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마하연(下)

밀교신문   
입력 : 2019-06-24  | 수정 : 2019-07-08
+ -

금강산, 사라진 절을 찾다

 

마하연과 유점사

20190604092419_e77097b1e24ef6cdf91919812b2535d6_ftzp.png

 
해방 이전까지 금강산은 동해 바닷길 이외에 ‘단발령’을 넘어야 갈 수 있었다. 험한 고개를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가면 장안사에 도착했다. 높이 834m의 산 고개는 강원도 창도군 창도읍과 금강군 내강리 사이에 있다. 일설에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 고개에서 삭발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또 이 고개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에 반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단발령이라 했다.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에는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에 대해 “내가 일찍이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마침 가을 하늘이 짙푸르고 넘어가는 해가 비꼈는데, 산이 하늘 높이 솟아 아름다운 빛과 윤기 있는 맵시가 비할 데 없어서 아닌 게 아니라 과연 금강산이 다르구나 하고 감탄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통일이 된다면, 두 발로 걷는 힘든 단발령 고갯길이 아니라 1931년 7월 1일 장안사 근처의 내금강역까지 개통한 전기철도를 통해 기차여행을 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이다.
 
1918년 7월, 한반도 철도의 전체를 지휘하던 남만주철도회사는 장안사의 극락전을 개조해 ‘장안서(長安寺)’라는 호텔을 만들었다. 그 당시 제작한 금강산 탐승 책자에는 “장안사에는 장안사호텔 이외에는 조선식 여관이 2~3개 있을 뿐 일본 여관은 없다"라고 쓰였다. 이 무렵 사하촌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유흥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대거 등장했다. 물물교환 장마당이던 승시(僧市)가 초하루와 보름을 기해 장안사에 열리기도 했다. 194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장안사의 사하촌은 1945년 8월 일본 패망과 분단 이후, 내금강역 주변의 내강리 마을과 내금강 호텔이 있었던 곳에 내금강 휴양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산하가 변하듯 금강산의 천년고찰도 수많이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 오늘날 사라지고 빈터로 남은 유점사와 마하연 등은 찬란했던 금강산 불적의 오래된 미래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속담
대개 속담에는 바람이나 풍자적 내용이 담겨 있다. 그중에 ‘금강산도 식후경’이 유명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지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금강산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옛 민중들의 애환이 담긴 말이다. 조선 후기에 처음 생겨난 속담으로서, 중국 사신들과 여성 황진이도 드나들었던 금강산과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마하연, 금강산의 심장
지금, 내금강의 심장은 멈춰 있다. 고려 말기의 이제현은 “오래된 절에 스님은 살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 세조는 표훈사에 와서 마하연에 향로를 하사했다. 초기 때의 남효온은 1485년 4월 2일 마하연에 도착했는데, “절에 있던 노승 나융이 나와서 나와 함께 얘기하며 마하연의 사적을 보여주었다. 뜰 가운데에 있는 풀은 형상이 부추와 같고 꽃이 조금 붉었다. 나융이 말하기를 ‘옛날 지공이 이 산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이 산의 흙과 돌은 모두 부처이고 유독 여기만 빈 땅이다’고 하며, 여기에 서서 산꼭대기의 관음보살에 예배하였소. 그가 섰던 땅에 이 풀이 나서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시들지 않으니 산인들이 지공의 풀(指空草)이라 부른다”고 했다. 1572년 양대박은《금강산기행록》에서 “이곳은 신룡(神龍)이 턱밑에 감추어둔 여의주에 해당하며, 오랜 세월 동안 금색 모래가 덮인 곳이다. 뜰 앞에는 계수나무 고목이 있고, 창밖엔 돌 샘물 졸졸 흘러내린다.”
 
최립은 “(마하연에) 나그네가 묵으면 비가 온다는 산속의 이 일이 전고로 전해진다”고 했다. 조선 후기의 이민서는 “지금은 폐절되어 사람 없고 버려두니 문 앞에는 이끼 돋고 낙엽만 덧쌓였구나.” 그 후 이동표는 “8월에 갔는데, 승려가 없이 비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적의 침탈과 아전들의 횡포였다.
 
1800년대 53칸의 대찰이던 마하연은 1830년대 율봉화상이 수백 명이 참가하는 법회를 열고 화엄일승을 강설했다고 한다. 1924년 최남선은《금강예찬》에서 “금강산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마하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내금강의 심장부라 일컬어진 마하연은 1930~40년대 비로봉을 오르던 탐방객들에게 판도방을 내어준 내금강 제일의 산장이었다. 구한말 때의 최익현은 “마침내 알겠으니 산 전체에 가장 최고는 마하연 북쪽을 두른 중향성이네”라고 했다. 6.25 전쟁 때 폭격과 방화로 불에 탔고,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은 1965년 대홍수에 소실되었다.
 
만폭동 화룡담에서 계곡을 따라 500m쯤 지나면 골짜기 동쪽으로 평평한 곳에 마하연이 자리했다. 절터 입구에는 중건비와 공덕비가 3기가 서 있다. 토지를 기증한 내용이 적힌 공덕비는 머릿돌에 새긴 도깨비 문양이 특이하다. 장대석 몇 단만이 남아 있는 마하연 터 동구에는 구한말의 영호스님이 비문을 짓고, 김돈희가 쓴 사적비가 있다. 오른쪽 옆길을 따라 50m 가면 보존유적 제297호 칠성각이 자리한다. 마하연의 유일한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소박한 맞배집 건물이다. 비바람을 막기 위해 밖으로 풍판을 붙였다. 터 부근에는 1909년 처음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233호 금강초롱 군락지가 있다. 터에서 조금 더 오르면 관음보살의 제자인 남순동자 바위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만회암 터와 수미암(岩)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으뜸 도량, 유점사 
1912년 제정된《유점사본말사지법》에서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신령스러운 도량’, ‘풍악 최초의 정사(精舍)’라 했다. 그 닉네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보존유적 제1719호 유점사는 절 주위에 느릅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신라 남해왕 즉위 원년인 서기 4년에 창건했다는 연기(緣起)가 전한다. 고려의 민지가 1297년에 지은《금강산유점사사적기》와 탄월스님이 1942년에 쓴《유점사본말사지》에 따르면 한반도 최초의 사찰이 되는 셈이다. 고려 말기의 최해는 “근래, 어떤 사람이 보덕암의 승려가 지은《금강산기》를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기에 읽어보았더니, …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기 62년 전, 부처가 있는 줄도 모르던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부처를 위해 절을 세운 것이 되니, … 그 가운데 큰절만 해도 보덕사・표훈사・장안사 등이 있다”고 했다.
 
‘보덕사(報德寺)’는 유점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의 민지는 <금강산시> 서문에서 “이 명산에 노닐며 보덕사(또는 대수성보덕사)의 53 석가와 중향성의 담무갈보살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처음 알렸다. 최해가 문집에 다시 인용했고, 1680년 태모대사가 재를 올리고,《금강산대수성보덕사향화사적기》를 찬술하여 알려지게 됐다. 
 
전하는 이름 그대로 유점사는 금강산을 대표하는 천년고찰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비로봉을 진산으로 하지만, 청룡산을 뒤로하고 남산을 앞에 두고 있는 유점사는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에 위치한다.
 
서기 4년, 강원도 안창현의 태수 노준이 인도에서 조성했다고 전하는 53불(佛)을 봉안하면서 개창한 유점사는 750년경에 다시 수성보덕사로 중창됐다. 당시에 현판은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붙였다고 전한다.
 
1168년 자순과 혜쌍 선사가 고려 왕실의 도움으로 500여 칸을 건립하고, 1188년에 문태대사가 청석으로 13층 탑을 조성했다. 1284년 행전선사가 600여 칸을 건립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중창됐다. 1408년에 3,000칸의 당우가 중건됐고, 1467년 왕명으로 학열대사에 의해 거찰이 되었다. 1469년 대종을 주조하여 봉안했는데, 정인지가 글을 짓고 정난종이 쓴 대종기가 있었다. 1611년에 8면 13층 석탑을 중건했다. 1759년 승병대장 보감이 10년의 공사 끝에 능인보전을 비롯한 6전(殿) 3당(堂) 3루(樓)를 중건했다. 1806년 해숙과 원혜 대사가 흰 돌로 9층 탑을 다시 세웠다. 근대에도 몇 차례 중수된 유점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 31본산의 대본산으로 조선을 대표했다.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0일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60여 동의 건물이 사라져 폐허가 되고 석등, 석탑을 포함한 문화재도 모두 소실됐다. 북한《조선중앙통신》은 2002년 12월 13일에 “미군의 유점사 폭격을 가리켜 ‘귀축 같은 만행’이었다”고 보도했다. 
 
묘향산으로 간 유점사 종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유점사 범종은 1984년 9월 묘향산 보현사 종각에 옮겨졌다. 1469년에 조성된 범종은 국보 문화유물 제162호로 지정됐다. 1729년에 주조된 능인보전의 종은 현재, 춘천국립박물관 2층 전시실의 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산 53불의 비밀 
누구나 아는 척하는 유점사의 53 금동불을 비롯하여 표훈사 53 철불, 삼불암 53 마애불, 마하연 53칸 승방 등 특정한 숫자로 고리를 이루었다. 인도의 문수보살이 순금으로 만들어 보낸 능인보전의 53불은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하고, 표훈사 반야보전 앞의 53불은 임진난 때 왜적들이 훔쳐서 갔고, 마하연 53 승방은 6.25 전쟁 때 불에 타 버렸지만, 삼불암 53 입상불은 옛날 그대로 서서 금강산을 보듬고 있다.
 
내우외환마다 민중의 열망이 깃든 금강산의 53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의 스승인 세자재 대왕 이전에 있었던 정광여래에서 처세여래에 이르기까지 53분을 가리킨다. 13세기 말, 민지의 창건 연기설화를 기반으로 했다. 53(佛)이라는 도상적 의미를 새롭게 창안하고 느릅나무에서 유래한 유점사의 이름이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그곳에 걸맞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불어 넣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수준을 넘어 우리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데는, 우리 후손들의 ‘간절함’이 담길 때 진솔함이 나타난다는 것을. 

6면-유점사 _조선고적도보.jpg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