궁궐에 들다

 

내금강 마하연(摩訶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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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은 내금강 최고의 명당으로 꼽혔다.
 
조선 후기의 김창협은《동유기》에 “등 뒤에는 중향성이 있어 병풍을 친듯하며 앞에는 혈망봉, 담무갈 등 여러 봉우리가 빙 둘려 역시 병풍을 친듯하니 진실로 명가람이다.”, 이상수는《동행산수기》에서 “마하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다만 문간이었을 뿐. 지금에 처음으로 본당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옛 문인들은 마하연을 두고 ‘당오(堂奧)에 들었다’고까지 했다. 정조대왕과 다산이 육유의 시를 배워 두보에 이르는 것이나 추사와 자하 등이 소동파를 통해 두보에 이르는 것은 각기 경로가 달라도 결국 두보의 시학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다. 불문에서 보면, 당나라 규봉종밀 선사의 사선입교(捨禪入敎)과 청허 휴정대사의 사교입선(捨敎入禪)이 모두 선교쌍수(禪敎雙修)와 같다.
 
마하연은 한양도성의 경복궁과 같이 내금강 선의 궁궐(禪宮)이었다. 그저 중앙, 중심부를 넘어선 ‘부처를 기르는 곳’인 선불장이었다. 조선의 조사, 선사들이 살던 선경으로 수좌들의 구중궁궐이었다.
 
마하연의 마하는 음속을 넘는 속도와 엄청나게 크다는 의미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큰 수레바퀴를 굴리다.’ 즉, 위대한 가르침이 넘쳐나는 곳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100여 명의 선사가 선수행으로 살았다. 육당 최남선은《금강예찬》에서 마하연을 두고 ‘금강의 심장’이라 불렀다.
 
이곳에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장안사와 표훈사를 거쳐 만폭동으로 가는 코스와 유점사를 지나서 내무재령을 통한 코스다. 1894년 영국의 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금강산으로의 여정》에서 “금강산의 등산 코스는 첫째, 유독 물살이 급한 계곡을 따라가다가 안문재에서 분수령을 넘어 주요 사찰들이 위치한 곳이나 그 부근으로 가는 코스. 둘째는 좀 완만하고 보는 재미가 덜한 이미 조사된 코스이다. 이 두 코스는 모두 장안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장안사를 대신해 표훈사가 시작점이라면 마하연은 그 정점이다.
 
마하연, 내금강 최고의 명당
보존유적 제197호 마하연은 677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유점사본말사지》에 기록됐다. 661년 창건했다는 설은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670년 귀국했기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676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직후에 영주 부석사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비롯한 여러 사찰이 건립하던 때에 창건됐다.
 
19세기 말엽, 강원도 건봉사의 승려 회명일승 선사가 지은 <금강산마하연삼회중건기문>에는 “661년 신라 문무왕 원년, 의상 조사가 중향성(衆香城)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고 여기에 창건하였다.” 이것은 창건 시기보다 법기보살을 친견한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19세기 초에 화악지탁 선사가 지은 <금강산표훈사마하연중건기>에 의하면 “옛날 의상 조사가 중향성에 들어와 법기보살 주처를 예배하고, 만 이천 보살과 함께 마하반야(摩訶般若)를 강설하는 까닭에 조사가 창건하고 이름을 마하연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는 1236년 8월 15일 개경 왕륜사의 거빈(巨貧) 비구가 마하연 방장(方丈)의 북쪽 봉우리에서 소신공양했다고 한다. 나옹 왕사는 1366년 표훈사에 16성상을 조성하고, 백운동의 묘길상을 원불(願佛)로 다시 조성할 때 마하연과 불지암 등에 머물면서 인력과 장비를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1465년 왕(세조)이 친히 표훈사에 가서 대향로를 마하연에 하사했다. 세조는 부속 암자인 원통암과 불지암에서 경찬회를 친히 베풀었으나, 근기가 소승에 머물렀기에 대승인 마하연에 오지 못하고 법회도 열지 못했다고 속전에 전한다. 1522년 마하연에 출가한 조선 중기의 허응당 보우 대사는 금강산에서 경학과 참선을 연마하고, 후일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서울 봉은사 주지로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켰으며, 도첩제에 의한 승과를 설치했다고《허응당집》에 전한다.
 
금강산의 주봉, 비로봉을 진산으로 하는 마하연은 내금강의 봉우리가 내어놓은 가운데 자리에 봉긋하게 솟은 산정에 전망대처럼 자리했다. 뒤편 좌측에는 수많은 향불(香火)이란 뜻의 중향성 봉우리이다. 피어오르는 향기가 겹겹이 성벽을 둘러친 듯 병풍 같은 장관을 이룬다. 뒤편에 촛대봉 그 오른쪽으로 사자봉, 파륜봉이 있다. 왼쪽으로는 칠성봉, 석가봉이 서 있다. 앞에는 혈망봉과 법기봉, 관음봉이 솟아있고, 왼쪽의 나한봉과 그 옆 백운대는 백운동의 경관을 더 돋보이게 한다. 마하연의 장관은 저녁노을이 질 때이다. 누런 황금빛을 뿜어대는 백운동의 경관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1553년 홍인우가 쓴 기행문《관동일록》에 “절 주위에 향나무가 빙 둘려 있는데, 이곳을 오향성(五香城)이라 부른다”고 했다. 지금은 전나무와 소나무가 텅 빈 곳을 지키고 있다. 1555년경 금강산에 입산한 율곡 이이는 오언절구의 금강산 기행시 ‘풍악행’에서 마하연을 금강산의 금당(金堂)으로 보았다.
 
나무에 둘러싸인 부처님 전각은(萬樹衛金殿) /그 이름이 마하연이다(是名摩訶衍)
아 가장 신비스러운 이 땅이(吁嗟最靈地)/천 년 동안 헛되이 버려졌구나(千載空虛棄)
1586년 여름, 서울 봉은사에서 사명대사와 제형지교(弟兄之交)를 맺은 교산 허균은 금강산 마하연을 찾아 남긴 시가 전한다.
절이 구름을 밀치고 솟아(寶刹排雲上)/집은 노을빛을 받아 곱기도 하다(珠宮奪日鮮)
경전 함에는 패엽경이 빛나고(經函明貝葉)/화로에는 전단향이 그윽하다(爐燼郁栴檀)
스님들은 삼매에 들어 있고(僧侶參禪坐)/나는 걸상을 빌려 잠이 들었다(吾仍借榻眠)
밤이 이슥해지자 바람소리 들리고(夜闌風藾發)/신선의 학이 세상으로 내려오네(笙鶴下三天)
 
조선의 4대 선방, 마하연
근대에 집배원은 마하연까지만 다녔다. 절에 사는 사람이 많아 특별히 우편물을 배달한 것이다. 중내원을 비롯한 내금강 더 안쪽에는 서로 인편으로 전달했다. 이런 일상사가 외형이라면, 확철대오의 열망으로 수행하는 구도자에게 마하연은 생사여탈의 보루였다.
 
‘해동제일선원’으로 불렸던 마하연 선원은 일명 선방은 묘향산의 상원암, 팔공산의 운부암·백흥암 선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선방으로 유명하다. 1900년대 선가의 지대방 이야기로 시작됐다. 티타임 이야기가 전설로 다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39년 선학원이 주최한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에서 금강산 마하연을 모범 선원으로 지정하는 등 선풍 진작을 위한 논의에서 나온 이야기로 선방의 전설이 탄생했다. 그 당시에는 남한의 2대 중심 선원으로 태조산 도리사와 팔공산 운부암을, 북한에는 내금강 마하연과 묘향산 상원암을 꼽았다. 하나씩만 꼽으면 북녘에는 마하연, 남녘에는 운부암으로 했다. 그로부터 “북마하(北摩訶) 남운부(南雲浮)”라는 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은 1931년 선학원이 간행한《선원》지에 의해 알려졌다. 만공 선사는 1933년부터 금강산 유점사 비로선원과 1935년 마하연선원의 조실을 지냈으며, 혜월 선사는 1932년부터 팔공산 운부선원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경허 대사의 세달[三月]로 비유되었는데, 북녘의 상현달인 수월 선사와 중천의 보름달인 만공 선사 그리고 남녘의 하현달인 혜월 선사이다. 표훈사가 1935년에 창간한 잡지《금강산》에, 금오선사는 1911년 안변 석왕사로 출가해 3년간 정진하고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긍현 선사를 은사로 계를 받았다. 성철 스님이 1939년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한 이후에 더 알려졌다.
 
조선 승려의 경연장, 마하연 
1757년에 편찬된《여지도서》<회양부>에는 “표훈사에서 마하연까지 10리다”고 했다. 1717년 충흡과 해훈 선사가 운판을 주조해 달았다. 1735년에는 회양부사 어유붕이 마하연 본전을 중수했다. 1832년 용담, 용암, 월송 삼사(三師)가 ‘ㄱ’자 형태로 사방 8자(尺)의 53칸 방(房)을 가진 큰 건물을 중건했다. 총 135평 규모의 마하연 옛 사진은 이때의 모습이다. 1848년 대운대사가 마하연 선원을 뒤쪽으로 새로 지었다. 1855년 호봉 응규 대사가《화엄경》66권을 사경하여 봉안했다.
 
추사 김정희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경전서사(經典書寫)의 공덕을 높이 찬양한 것은 바로 호봉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면서 봉은사 주지 응규 대사를 지혜와 덕성을 겸비한 분으로 평가했다. 1886년 의운대사가 중건하고, 1892년 불화를 그리는 금어였던 응월당 선화 대사가 본전을 보수하면서 선원을 서편으로 옮겼다. 근대의 수월선사는 1892년경 내금강 마하연을 찾았는데 선방 조실로 모셔졌지만,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앉아서 철야정진하며 말 없는 가르침을 내렸을 뿐이다. 1919년 새해에는 범패승 이만허 법사가 혈서로 7축(軸)의《법화경》을 1920년 4월 완성해 봉안했다. 1932년 표훈사 주지로 금어였던 화응 형진 선사가 59칸의 당우를 3차로 중수했다. 첫 번째 건물은 남동향, 두 번째 건물은 남쪽과 남남서 사이, 세 번째 건물은 남동향으로 건립하고 동구 밖 삼거리에다 중건사적비를 세웠다.
 
내금강의 아름다웠던 선궁은 1965년 여름, 대홍수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 잔해가 십 리 길이나 되는 표훈사 앞까지 떠내려왔다고 한다. 59칸 본전이 있던 곳은 터만 있고, 그 아래쪽에는 보존유적 제237호 칠성각 한 채만이 남아 있다. 빈터로 남은 마하연은 1989년 출판된 법정스님의 수필집《텅 빈 충만》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텅 비었을 때 비로소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하다’는 것처럼 진실로 비운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화두가 생겨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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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 전경(1896년.한국저작권협회.해제자료)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