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13-강원도 신계사 (下)

밀교신문   
입력 :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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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용궁을 잇다-미륵불과 해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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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금강 신계사 계곡을 따라 바다 해룡들이 외금강 구룡연과 해금강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징표는 동해에서 구룡연까지 40리 구간으로 이어진 용오름길, 폭 20~30cm의 까만색 용띠를 통해 전한다. 구룡연 아래쪽 계곡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용띠는 용이 지나간 자국처럼, 계곡과 물속에 용과 뱀처럼 구불구불 기다랗게 이어진 검은색 바윗줄이다. 주변의 하얀 바위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지만, 물보라가 칠 때 시야를 흐려 잘 볼 수가 없다. 산속의 수행자들이 “신심이 깊은 불자, 마음이 청정한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말할 정도다. 이와 비슷한 곳은 강원도 동해시의 두타산 용추폭포와 삼화사 무릉계곡에 나 있는 용띠, 용오름길과도 아주 흡사하다. 
 
신계사 앞을 흐르는 신계천은 북쪽으로 역류하지만, 용이 비천하는 외금강의 구룡연, 금강의 아버지인 만물초, 신선들이 살았던 삼일포, 금강산을 잉태한 해금강을 잇는 탯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생명의 신진대사를 일으키는 강으로써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대자연이다. 
 
조선 후기의 여암 신경준은《산경표》에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놓은 산계문화는 산과 강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습이 신계와 삼일포, 해금강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룡연, 용이 승천하는 곳
천연기념물 제225호 구룡연(九龍淵)은 계곡의 담, 소와 같은 못인데 외금강의 폭포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한반도의 3대 폭포라 불린다. 약 150m 절벽에 폭포 높이는 74m, 너비 4m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아래 바윗돌은 오랜 세월 동안 패이고 패여서 13m 깊이의 절구통 같은 둥근 못을 이루었다. 폭포수를 받는 아래쪽 연못이 ‘구룡연’인데, 구룡폭포의 명칭도 이 못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 전설에는 “서기 4년경, 유점사에서 동해의 아홉 마리용이 53불(佛)과 싸우다가 패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량이 많을 때 떨어지는 구룡폭포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포음, 자욱한 물안개, 아름다운 무지개와 어우러지는 장쾌한 모양은 말과 글로 형언할 수 없다. 봉래 양사언이 내금강 금강대 아래 바위에다 ‘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쓴 암각자 중에서 원(元)자가 용이 승천하듯, 영혼이 춤추며 날리는 듯한 모양이라면 외금강 구룡연은 그야말로 용이 비천(飛天)하는 모습이다. 중생대 시기에 만들어진 구룡연에 가득히 불어난 폭포수가 역류하는 하얀 물기둥을 보면 마치 용들이 하늘로 날아오는 착각이 든다. 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보라가 솟아오르는 날이면 마치 봉황이 흰 깃을 펼치며 하늘로 비상하는 듯하다고 여긴다.
 
금강산의 첫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신라 최치원의 구룡연 시는 “천길 흰 비단 드리운 듯하고, 만 섬 진주알 쏟아지는 듯하여라”며 읊었다고 전하지만, 1864년에 조벽현이 폭포 아래 너럭바위에 써서 새기고, 다시 그 옆에다 “성난 폭포 한가운데로 쏟아지니,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구나”는 우암 송시열의 시를 함께 새겼다고 전한다. 1404년 9월 재상 하륜이 어전에서 소동파를 소환했듯이 고운과 우암 두 사람을 같이 소환한 격이다. 폭포 아래쪽 넓은 반석에 ‘구룡연’ 세 글자도 있는데, 관폭정에 온 사람들이 ‘글씨들이 어디에 있는가?’ 문의할 때면 저 아래쪽에 있다고만 말할 뿐. 물이 불어나서, 눈이 안 녹아서 너럭바위 찾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천 년 전, 최치원이 노래한 구룡연은 당나라의 이백이 지은 <망여산폭포수> 시에 “물줄기 내리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수 아닐까”라며 삼천 자가 되는 폭포는 그 모양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수를 연상시켰다. 봉래 양사언은 <구룡연> 시에서 “곤륜산에 구리기둥이 있는데 그 높이가 하늘에 닿아 이를 천주라 한다.”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구룡연은 “신물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소리가 조금만 높으면 문득 우레가 울고 비가 오는 이상한 일이 있다”고 했다. 
 
이처럼 구룡연은 여름 장맛비에 지축을 흔드는 굉음 소리와 물보라를, 가뭄에는 아침엔 금실로 오후엔 은실같은 실타래를 기다랗게 하염없는 내리는 폭포수로 외금강 봉우리와 어우러져 기기묘묘함이 더 돋보인다. 어느 날, 관폭정 높은 계단 위에 올라 우리에게 내려 준 신묘한 선물인 구룡폭포를 바라보자.
 
미륵불, 구룡연의 암각글자
구룡연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구룡폭포이지만, 여기에 화룡점정은 구룡연 우측 절벽에 새긴 ‘미륵불(彌勒佛)’ 글자다. 예서체의 세 글자를 바위에 직접 음각한 것으로 한반도에서 제일 큰 암각글자이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은 유적이다. 
 
구룡폭포 중간의 우측 바위벽에다 새긴 거대한 미륵불의 세 글자는 해강 김규진이 1919년에 쓴 것으로, 당시 일본인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그라인더 공법으로 음각했다. 미륵불 아래 왼쪽에는 낙관과 시주, 화주, 감독의 이름이 나열됐고, 끝부분에는 석공의 이름도 새겼다.
 
이 암각자는 내금강 소향로봉 아래 계곡의 벼랑 위에다 새긴 세 가지 석각 글자보다 훨씬 더 크다. 세 글자를 합친 총길이는 19.4m이고 글씨 폭이 3.6m이다. 특히, 마지막 불(佛)자의 길게 내린 한 획은 길이가 13m로 구룡연 웅덩이의 물속 깊이와 같다. 당시 미륵불 각화불사는 1919년 그해 여름, 미륵불 큰 글자(大字)에 항의하던 사람들조차 회향식에 떡과 국수를 해와서 함께 축하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춘원은 ‘금강산유기’에서 “구역질이 날뿐더러 이토록 아까운 대자연의 경치가 파괴된 것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해강 김규진은 실로 금강산에 대하여 대죄를 범한 자라 하겠다”고 혹평을 더 한 바 있다. 지금까지 이 글자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그 시절 언론에 수록된 금강산 탐방기에는 이 사람 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꼴불견의 하나라고 묘사됐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돌 기념으로 건립된 에펠 탑도 당시에 모파상과 같은 예술․지식인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1889년 9월 10일 철탑을 방문한 에디슨은 방명록에 “현대 공학의 거대한 기념비적 표본을 만든 용감한 기술자인 석사 에펠에게 가장 위대한 기술자인 ‘선한 신’을 포함한 모든 기술자를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하고 찬양하는 한 사람으로부터”라는 글을 남겼다.
 
상팔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  
금강산 비로봉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구룡대 계곡에는 크고 작은 연못들이 푸른 구슬을 꿰놓은 듯 층층으로 연달아 있다. 그중에 큰 것 8개를 ‘팔담’이라 하고 위쪽에 있으므로 ‘상팔담’이라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219호 상팔담(上八潭)의 물은 구룡폭포로 이어지는데 왼쪽 끝부분이 구룡연의 맨 위쪽이다. 그 물줄기는 74m의 장대한 구룡폭포로 변하는데,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하늘에 올라가는 사다리인 승사하를 연상시킨다. 또 그 물은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든다.
 
구룡연을 찾은 이들에게는 폭포 저 위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 옛날 나무꾼이 그랬듯이 거의 수직인 안전사다리 14개를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구룡대에 오르면 산짐승조차 미끄러져 소에 풍덩 빠질 정도로 아찔한 절벽 사이에 에메랄드빛 물이 굽이쳐 흐른 것을 볼 수 있다. 골짜기에 구름과 안개가 펼쳐질 때면 천상계에 올라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곳 경치가 너무 좋고 물이 맑아 선녀들이 하늘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하고 올라갔다는 ‘금강산 팔선녀’의 전설이 전한다. 18세기 후반, 민간에서 만들어진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는 사실, 신계사 앞의 미인송을 양옆에 끼고 흐르는 한하계곡의 문주담이 최초 발상지이다. 만물상 가는 길에 있는 문주담이 수차례 큰물로 메워지고 구룡대에서 본 상팔담의 경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언젠가 장소가 바뀌고 말았다.
 
외금강의 팔색꽃, 상팔담의 ‘나무꾼과 선녀’ 전설은 금강산뿐 아니라 묘향산ㆍ칠보산ㆍ대동강 등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는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다. 약간씩 각색이 되었으나 모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만물초, 금강산의 아버지
천연기념물 224호 만물상(萬物相)은 “이 세상에 있는 만 가지 물체가 저기 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 10대 아름다움(美) 중에 수림미를 대표하는 곳으로 본래 명칭은 ‘만물초’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만든 각종 인쇄물과 기록에 의해 이름이 뒤바뀐 것인데, 우리 조상들은 “신이 천지 창조할 때 시범 삼아 초(草) 잡았다”는 의미에서 만물초(萬物草, 萬物肖)라 적고 불렀다.
 
삼일포와 해금강의 유래
천연기념물 제218호 삼일포(三日浦)는 신계사에서 흐르는 신계천이 북쪽으로 흐르다가 36개 봉우리에 가로막혀 물길을 틀며 만들어진 둘레 8km, 깊이 9∼13m의 민물 호수이다. 신라의 영랑ㆍ술랑ㆍ안상랑ㆍ남석행 네 신선이 이곳에 들렀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3일 동안을 머물렀기에 삼일포라 했다. 그때 사선들은 삼일포의 야생차를 따서 먹고 지냈다고 전한다. 그 후 삼일포의 전설은 15세기 봉래 양사언에 의해 탄생했다.
 
천연기념물 제229호 해금강(海金剛)은 고성군수였던 남택하가 1696년에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고자 했던 곳이 해동국의 해금강 금란굴의 전설이다. 이 굴에 붉은빛이 발하면 “굴이 핀다”며 풍년이 든다고 믿었고, 지금도 입구 천장의 바위틈에서 하늘에 뿌리를 둔 채로 아래로 드리운 채 싱싱하게 자라는 30cm 정도의 불로초는 소금기에도 죽지 않고 추위와 더위도 잘 견디기 때문에 풀 포기가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하다고 전해진다.
 
수호의 화신 여덟 금강신이 아름다운 산 7개를 바닷속에 넣고, 한 개의 금강산만 육지에 놓은 것이라는 것과 7개 바닷속의 금강산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할 때 육지로 나온다는 전설을 믿고 기원해 보자.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