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북한의 현존사찰- 강원도 불지암

밀교신문   
입력 :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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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문명, 엘도라도의 땅

내금강 불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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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영화나 팝송의 소재화된 엘도라도(Eldorado)는 ‘황금이 넘쳐난다’는 황금의 고장에 대한 전설이다. 16세기경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 아마존 강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는 피로 물든 전설의 땅으로 곤살로 피사로의 엘도라도 원정대가 대표적이다. 스페인어로 ‘금가루를 칠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온몸에 황금가루를 칠한 남아메리카 인디오의 전설이다.
 
신라는 예로부터 왕관, 그릇 등이 유명해서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다. 7~8세기경의 통일신라 시대에 황금 불상이 조성되어 국토 여러 곳에 봉안됐다. 금강산 유점사의 53 불상이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약탈의 표적이었다. 프랑스인 에밀 부르다레가 방문하고 1904년에 쓴《한국에서(En Corée)》에서 “유점사의 53불은 9마리용 목조상과 같이 불단에 안치됐다”고 특이하게 기록했을 정도다.
 
천 년 전, 강원도 내금강 화개동 불지골에는 “옛날 수행하던 스님이 땅을 일구다가 금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 불지암이 자리하고 있다.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금강산의 모든 사찰에는 금불상 등 황금으로 된 불기들이 가득했다. 특히, 1974년 내금강의 금강대 바위틈에서 고려의 금불상 등이 무더기로 출토되는 등 내금강은 그야말로 황금의 땅으로 일제강점기의 엘도라도라 불리게 됐다.
 
둔행칠리의 험난한 길
저녁노을 비칠 때면 황금 불상으로 변하는 묘길상에 가려면 수류화개동의 옛 문수암과 불지암을 거쳐야 한다. 유점사에서 내무재령을 넘어올 때는 반대이다. 흔히 내금강 코스는 대개 묘길상을 반환점으로 하여 표훈사, 옛 장안사로 다시 회귀한다. 유점사에서 장안사까지는 약 30리에 이른다. 지난 2007년 여름에 잠시 열렸던 코스도 이와 같았다.
 
마하연에서 동쪽, 성문동을 지나 가섭동에 이르면 신라 때의 자장율사가 이름을 붙인 가섭암 터와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미암 터, 만회암 터 등이 있고 서쪽에는 박빈거사가 창건한 선야암 터가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절벽에 거빈굴이 있고, 그 기슭의 평탄한 곳에 불지암이 자리한다. 1557년 9월 이곳을 찾은 유운룡은《유금강산록》에서 “거빈굴에는 바위 위에서 서까래를 걸쳐 겨우 두어 칸짜리 집을 얽어두었다. 벼랑을 붙잡고 반야암으로 내려왔다. 반야암은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 산길은 ‘새나 다닐 수 있는 험한 길’이라 했다.
 
가섭암 터에는 깊이 8칸 정도의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사용한 널찍한 굴이 있다. 636년 신라의 지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이곳에 이르러 “이 굴은 그윽하고 고요하다. 밝고 묘하기가 서역의 빈발암과 비길만하다”고 했다. 이때부터 가섭암이라 불렀지만 폐사 시기는 알 수 없다. 빙발암(氷鉢庵)이라고도 하는 빈발암은 가섭존자가 불경 제1 결집의 장소인 인도의 빈발라굴을 상징한다.
 
제석천의 궁전을 뜻하는 수미암과 바위로 된 수미탑 서쪽에 선암이 있다. 수미암에서 선암까지는 금강산에서 가장 험준한 산길인데 ‘둔행칠리(臀行七里)’라 부른다. 춘원 이광수는 1924년에 쓴《금강산유기》에서 “(산길을) 내려오려면 엉덩이를 대고 걷는 데가 7리나 된다”는 뜻이라 했다. 강원도 금강군 태상동구역의 미륵암 터에서 선암으로 가는 산길은 험한 바위 절벽이 많아서 앞으로 갈 때 발로 더듬고, 손으로 붙잡고, 엉덩이를 바위에 기대어 넘어지고 미끄러지지 않게 7리의 노정을 눈감고 험한 길을 따라가므로 둔행칠리라 불렀다.
 
선암은 지장봉 남쪽 아래에 배처럼 생긴 널찍한 바위 위에다 서너 평 정도의 암자로 세워졌는데 터만 남아 있다. 고려 경종 3년(978년)에 박빈거사가 창건한 선암은 “박 거사가 금강산에 들어와 기도한 지 3년 만에 혜안이 저절로 열렸고, 십 년 만에 법신을 얻어 대낮에 배를 타고 하늘을 다녔고, 기도한 지 30년이 되던 해 백종일에 용선(龍船)을 타고 왕생했다”고 하여 용암이라 한다. 이 암자의 석등 밑에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장군수라는 작은 샘이 있다. 그 옆에는 지장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 자운담이라는 맑은 못이 있다.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지장보살의 모습이 자운담에 비쳐진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불지암 가까운 곳에는 신라의 사선과 봉래 양사언을 뜻하는 오선암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소광담이라는 소(沼)가 있다. 그 옆 바위에는 누구의 암각인지 모르는 걸출한 필치의 소광암, 수류, 화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소광암에서 언덕을 넘으면 중향성의 끝에 이르게 된다.
 
‘혜산유천’ 샘이 있는 불지암
1806년 9월 초, 이곳을 방문한 서영보는《풍악기》에서 “마하연을 지나면 옥이 끝나고 반대로 박옥에 가깝다. 가섭봉 동쪽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만회암이 있었다. 그 동쪽은 백운대이고 백운대 아래가 백운동인데 중향성의 진면목이 앞쪽에 삼엄하게 벌여 있었으며, 비탈길이 좁고 위험하여 쇠줄을 잡고서야 비로소 불지암 골짜기에 올랐다. 감로샘이 있어 물이 바위틈에서 솟아나 작은 대롱으로 받아 마시는데, 모유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생각건대, 육우가 말한 ‘혜산의 유천(惠山乳泉)’이 이런 종류일 것이다”고 했다. 중국 절강성 무석시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육유의《다경(茶經)》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금강 태상동 불지골에 자리한 불지암은 676년경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대동지지》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보수하였으며 본전과 칠성각이 남아 있다. 본전은 정면 6칸 옆면 3칸의 합각식 건물이다. 앞면 간수가 일반 건물들과는 다르게 구성된 우수로 되어 있다. 첨차의 연꽃조각, 3단 제공의 용머리, 앞면 보머리의 짐승머리, 여러 가지 문양의 단청 등을 하여 건물 안팎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널판을 댄 동서 양쪽의 두 칸과 가운데 3칸의 본당에 문을 달았다. 불상을 모신 본당 앞에는 복도와 현관의 기능을 하는 툇마루인 전퇴를 냈다. 양쪽 1칸씩의 방에는 모두 마루를 깔고, 부엌을 겸한 동쪽 방에는 별도의 문을 하나 냈다. 또 그곳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길섶에는 옛날 선학이 즐겨 먹었다는 유명한 감로수 샘터 한 곳이 있다.
 
오늘날 내금강에서 가장 호젓함을 느낄 수 있는 벼랑길을 따라가면 원적봉을 서쪽으로 하고, 월출봉의 남쪽 아래쪽에 불지암이 자리한다. 그 옆에는 계빈굴이 있다. 고려 말기의 나옹선사는 1366년경 이곳에 머물면서 인근의 묘길상 마애불을 조성했다. 조선 전기의 성임은 <불지암(佛地菴)> 시에서 “손님이 있어 하룻밤 자러 왔는데, 맞이하러 나오는 이 아무도 없구려”라 했다. 남효온은《추강집》<유금강산기>에서 “월출봉 남쪽 아래에 불지암(佛知庵)과 계빈굴이 있다”고 했다. 1557년 9월 이곳을 찾은 유운룡은《유금강산록》에서 “묘길상암을 지나는데 골짜기 물이 앞에서 소리를 냈다. 불지암(佛智菴)에 이르렀다”고 했다.
 
조선 명종 때의 보우대사가 주석하며 조선불교를 다시 일깨우는 묘안을 만든다. 그의《허응당집》<불지암에 묵으면서(宿佛地庵)> 시에는 “별천지 신선 세계는 풍경 절로 맑고, 자연 석수 다시 찾아 두 손으로 떠 마신다”며 불지암에서 수년간 수행을 했다. 1622년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간 유몽인은《어우야담》에서 “표훈사에서 은거하다가 마하연에서 유점사까지 가는 길에 불지암을 거쳐 안문점에 이르렀다”고 했다. 1627년 6월 신즙은《유금강록》에서 “월출봉과 원적봉 골짜기 가운데 불지암이 있다. 계해년에 쌓인 눈에 무너져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또 거빈굴이 있는데 을사년에 사태로 붕괴되어 또한 폐허가 됐다.” 1748년 윤달 7월, 순암 오재순은《해산일기》에서 “불지암으로 들어가 점심을 해 먹었다”고 했다.
 
1757년에 간행된《여지도서》<강원도 회양부>에 “불지암은 마하연 동쪽 11리에 있다.” 조선 후기의 황경원은《강한집》<마하연>에서 “마하연은 원통암과 불지암을 부속암자로 두고 있다.” 또 “터는 한가운데 자리 잡아 신비스럽고, 샘은 상방을 에워싸고 가늘게 흐르네. 저녁 이내는 계수나무 숲에 가득하네. 절집은 한결같이 텅 비었고, 운방은 문 닫은 지 이미 오래. 해마다 재물을 내어 산신제를 지냈다네”라고 했다. 정조 때의 성해응은 1811년에 지은《동국명산기》에서 “불지암 또는 불지암(不池庵)이라고 서로 다르게 적고 있는데, 마하연에서 동쪽을 지나면 선야암이 위치하고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거빈굴이 있으며, 그 절벽 기슭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있다”고 기록했다.
 
또 조선 말기에 편찬된《범우고》,《가람고》에서는 불지암이 마하연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했다. 1824년 당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오래되고 낡은 이 절에 시주하여 중수했다. 1864년 김좌근과 손자 김병기가 불지암에 500냥을 시주했으며, 1877년 정경부인 정씨와 김용군이 칠성각을 지었고, 1878년 탱화를 봉안했다. 1879년에는 선소, 서보 대사가 불지암을 중수했다. 1850년대 김정집은 <불지암> 시에서 “아름다운 단청으로 눈부시게 밝은 외딴 암자 하나, 바람 부니 처마 끝에서 풍경 소리 들리고 새들은 저절로 울어 대네”라고 단청과 풍경에 대해 기록했다. 1874년 8월 29일 문서인《소지(所志)》에는 신계사, 불지암 대전(貸錢) 관련 청원서로 상단, 하단 부위에 불지암의 불사 내용이 기록됐다.
 
1903년 겨울 동안거 때에는 근대의 고승 용성스님이 40세 나이로 묘향산 상비로암에서 처음으로 선회(禪會)를 열고 난 후, 불지암에 들어와 수행했다. 1910년 12월 일제강점기의 31본산 체제에서는 유점사의 말사였다. 1921년 12월 평북 초산군 서면 순학동 출신의 이응선은 그 시기에 금강산 불지암의 숲에서 발견한 높이 1.1척(尺) 되는 자그마한 약사불을 집에 모셨다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의 망해암에 옮겼다고 전해지는데, 이 석불의 모습은 현재 묘연하다. 근대시기의 시인 김영랑은 1949년 <불지암> 시의 끝 부문에 ‘허물어져 가는 고찰’이라 적고, “두 젊은 승려가 그의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고 당시의 모습을 회고했다.
 
불지암에 가는 길은 아주 험난하다.《구사론》에서 아홉 개의 산(九山)과 여덟 개의 바다(八海)를 건너서 수미산에 가듯이 눈앞에 보이는 6개의 잔도를 건너서야 겨우 이를 수 있는 내금강의 숨은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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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암 전경. 사진출처 북한의 전통사찰, 도서출판 양사재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