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4-강원도 석왕사(上)

밀교신문   
입력 : 2019-11-11  | 수정 :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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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꿈을 이루다-설봉산 석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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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탄생은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손에 쥐고 있는 단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지만 언제나 홀로 외로운 일생을 살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첫걸음이 강원도 석왕사에서 시작됐다.
 
왕은 하늘의 명을 받는 초월적 존재로서 그 자체가 상징이었다. 왕의 신성한 지위와 존엄을 위해 여러 가지 상징적 요소를 만들어 냈다. 왕을 권위를 세우기 위한 작업은 먼저 설봉산 석왕사에서 탄생했다. 이른바 불전(佛傳)에 의한 형태로 널리 유포되거나 문학 작품화되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세기 중엽에 서산대사가 지은《설봉산석왕사기》이다. 여기에는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설봉산(雪峯山)의 토굴에 있던 무학을 찾아가 물었다. 꿈에 허물어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습니다. 또 꿈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무학이 태조에게 축하하고 대답했다. 그것은 모두 장차 군왕이 될 꿈입니다. 보통 꿈이 아닙니다. 서까래 3개를 진 것은 바로 왕(王)자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어지니 어찌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꽃과 거울도 또한 족히 왕이 될 꿈입니다”며 찬탄과 신통에 관한 해몽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의 혼란한 정국에서 이성계는 적들이 무질서에 빠지도록 기다리는 동안 왕좌를 위해 예언적 기술을 총동원하며 공간보다는 시간을 더 넓혔다. 무학대사로부터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꿈을 해몽을 받아 대망의 길로 들어갔다. 1384년 세기의 담화가 진행된 그 사변의 장소에 이를 기념하여 새로운 절 석왕사가 8년 후, 대규모로 세워졌다.
 
왕의 탄생을 예언하다
역사적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이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등장한다. 위화도 회군한 이성계는 1392년 6월 개경 수창궁에서 새 왕조를 개국하고 1393년 2월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선포하고, 1394년 1월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다.
 
왕이 된 이성계는 즉위하기 8년 전, 1384년에 무학대사가 머물던 설봉산의 암자를 찾아가서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무학대사가 ‘공에게는 군왕의 상이 있으니 공은 일상의 일을 신중히 하고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이로써 한 절을 짓고 석왕사라 한다면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또 대사를 속히 이루려 함은 잘못입니다. 3년을 기약하고 오백성재를 설하고 몰래 기도한다면 반드시 성승이 왕업을 도울 것입니다’고 하니 태조가 그 말을 따라 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1918년 이능화가 지은《조선불교통사》상권에, 숙종 때의 남구만이 쓴《약천집》그리고 광해군 때의 이수광이 지은《지봉유설》에도 서산대사의《설봉산석왕사기》를 인용하여 전했다.
 
이성계는 설봉산에 기원소를 정하고, 절을 짓기 전에도 “1377년 여름에 왕명을 받아서 함남 북청에 들와 머무를 적에 함경도 길주에 위치한 광적사에서 “전쟁 후 승려는 사라지고 절이 훼손되어 사찰 보물들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중랑장 김남련을 절로 보내 대장경 한 질과 불상, 법기 등을 배에 싣고 오게 하였으며, 없어진 약간의 함(函)을 보충하여 대장경 전질을 만들어서 안변부 설봉산 석왕사에 옮기고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행복을 영원히 기원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후 이러한 사실을 목판에 새기도록 하여 석왕사에 보존토록 했으며, 1708년에 세워진 <석왕사사적비>에도 이런 사실을 새겼다. 18세기 말《약천집》에 실린 기문과 정조 시기에 세워진 <석왕사장경비>의 비문도 이와 같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설봉산 석왕사는 1377년 가을 이전에 함북 길주 광적사와 같은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서까래의 꿈’을 풀어준 무학대사의 암자에다 1386년 응진전과 요사 등을 처음 세우고, 1392년 7월 28일 즉위 후에 석왕사라는 절의 액호(額號)를 지어 보내는 등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ㆍ대장전ㆍ인지료ㆍ용비루ㆍ호지문 등 53채 건물이 1394년까지 건립됐다.《양촌집》에는 권근이 찬술한 <복장발원문>에서도 “안변 석왕사는 예로부터 진병을 비보하는 곳이라 했고,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원찰로 삼고 새로 중수했다.”고 한다. 그 후 석왕사는 19명의 왕이 직접 다녀갔을 만큼 국가 지정사찰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1481년 편찬된《동국여지승람》에는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여지도서》에서는 “부의 서쪽 4리 설봉산에 있으며 태조가 잠저할 시에 신승인 무학이 ‘석왕의 꿈’을 꾸어 석왕사라고 하였다.” 1790년 정조가 직접 짓고 써서 세운《안변설봉산석왕사비》에도 기록됐다. 후대의 왕들도 석왕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했다.
 
오백나한 북녘의 절
 
국보유적 제94호 석왕사는 응진전 나한상이 1929년에 찍힌 사진에도 등장한다. 1386년 건립돼 565년간 유지되었던 응진전은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나한상도 사라졌다. 응진전은 대한민국 국보 제14호 영천 거조암 영산전과 함께 오백 나한상을 모신 절로 유명했다. 두 사찰은 나한상을 모신 것이 같지만, 역사는 좀 다르다. 석조 나한 526분을 봉안한 거조암과 달리 석왕사 응진전에는 나한상 499분을 모셨다. 거조암 나한상은 1375년 영산전을 지으면서 조성했다고 전해지며, 1804년 영파 성규대사가 나한의 이름(尊名)을 규명했다. 속설에는 1298년 정월, 원참대사가 낙서 도인을 만나 아미타여래의 신통력을 빌려 하룻밤에 조성했다고 전한다.
 
석왕사의 나한상은 이성계가 1386년 응진전을 건립하고 오백성재를 행하고 기원소로 삼았다가 그 후 왕명으로, 함경도 길주 광적사에서 석조 오백나한을 조성해 1398년 8월에 이운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기 등에는 1377년 여름, 함경도 길주의 광적사에서 이운해 온 나한이라 했으며, 속설에는 “광적사의 1천 나한상 중에서 5백 분을 옮겨왔다”고 한다. 또《석왕사 연기설화》와《화형암 설화》,《혈모로 설화》등 안변지역의 설화에는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함경도 길주 땅의 천불사에서 오백나한을 배로 실어와 자신의 기원소에 봉안한 것인데, 싣고 오던 배에서 나한상 1기를 실수로 바닷물에 빠뜨려 지금은 499체의 나한이 되었다.”고 이 고장의 설화에 전해진다.
 
조선 태조 때, 이미 대찰이던 석왕사는 1401년 태종 1년에 이성계가 직접 석왕사에 와서 입구에다 소나무,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이때부터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고, 좋은 배를 왕에게 바치는 성교의식이 이때부터 행해졌다. 1790년 순조가 탄생하자 석왕사에는 기원 성취를 감사하는 글과 토지가 내려졌다.
 
1821년 해원화상이 석왕사에서 간행한 <석왕사사적 후발(後跋)>에는 “강헌성조가 용잠으로 계실 때 신승 무학이 이미 길몽을 풀이하고 또 명험을 아뢰었다. 드디어 응진전을 세우고 인하여 오백성재를 베풀었으니 이른바 천진당, 진헐당과 인지료, 용비루 등이 다 한꺼번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의 기록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원찰이다. 해방 전후까지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사기리이었다가, 1946년 9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주소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로 바뀌어 강원도의 사찰이 됐다. 경성과 원산 구간의 ‘끊어진 철도’ 경원선이 지나던 곳에 있던 석왕사역은 지금, 광명역으로 바뀌었다.
 
1951년 6월 13일 전쟁 때는 1394년에 세운 조계문만 남기고 불이문, 설성동루, 용비루, 인지료, 만춘각 등이 파괴되고, 나머지 건물은 미공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 호지문은 1952년, 불이문은 1995년에 각기 복원됐고, 홍수 피해를 보았던 조계문은 2002년 11월 보수했으며, 현재는 설성동루ㆍ호지문ㆍ용비루ㆍ만춘각ㆍ인지료 그리고 2016년 복원한 대웅전 등 8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설성동루 옆에는 보존유적 제341호 부도 13기와 비석 15기가 남아 있다.
 
태조가 즉위하고 국왕의 원찰로 창건된 석왕사는 동쪽으로 난 골짜기의 넓은 지역에 남향으로 위쪽 건축군은 응진전을, 아래쪽은 대웅전을 기본 축으로 이루어진 대가람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한 곳으로 인근 귀주사와 함께 함경남도 48개의 말사를 총괄했다. 전쟁 때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고 설성동루와 조계문 등 일부만 남게 됐다.
 
석왕사로 가는 길은 송림계곡을 지나면, 일명 광명약수로 불리는 유명한 ‘석왕사 약수’ 터에 이른다. 첫 관문은 불이문이다. 1783년 개축한 조계문, 2층 설성동루가 있고, 1751년 중수한 용비루는 범종을 매달았던 누각이 자리한다.
 
어실각으로 쓰인 인지료는 북녘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각으로 1880년 중수한 건물이다. 위쪽 중심축 북쪽의 응진전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500 나한상을 모셨다. 전각 앞에는 용비루와 인지료가 가지런히 서 있다. 구한말 경허대사는 1906년 봄,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금불사의 증명법사로 참여하였으며, 만해스님의 제자 춘성스님은 1915년 석왕사의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화엄법문의 대가로 ‘화엄법사’ 또는 대강백으로 명성을 날렸다.
 
석왕사, 천봉송원의 비경
 
석왕사에는 북한 제일의 육송수림이 자리한다. 천연기념물 제207호 석왕사 소나무림(광명소나무림)은 사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흐르는 송림계류가 99곡 동천을 이루면서 광명리, 탑성리, 사기리까지 이어진 깊은 골짜기에 있다. 남향하여 자연적으로 자라는 수령 200~300년의 소나무 군락지는 ‘하늘을 이고 있는 소나무 동산’이란 뜻의 ‘천봉송원(天峯松園)’이라 부른다. 봄에는 진달래, 가을 송이가 유명하다.
 
설봉산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금강산 석왕사라 불렸다. 1934년 5월 13일《조선중앙일보》의 석왕사 관광 광고는 “우리 부인네들은 석왕사가 보고 싶으나 혼자는 가기가 어렵고 비용이 많아서 못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 늘 있는 기회가 아니니 특히 출입이 잦지 못한 부인들은 만사를 젖히고 한 번 이번 형행에 참가하시기 바랍니다”고 한 것처럼 이 같은 신문광고가 또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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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석왕사 전경 (사진: 일제강점기 엽서 사진)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