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1-강원도 신계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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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만든 불국토
 
외금강 신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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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1,638m의 비로봉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길게 뻗었다. 북쪽으로 옥녀봉・상등봉・온정령・오봉산이 이어지고, 남쪽으로 월출봉・일출봉・내무재령・차일봉・외무재령이 이어지는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 중심부에 자리한다. 외금강은 주능선이 동쪽으로 동해안의 해금강과 잇닿아 있는 지역이다. 수많은 계곡과 가파른 준봉들이 웅장하고 모양새가 기운차고 당당한 남성적인 외금강에는 만물상과 구룡연 구역이 대표적이다. 반면 부드러운 산세로 여성적인 서쪽 지역을 내금강이라 부르며 만천・만폭・백운대 구역 등이 대표적인 경승지다.
 
외금강 지역에는 신계사를 비롯하여 발연사・보광암・미륵암・문수암・상운암・보운암・송림사 등 여러 암자가 자리했으나 6.25 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고 신계사만이 다시 복원됐다. 신계사는 신라 때에 세워진 절이다.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고, 헤어진 지 반세기 만에 남북한 불교가 합심하여 다시 절을 짓고 불심을 일으켰다.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이 시작되고, 2003년부터 신계사의 복원사업은 1,500년 전에 “두루 불법을 펼친다”는 신라의 보운대사의 이름처럼 그 염원을 담아 전쟁으로 사라졌던 대가람 위에 2007년 10월까지 이뤄졌다. “백성을 춤추게 해야 한다”는 세종대왕의 말처럼, 외금강 신계사는 남북의 불교가 하나 되는 화합의 무대이자 남북 교류의 통로였다.
 
신라 김유신의 원찰
국보유적 제95호 신계사는 유점사ㆍ장안사ㆍ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고찰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 자리한 신계사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세존봉을 진산으로 좌측에 문필봉, 앞쪽에 관음연봉과 집선봉, 채하봉 등 외금강의 봉우리가 둘러싼 금강도량이다.
 
남경 지환스님이 1825년에 지은《금강산신계사사적》과 1942년에 간행된《유점사본말사지》에서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년(519년)에 보운(普雲)조사가 창건하였다.” 고구려의 영토이던 금강산에 신계사의 창건은 보운화상이 절터를 처음 개산한 성격이 짙다. 창건연기에서나 전법사의 비적은 당연할지 모른다. 보운화상이 “계곡 한하계에 물고기 떼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라고 생각하고, 주문으로 방편을 써서 물고기 떼를 바다로 몰아냈다”고 하여 신계사(神溪寺)라 불렀다. 그 후에 신라의 국운 번창을 의미로 사명을 바뀌었고, 또 신계사(新戒寺)라 했다. 그로부터 신계천에는 동해안의 연어가 올라오지 않는 신기한 계곡으로 알려졌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은 643년 신계사에서 왕실을 위한 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시주해서 중창하고 원찰로 삼았다. 679년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 등 전각을 모두 중건하면서 외금강의 대사찰이 됐다. 682년에는 김유신 부인 지소가 시주하여 중수했다. 786년 태능대사가 중건하고, 886년과 918년에 걸쳐 신라의 한림랑(翰林郞)들이 중수와 보수를 했다.
 
역대 고승들의 발자취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던 법인국사 탄문대사가 968년 신계사를 중수했다. 서경 천도론을 주창한 묘청대사가 1130년에 다시 중창했다. 1332년에 우심대사가 중수했다. 1352년 고려왕실에서 시주했던 신계사 ‘오동향로’는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70년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높이 12.2cm의 향로이다.
 
조선시대에는 1452년 해파대사가 중건한 다음에, 1485년에 지료대사가 중건했다. 남효온이 1485년 4월에 쓴《유금강산기》에는 “신계사는 곧 신라의 구왕이 창건한 것으로, 승려 지료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었다”고 했다. 설잠 김시습은《유관동록》에서 “사람의 마음과 눈을 씻겨주니 유쾌한 오늘의 회포는 도무지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심정을 피력하며 “오대산 푸르러 일만겹이요. 금강산 희디희여 일천층이다”고 했다. 또 그는 1457년 봄 금강산을 유람하며 신계사의 지료, 발연암의 축명, 표훈사의 지희, 장안사의 조징, 유점사의 석명 등 고승들과도 교우했다.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계사(新溪寺)라 적었다. 사찰 앞의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살생으로 성역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대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이곳의 물고기를 다른 곳에 가서 살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신(神)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산과 사명대사는 승병을 신계사에 주둔시켰으며, 1597년에는 강원감사 황근중이 불타버린 절을 다시 중건했다. 나운ㆍ대은ㆍ대응스님 등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1835년에는 조정으로부터 모연금을 받아 절 전체를 중수하는 등 왕실의 원찰로 주목받았다. 1887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산전을 옮겨지었으며, 1893년 칠성각을 중수했다.
 
구한말 ‘봉오동전투’의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1890년부터 2년간 신계사에 머물면서 지담대사로부터 글을 배우고, 역사 인식과 항일정신을 수련했다. 1900년대에는 고승 경허선사가 금강산을 찾아와《금강산유산가》를 남겼다. “신계사의 문을 두드리니 외금강이 절경이다. 집선봉에 가던 구름 바람조차 흩어지고, 문필봉의 묘한 형용 석가세존을 닮아구나. 보광보운 두 암자는 염불간경 알맞은 절이다”고 했다. 방한암 스님은 1899년 신계사 보운강당에서《수심결》등 경학을 닦았다. 효봉스님은 1925년 신계사의 석두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1922년 12월 용화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고, 1929년에는 만세루 등 11개의 전각을 중건했으며, 그해 신도 유경화는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50년까지 대웅보전·나한전·칠성각 등의 전각들과 대웅전 앞에 석탑 1기와 공덕비가 남아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한 쌍의 보리수는 1947년 9월 말경에 옮겨 심은 나무다.
 
일제강점기에는 유점사의 말사에 속했으며, 1949년에 설치된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는데 신계사특수박물관이라 불렀다. 전쟁 기간이던 1951년 6월 24일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전소됐다. 그 후 2007년 10월 14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공조사업으로 추진되어 대웅보전과 만세루, 종각, 최승전 등 11개 건물이 낙성됐다. 2008년부터 주지를 맡은 진각스님과 2~3명의 부전스님이 머물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 
신계사 3층 석탑은 신라 말기에 세워졌다. 장연사 터 삼층석탑과 정양사 삼층석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탑으로 불렀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인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는 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렸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8구의 비천상, 상층기단 면석에는 8구의 수호신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간단한 문장식이 새겨져 있다. 옛 사진에는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으나, 모두 없어졌다가 1층 지붕돌을 새것으로 바꾸어 2007년 10월에 복원됐다.
 
신계사에서 오선암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더 가게 되면, 마애불이 자리하는 곳이 나온다. 뒤편으로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마애불은 높이 2m로 삼각형 모양의 바위 앞면에 새겼다.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광배 테두리와 연화대에 앉은 석가모니 불상이다. 옆 바위에는 훈민정음의 글자를 음각으로 새겼는데, 1929년 신계사 중건에 동참한 신도의 이름과 단체명을 같이 새겨 이채롭다. 또 세존봉으로 가는 길목에는 영호대사와 영월당 등 부도 3기와 비석 2개가 남아 있다.
 
창터 솔밭과 송이버섯
신계사 앞자락의 ‘창터 솔밭’은 천연기념물 제416호이다. 외금강 창(創) 터에 있는 소나무 군락, 숲을 이룬 솔밭이다. 이 소나무들은 별칭 금강송(金剛松) 유래의 모델이며 장소였다. 일본인 산림학자 우에키 호미키가 1928년에 발표한 <조선산 소나무의 수상 및 개량에 관한 조림학적 고찰> 논문에서부터 비롯됐다.
 
이 논문에서는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소나무를 6개 지역형으로 나누었는데, 금강형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의 줄기가 곧고 아래쪽 가지 없이 상부에만 가지들이 좁은 폭으로 자라는 소나무로 분류했다. 금강송이란 명칭은 일본인 학자의 논문에 나오는 ‘금강형’에서 유래됐다. 금강송보다 미인송이라 부르는 것이 고유한 별칭이다.
 
절 입구에서 신계천 기슭에 펼쳐진 창터 솔밭은 예로부터 구룡연의 사시사철 수려한 풍치를 자랑하던 명승지였다. 이 같은 지명유래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솔밭에 창과 활, 식량을 보관해 두었던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창터 또는 창터 솔밭이라 불렀고, 6.25 전쟁 전까지도 창대리 마을이 있었다. 이 솔밭에는 가을에 나는 송이를 최고 진미로 꼽았다. 창터 솔밭은 1940년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소나무에다 생채기를 내서 송진을 뽑아 가면서 많은 소나무가 잘리고 훼손됐다. 6.25 전쟁 때에도 폭격과 총사격으로 소나무에 총알이 박혀 있는 상처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7세기 중엽부터《화엄경》에 등장하는 금강산이 “동해바다의 가운데에 있다”는 전설처럼 신계사는 동해의 비원을 품은 절, 신라의 통일 염원이 서린 절이다. 519년 신라의 승려 보운조사가 창건한 신계사는 34차례에 걸쳐 중건과 보수를 거듭했다. 전쟁 전까지 있었던 옛 건물은 1597년에 세운 것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를 통하는 남북 중심축으로 3층 석탑과 동쪽에는 칠성각・대향각・극락전, 서쪽에는 나한전(영산전)・어실각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됐다. 주로 강학 공간으로 사용된 만세루 구역에는 동쪽에 향로전과 부속건물, 서쪽에는 최승전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었다. 이 가람은 누구나 신계사에 가면 모두 볼 수 있고, 한 번쯤 걸터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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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사 1922년대 전경(사진제공 박해진)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