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2-강원도 신계사(中)

밀교신문   
입력 : 2019-10-04 
+ -

세존봉 신계사

20190816092343_57859b2722f6762781e7fa5b4e9a7a35_cns2.png

 
외금강산 구역은 북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고, 1998년 11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측 주민들에게 개방된 관광지다. 북측이 2002년 10월 23일 금강산 일대를 국제적인 관광지역으로 규정하는 정령을 발표한 뒤, 같은 해 11월 25일 ‘금강산관광지구법’이 명문화됐다. 현대아산은 2052년까지 50년간 이용할 수 있는 금강산관광특구의 토지 이용권을 통해 관광을 진행하다가 2008년 7월 11일 남측관광객 박씨의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됐다.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의 남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의 전원 추방으로 중단됐다.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하고, 2011년 11월 4일 중국을 통한 금강산 국제관광이 시작, 중단됐다가 2019년 7월 15일부터 다시 개시됐다.
 
금강산관광은 그곳의 탄생과 역사에 얽혀 있는 스토리가 품격을 좌우한다. 오늘날, 북측 안내원들이 소개하는 곳곳마다 신화와 전설이 묻어난다. 2010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동해안 탐방로인 ‘해파랑길’ 역시도 천 년 전 보운조사와 김유신 등이 걸어갔던 길이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하여 동해의 해안도로를 따라 북측 강원도 고성까지 770km의 구간이다.
 
해파랑길은 고성에서 지금 멈춰 있지만, 한반도 등줄기의 가운데 자리에 해당하는 외금강, 해금강 지역으로부터 다시 청진과 나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통일의 함성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 통일의 역사는 이미 신계사로부터 출발했고, 다시 우리가 이어갈 수도 있다.
 
통일의 꿈과 성지, 신계사
519년에 창건된 외금강 신계사는 신라의 김유신이 천 년 전, 삼국통일을 염원했던 성지였다. 오악사상에 바탕을 둔 김유신은 643년 봄 신계사에서 발원 기도를 시작한 이후, 676년 11월 반도통일을 이룸으로써 실현됐다. 그로부터 신계사는 679년 신라왕실의 지원으로 대사찰이 됐다.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신계사는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불타기
 
전까지 5전 4각 1루의 10여 채 건물이 있었다. 1838년 전홍관의《금벽록》에는 “신계사는 또 신계(神鷄)로도 썼는데, 이 절의 한 승려가 새벽마다 목욕재계하고 불공을 올려 그 정성에 감동한 부처님이 새벽마다 사찰 남쪽 돌벽에서 닭울음 소리를 내 시간을 알려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고 했을 만큼 수행도량으로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러한 전통은 1924년 일본인에 의해 찍힌 한 장의 사진에 신계사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신계사 대중방에서 10여 명의 스님이 금강산 탐승에 나선 일본인들과 함께 엄격한 채식단으로 점심 공양을 하는 장면이다.
 
해방 이후, 신계사는 1949년에 외금강박물관 또는 금강산특수박물관 이름으로 지정되면서 전통사찰의 기능을 잃었고, 전쟁 때 건물과 문화재가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1970년대 발굴된 터의 신계사는 1998년 3월 14일 중국 북경에서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가 체결되고, 남측 평불협의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와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복원사업을 계획했다. 2004년 1월에는 조계종단과 현대그룹, 또 3월에는 당시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실행합의서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복원사업 4년에 걸친 복원불사는 2007년 10월 14일 신계사 낙성식으로 완료됐다. 남측에서 목재와 예산을 투입한 신계사 복원과정에는 남측의 고건축 설계, 도편수, 기와공, 석탑복원 등 전문가와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문화보존지도총국 관할의 발굴대, 단청, 설계 등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남북 공조사업의 대명사가 됐다.
 
신계사 품속의 암자들
세존봉을 진산으로 하는 신계사 앞에는 신계천이 흐르고, 동쪽에는 문필봉이 자리하여 외금강의 절경을 앞뒤 양옆으로 끼고 있다. 주변 인근에는 540년 보운조사가 세운 상운암과 화장암, 미륵암, 문수암, 대승암, 삼성암 그리고 1884년 보흠대사가 세운 법기암 등 여러 암자가 자리했었으나 전쟁 때 모두 소실됐다.
 
신계사 서편 골짜기에 두 암자가 있는데, 보운암(普雲庵)은 518년 보운조사가 창건했다. 1485년 남효온은《유금강산기》에서 “내가 지공천을 건너 보문암에 가니, 암자 앞에는 나옹 자조탑(自照塔)이 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태고사사법》에는 신계사 암자라 기록했다. 1878 영하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04년 5월 화재를 입었고 1907년에 설호대사가 다시 중건했다. 그 후 1951년 6월 전쟁 때 전소되어 터만이 남아 있다. 근대에는 1925년 효봉스님이 보운암의 석두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보광암(普光庵)은 터로 남아 있다. 899년 포함선사가 낙가암을 창건한 후에 보광암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신계사의 별전으로 화엄각이라는 건물이 있어 전국 승려들의 수도처로 널리 알려졌고, 근세의 대응당이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특히 대중 법문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나서 어느 때는 3,000명 신도를 한꺼번에 귀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춘원 이광수는 1921년 보광암에서《법화경》을 공부했다. 진산인 관음봉 아래 중턱에는 노승이 바랑을 메고 들어오는 모습과 같은 입석이 서 있는데, 이를 노장(老丈) 바위라고 한다.
 
송림암(松林庵)은 내금강 태상골의 내원통암과 반대되는 외원통암이 자리했고, 이어서 송림암 터가 있다. 1172년에 창건된 송림사는 그 후 폐사되었고, 17세기에는 이 터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의 송림굴과 함께 송림사가 있었다. 송림굴은 자연 바위굴로 옛날 인공적으로 막고 여러 개의 단을 쌓아 관음보살, 16나한 등의 불보살을 모신 곳이다. 이 굴 옆에는 높이가 4m가량 되는 삼각형 바위에 굴이 있는데 이 굴과 잇대어 송림암이 자리하였다. 송림굴에는 맛이 좋은 약수가 유명하고, 오른쪽 큰 바위에 제일송림천석(第一松林千石)이란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발연사, 진표율사의 계림
미륵봉의 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발연사(鉢淵寺)는《유점사본말사지》에서 통일신라 때의 고승 진표율사가 770년에 창건한 절로서, 계율의 숲(戒林)이라 일컫는다. 발연사는 766년 가을에 진표율사가 발연동 계곡으로 들어오자 “발연소에 살던 용왕이 절터를 잡아주었다”고 하여 붙여진 사명이다. 
 
《삼국유사》<진표전간(傳簡)>에 전하고 있는 발연사에는 1199년 개산조 진표율사의 사적비가 세워졌다. 발연사 주지 형잠대사가 지은《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서는 “율사가 세상을 떠날 때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열반에 드니 제자들이 그 법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자 흙으로 덮어 묻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바로 나더니 세월이 오래되자. 말라 죽었다.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뿌리는 하나이더니 지금은 나무가 쌍으로 서 있다. … 나는 율사의 뼈가 완전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년(1197년) 9월 특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았는데 3홉이나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쌍으로 난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모셨다”고 했다. 1199년 5월 비석을 세웠다.
 
또《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진표율사가 아버지와 함께 풍악에 들어가서 발연사(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여는 등 7년 동안 살았는데, 흉년 든 명주지방 사람들이 율사를 공경하자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바다에서 나와 이것을 팔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는 진표율사의 일화를 적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전해졌고, 발연사는 물고기 방생법회의 최고 명소로 알려졌다.
 
발연사 터에 남은 진표율사의 사리탑비에 대해 1485년 남효온의《유금강산기》에는 “율사의 유골을 간직한 비석으로, 고려의 승려 형잠이 지은 것이고 건립 시기는 기미년 5월이다. 비석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율사의 비석이 건립된 때부터 500여 년 사이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하다가 지금 다시 말랐다”고 했으며, 김시습의《유관동록》에도 1457년 봄, 발연암의 축명(竺明)과 교우했고, 봉래 양사언의《발연사사적기》에도 발연사가 기록됐다. 1657년 발연사에 화재가 나서 2년 후에 승찬대사가 중건했으나 1800년경 화재로 전소된 후에, 만행승 북명대사가 다시 중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발연사 터는 발연소(鉢淵沼)의 서쪽 발연산 남쪽 기슭에 있다. 발연동 입구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너럭바위 한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여서 바리때(鉢盂)처럼 생긴 둥근 소(沼)가 있는데, 그 유명한 바리소이다. 이곳 위쪽과 아래쪽에는 상발연 또는 웃소, 하발연 또는 아래소는 폭포로 서로 연결됐다. 못 기슭의 너럭바위에는 양사언의 필적인 ‘봉래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터의 동쪽에는 약 4m의 삼각형처럼 생긴 바위에 발연(鉢淵)이라는 글자를 새겨져 놓아 ‘발연암’이라 부른다. 진표율사가 발연 바위 위에서 원적에 들었다고 한다. 절터의 서남쪽에 옛 돌탑이 무너진 상태로 석조물들이 산재해 있고, 서북쪽의 작은 산등성이를 쥐산이라 부른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
발연소를 지나면 무지개처럼 생긴 홍예교(虹霓橋)가 있다. 국보유물 제106호로 지정된 발연사 무지개다리는 한반도 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교이다. 조선문화보존사가 발행한《문화유산》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것이라 했다.
 
사라진 장안사 비홍교보다 491년이 앞선 1199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연사 홍예교는 외금강 집선봉의 동남쪽 사이에 자리하는 발연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무지개다리다. 소나무 숲과 신계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돌다리는 외금강의 비경으로 안경테 모양이어서 ‘발연사 삼도안경교(三道眼鏡橋)’라 불린다. 1톤이 됨직한 다듬은 화강석 40여 개를 26단으로 맞물려 쌓았는데, 다리의 화강석 7개가 절반씩 부러졌으나 수십 명이 올라앉아도 끄떡하지 않는다.
 
해파랑길을 따라 금강산관광이 다시 열리는 날, 신계사로 가는 길에 장안사의 비홍교와 버금가는 발연사의 마지막 남은 유적인 아름다운 홍예교를 찾아보세.
6면-발연사홍예교_금강산 1998년 예맥출판사간.jpg
발연사 터의 무지개다리 (사진출처: 금강산, 예맥출판사 1998년)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