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북한의 현존사찰- 강원도 묘길상

밀교신문   
입력 : 2019-07-26 
+ -

한반도 최대의 마애불

내금강 묘길상

20190708162512_94f4f64c3d7f8860ce80aaba86323fd3_tgtg.png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7세기 전반부터 백제에서 시작됐다.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한 시기로, 한성백제시대의 조작품이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애불(磨崖佛)은 자연의 암벽・구릉・동굴 벽에 새긴 불상인데 태안・서산마애불, 경주 남산 마애불, 고창 선운사 마애불 등이 유명하다. 
 
북한지역의 마애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남측에 공개된 북측의 마애불은 오관산 영통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것과 신계사 뒤편의 마애불 정도이다. 그러나 내금강 깊은 골짜기의 묘길상은 상황이 좀 다르다. 유명할 뿐 아니라 이름표를 달고, 불상의 모양은 시기와 사람마다 다르게 평했다. 내금강 유람을 자랑하듯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단원 김홍도의 묘길상 그림에는 넙죽 굽힌 자세로 참배하는 두 명의 고깔 쓴 순례승이 등장하지만 다소 우스꽝스러울 정도이다.
 
원래 묘길상은 고려의 왕사 나옹선사가 새긴 원불(願佛)인데, 금강을 찾은 호사가들에 의해 약방의 감초처럼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도 묘길상은 고려 불화의 또 다른 컬렉션이다. 시간의 빅뱅을 넘은 이 야외전시장을 꾸민 주인공은 왕사이었지만, 몇 푼의 품삯을 받은 그 석공들의 고단함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 이 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마애불 없는 미륵대를 만나고, 만폭동 바위에 양사언이 없고 구룡연 절벽에 해강의 글씨가 없다면 금강산은 아름다운데 향기가 없는 꽃으로, 절세가인인데 온기가 사라진 황량한 경지로 남을 뿐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늘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묘길상, 금강산의 거불
묘길상 앞에 서게 되면 마애불의 거대함에 앞도 당하고, 또 온화한 불상의 미소와 세밀하게 새겨놓은 숱한 모양과 기록들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만폭동 계곡을 지난 수류화개동의 깊은 골짜기 사선계에 자리한다. 추사 김정희가 말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곳”이다. 미륵대의 남향 절벽에 새긴 묘길상은 미륵대를 주산으로 중향성으로 이어지는 산세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역태극을 이루며 감아 흐르는 계곡의 동쪽 평평한 터전에 자리한다.
 
남쪽에는 월출봉·일출봉 등 봉우리가 네 개 있고, 북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이다. 미륵대 암벽을 쪼아내 돔 형식을 만들고 그 안에 부조로 만든 좌상의 마애불이다.
 
국보 문화유물 제102호 묘길상은 1366년에 나옹선사가 표훈사 16성상과 백화암 삼존상과 같이 조성했다고《유점사본말사지》에 기록됐다. 공민왕의 왕사 나옹선사가 불지암에 머물면서 높이 40m의 미륵대 벼랑에다 직접 양각으로 새긴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바위에 새긴 선이 또렷하고 두툼한 얼굴의 묘길상은 염화미소로 참배객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높이 15m, 넓이 9.4m의 규모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잘 조각된 마애불로 고려의 미소, 금강산의 얼굴과 같은 존재다.
 
거대한 묘길상은 앉은 모습으로 높이와 넓이의 비례를 잘 맞추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나타낸 얼굴은 높이 3.1m, 넓이 2.6m이고 눈의 길이 1m, 귀의 길이 1.5m이다. 손가락 하나의 크기가 사람보다 크며, 두 다리를 포개놓은 높이가 사람 키를 훨씬 넘는데 손의 길이 3m, 발의 길이 3.2m에 이른다. 바위면 아래의 옷 부분은 굵고 굳세게 하는 대조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보통 정도로 양각 새김을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며 점차 낮게 돋아나게 하였다. 또 햇볕의 광선을 효과 있게 잘 이용하여 부피감을 잘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결가부좌(올방자)를 틀고 앉은 묘길상의 전체모습은 오른손은 위로 쳐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자세이다. 특히 금방 웃는 듯한 눈 맵시와 입매는 생동하고 미묘한 느낌을 준다. 부처님의 웃는 얼굴, 기다란 눈썹, 가늘게 뜬 실눈, 이마의 백호, 유달리 길게 드리워진 큰 귀, 통통한 볼, 바른 목, 앞가슴을 드러내고 두 어깨에 걸친 가사의 주름 등은 고려시대의 아미타여래 소조 좌상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을 가졌다. 원만한 얼굴과 안정감 있는 연화좌 등 흠잡을 데 없는 묘길상에 대해 단조로운 기법과 굵은 선의 처리 등 전체적으로 고풍하지만 투박한 인상을 주고 있어 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유적》에는 “본래 아미타여래 상인데 18세기 말엽 마애불 오른쪽 아랫부분에 윤사국의 필치로 음각한 묘길상이라 새긴 때로부터 부르게 된 것이다.” 글자 하나 크기가 2m인 음각자는 윤사국이 강원도 관찰사이던 1790년에 새긴 것으로, 삼불암(三佛岩)이라 써 놓은 것과 같은 필체다. 묘길상은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의 다른 이름으로 석존의 교화를 돕는 묘덕・묘수 그리고 환희장마니보적여래라고도 이름한다.
 
예로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다. 혹자들은 법기보살과 미륵불로, 관음석상이라 불렀다. 조선 전기의 남효온은《유금강산기》에서 “담무갈(曇無竭)의 석상이 있다. 대는 바로 이 산의 한 중심지인데 담무갈은 이 산의 주불이다. 그러므로 승속간에 여기를 지나는 이는 손을 모아 절하고 가지 않는 이가 없다.” 이때 그를 맞은 이가 고승 나융선사였다고 했다. 후기의 이민서는 “하늘 높이 새겨놓은 우람한 부처조각, 빈 산속 정결한 땅 저 홀로 지켜서서, 천년세월 보고 있네 오고 가는 길손들을”이라 했다.
 
묘길상의 위치가 비로봉 아래에 있고 특히 비로봉의 심장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법기보살 신앙의 금강산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다고 주장했다. 육당 최남선의《금강예찬》에서는 “묘길상은 … 비로자나불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묘길상은 우리나라의 비로자나불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석등, 내금강을 밝힌 등대
묘길상 석등은 내금강의 밤을 헤아릴 수 없이 비추던 등대였다. 거대한 마애불과 1/3로 비례하여 만든 석등이다. 수류화개골의 공양 등불이 켜진 모습을 상상만 해도 최고의 압권이다. 여린 산짐승을 비롯한 곰이나 범조차도 무서울 법한 깊은 골짜기의 칠흑 같은 밤을 비추고, 멀리서나마 볼 수밖에 없던 등불의 시각적 온기는 삼라만상이 가지는 두려움의 안식처였다.    
 
개성 고려박물관 뜰에 자리한 개국사 석등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묘길상 석등은 마애불 앞에 있는데, 국보 문화유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대에 해제됐다. 고려시대 말기에 세워진 석등은 간결하고 검소하게 만들어졌는데 일명 ‘자명등(自明嶝)’이라 했다. 내무재령 또는 안문재 고갯마루를 넘을 때 등대와 같은 등불이라 하고, 또 스스로 밝히는 고갯길 등이란 의미로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 석등의 모습을 갖춘 석등은 총 높이 3.7m이다. 맨 밑에 넓적한 받침돌 위에 3단으로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굵은 기둥의 중간돌인 간석을 올려놓았다. 그 위에 다시 세 귀는 둥글고 귀 한쪽만이 모가 진 길이 63cm 되는 작은 기둥 네 개를 세워 사방이 트인 불집석을 돌려놓은 다음 그 위에 사각집 모양의 지붕돌을 올렸으며, 꼭대기 가운데에는 동그란 돌을 다듬어 3개로 포개어 놓았다. 지금 석등의 받침돌은 금이 생겨서 두 개의 철삿줄로 묶어놓아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각 석등에 등불을 켜는데 사용한 통돌계단은 구한말 율봉대사가 3단으로 깎아 놓은 배례석이다.
 
우리나라 석등의 백미로 꼽히는 석등은 화대석과 지붕석이 큰 것이 특징인데,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소박하게 처리하여 묘길상과 잘 어울리도록 세웠다.
 
묘길상에 공양 올린 암자
흔히 왕릉, 문묘에 있는 전사청이나 수복청과 같은 암자가 있었다. 마애불의 오른쪽에 옛 절터가 남아 있는데 중향성의 산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 옆에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마애불 오른쪽 아래쪽 하단 바위에는 유관을 쓴 차림의 사람이 공양을 올리는 모습도 새겨져 있다.
 
고려 말기에 건립된 석등은 내무재령 고갯마루의 앞쪽과 뒤쪽에 있다고 하여 ‘자명등’이라 불렀고, 이곳을 자명암 터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의 이민구는《동주집》에서 “묘길상은 명찰인데 너무 심하게 무너져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의 암자는 14세기에 건립, 17세기쯤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절벽이 끝난 동쪽에는 미륵대란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고,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큰 반석인 이허대(李許臺)가 있다. 그 옆에 묘길상암의 옛터가 자리하고 서너 개의 주춧돌과 섬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북한에서 출판된《우리나라 역사유적》에는 “묘길상 앞에는 돌로 쌓은 축대가 있는데, 옛날 여기에 묘길상 암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실재 묘길상암은 서쪽의 뒤편 평지에 있었다. 지금은 폐사되었고, 암자의 이름도 마애불의 명칭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고 했다. 그 당시 윤사국은 마애불에 공양 올리고 가꾸던 암자가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묘길상이라 표현했고, 세상 사람들은 이 불상의 이름인 줄로 알고서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묘길상으로 불러온 것이라 하지만 잘못된 문패 이기는 분명하다.
 
천상화원으로 가는 길
묘길상에서 1㎞를 더 오르면 사선교 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금사다리, 은사다리 너머 비로봉 정상이고, 오른쪽 산등성이는 외금강 유점사로 넘어가는 내무재령이다. 옛사람들의 기행문마다 등장하는 안문점ㆍ안무재로 불리는 이 고개 너머로 내ㆍ외금강을 넘나들었다.
 
1894년, 이 고갯마루에 오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안문재의 탁 트인 풀밭으로 이뤄진 정상에 이르게 된다. 그 장관이란 아름다움의 여신이 처음으로 얼굴을 붉히고 태어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뭇 야생화가 가득한 천상의 화원이었다. 안문점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인데, 불교에서 ‘부처(雁王)의 법문’이란 뜻으로 불문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유점사의 서쪽을 내산, 동쪽을 외산이라 일컬었다. 예로부터 내·외산에는 뱀과 호랑이가 없어 밤에 다니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
6면-묘길상 석등 글씨 00.jpg
내금강 묘길상 마애불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