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5- 강원도 석왕사 (下)

밀교신문   
입력 :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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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봉릉사찰로 서다

석왕사와 보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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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찰은 그 연원과 상관없이 왕조의 필요에 따라 능침 또는 봉릉사찰로 지정됐다. 1725년의 <승정원일기>에는 “함경도 안변의 지릉(智陵)에 대한 ‘지사승(持寺僧)’을 두었다”라고 했다.
 
오늘날 강원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지릉은 조선의 추존왕 익조 이행리(李行里)의 능이다.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데, 개국 직후 1392년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도 세웠다. 1725년 <비변사등록>에 보면, “지릉에는 종7품의 직장 1명과 종9품의 참봉 1명을 두었는데, 그 아래에 석왕사의 승려 3명을 사환으로 두고, 그 이름을 지사승”이라고 했다.
 
그 당시 왕조의 능에 대한 규범은 봉래 양사언의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1577년 안변 부사로 부임한 봉래 양사언은 1581년 지릉의 잔디를 태운 단순한 화재가 빌미가 되어 황해도로 유배를 떠났다가, 1584년 귀양에서 풀려나 해금강 삼일포로 돌아오던 도중에 생을 마쳤다.
 
능침사찰로 지정된 사찰은 능원의 제향을 비롯한 관리의 책임까지도 부과됐다. 또 제향의 제수용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의 기능을 맡았다. 1370년 고려 공민왕 때 광암사가 처음으로 지정되었는데, 조포사의 기능이 더욱 확대된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의 개경 연경사·한양 흥천사·세조 때의 양주 봉선사가 유명했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 ‘두부’ 편에서 “모든 능원에는 승원이 있어 두부를 바치는데, 이름하여 조포사라 하였다.”
 
왕릉을 비롯한 능원의 제향 두부를 공급해 온 조포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총 51곳이 지정 운영됐다. 안변의 지릉에 대한 조포사와 봉릉사찰은 설봉산 석왕사를 중심으로 백련암·내원암·보문암·향적암 등 48개의 관내 사암에서 그 임무를 도맡았다. 현존하는 석왕사와 보문암에는 사찰관리인이 배치되어 있으나, 주지 등 조불련의 스님은 없다.
 
석왕사, 왕립사찰의 예우
태조 이성계 이후 태종 때까지 왕실 사찰이었던 석왕사는 세종 이후, 능침사찰로 성격이 바뀌었다.
 
<승정원일기>에는 1726년 5월 20일 “북로(北路)의 여러 능침에 입번한 지사승의 봉점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승도(僧徒)가 능침에 입번하는 것은 일의 체모상 마땅하지 않으니, 예조에 물어 조정에서 정속한 일이 아니라면 혁파하라”는 교지까지 내렸다. 내수사의 소속으로 함흥 본궁에 속했던 석왕사는 다른 절과 구별되어, 지릉과 숙릉(淑陵)에 대한 능침사찰과 지사승은 산내 암자와 다른 사찰이 맡았다. 당시, 삼남의 여러 능침사찰에도 지사승 제도가 유지됐다.
 
1787년 8월 편찬된 <홍재전서> ‘안변설봉산석왕사비’에는 “안변의 설봉산에 석왕사가 있는데, 국초(國初)에 창건한 것으로서 우리 태조가 왕이 되실 꿈을 꾸고 신승(神僧)인 무학을 토굴 속에서 만나 그 꿈 풀이를 했었기 때문에 그 후 등극하시고 나서 그 토굴 터에다 사찰을 세우고 이름하여 석왕이라고 하고는 밭 몇 경(頃)과 종 몇 구(口)를 전하여 불사에 쓰게 했으며, 동구의 소나무와 정원의 배나무는 우리 태조가 손수 심으신 것이다. 그리고 비에 새겨놓은 두 기(記)는 또 숙종과 영조가 쓰신 글이다.
 
이 절이 왕운의 발상지라 하여 나라 전체가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고, 절의 승려로는 비구니들이 군지(軍持)와 녹낭(漉囊)을 들고 북적거렸으며, 건물로는 향실과 감원 등이 빙 둘러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하여 전후 몇백 년간 독경 소리, 범패 소리가 구름 끝이나 나무 꼭대기까지 메아리쳤다. 그리고 법상에다 개금을 더한 것은 인목, 인원 두 왕후와 우리 자전(慈殿·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까지 전후 세 번에 걸쳐 불사했다”고 할 만큼, 석왕사는 조선의 고종과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왕립사찰로써 지원을 받았다.
 
예로부터 적을 물리치기 위한 비보 사찰로 조선 왕실의 인기가 높았던 설봉산 석왕사는 19세기에도 불사와 법회, 불전 간행을 왕실에서 지원받았고, 왕실 번영과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906년 봄에는 석왕사 응진전의 오백나한 개금불사가 크게 추진됐다. 1912년 석왕사의 태조 감실에서 지낸 탄실일과 사절일(四節日)의 제향 비용을 왕실의 이왕직(李王職)에서 지불했다. 1917년 석왕사에서는 지공·나옹·무학대사를 위한 추모 제사와 비각을 신축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응진전·대웅전 등과 만궁당·심검당·해장원·명부전·흥복당·영월루·호지문·설성동루·동안각 등 53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즐비했던 석왕사는 1951년 6월 13일 미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건물이 불타고, 용비루와 인지루도 1987년 홍수로 사라졌지만, 대웅전은 2016년 10월에 다시 복원됐다.
 
보문암, 왕릉의 조포사찰
현존사찰인 보문암(普門庵)은 설봉산 석왕사의 산내 암자로 1423년에 창건됐다. 보존유적 제298호 보문암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 설봉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한다. 1946년 9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경도에서 강원도의 사찰이 됐다.
 
설봉산 보문암에는 금당 건물 1동만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본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단청을 했다. 앞면 6칸 대방 앞에는 툇마루를 내고, 앞면 1칸과 옆면 3칸은 대청마루를 깔았다. 대방 서쪽에 작은 불단을 내고, 불상을 모셨는데 후불탱화 등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본전은 원래 법당보다 대방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1951년 6월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응진전은 본전으로 대방 옆의 별도 전각이었다. 이외에도 전쟁 이전까지 칠성각, 산신각 등 4~5동의 전각과 건물이 자리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본전 건물은 2008년에 다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흔아홉 골짜기를 감추고 있는 설봉산은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1857년 제작한 <동여도>에는 검봉산(劍峯山)이라 표시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변도호부’에는 “검봉산은 본부 서남쪽 35리에 있다. 원래 설봉산인데, 산 위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높이 있기에 속칭 검봉이라 한다”고 했다. 이 산에는 석왕사를 중심으로 보문암 등 여러 곳에 암자들이 있었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안변도호부’ 편에는 석왕사는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養老寺)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
 
1810년의 <비변사등록>에는 순조 10년 음력 9월 25일에 석왕사에 큰 수해가 나서 인지료·용비루·영월루·은선암과 익랑(翼廊)·승당·수각 등이 모두 무너졌는데, 백성 부역이 어려우니 별반의 조치로 감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원찰 석왕사는 세종 이후 능침사찰로 변모하면서 보문암·향적암(香積庵)·은선암 등 산내 암자도 석왕사와 마찬가지로 조포사의 기능을 맡았다. 효종 때 김육의 시문집<잠곡유고>의 ‘학성행’ 시에 나타나 있다. 학성(鶴城)은 안변의 옛 이름이다.
 
서쪽산 중 설봉산이 가장 높다 칭하는데(西山最稱雪峯高)/석왕사 절에는 기이한 자취들이 많아(釋王金刹多奇蹟)/서까래 세 개 유사 역사책에 실렸으니(三椽遺事載往牒)/성조께서 이곳에서 신승을 만났다네(聖祖於此逢神釋)/지릉은 창창하니 그 뒤에 있는데(智陵蒼蒼在其後)/소나무와 회나무가 삼림같이 우거졌네(松檜滿山森如束)/재궁에 재숙하는 제사 법도 엄하여서(齋宮宿寢祀典嚴)/해마다 한식날에 수령들이 제사하네(每年州官祭寒食)
 
조선의 익조 이행(李行)의 지릉에는 매년 한식날을 기해 고을 현감이 제향을 엄격하게 지냈다. 주변 능침사찰은 제수용 두부를 공납했을 뿐 아니라 수령 200년 넘는 노송림을 지키고 가꾸는 임무까지 수행했다.
 
<순종실록> ‘부록’에는 “1917년 순종이 석왕사에 들러 하루 묵으며, 어실각과 태조가 직접 심은 소나무 등을 돌아보았다.”
 
이 설봉송림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 석왕사 근처에는 1980년대 말에 설치된 노동자휴양소가 자리하고 있다.
 
사왕탑의 전설과 목탑
사천왕탑(四天王塔)이 석왕사에 있었다고 하지만 낭설이다. 금강산의 수호신 사천왕이 동해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신라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민간에서는 동해의 용이 탑에 와서 머물다가 바다로 나간다고 했다. 사왕탑은 철종 때의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도>에 표기됐다. 원산 갈마반도와 명사십리 중간지점인 지금의 원산시 용천리에 세워진 석탑이다. 도선국사가 3,800개의 비보사탑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라고 한다. 원래는 9층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져서 2층만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의 석왕사 본말사 사찰재산대장에는 석왕사의 말사 삼수암(三遂庵)이 기록됐다. 삼수암에는 3층 높이의 목탑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저두봉 동쪽 산기슭에 상사(上寺)와 하사(下寺)가 있었고, 아랫동네인 용지원와 통천리 사이에 상탑리가 있다. 상탑리의 삼수암 목탑은 16세기 문헌에 등장한다. 갈천 임운의 <첨모당집>의 ‘삼수암팔영(三水庵八詠)’ 시에 “문 앞에 목탑 서 있고, 처마 끝 바람이 풍경 울리네. 위 섬돌에는 푸른 이끼, 흰 구름 집을 두르고 있네. 동루는 가슴을 열어주고, 서쪽 개울은 발 씻어주네. 소나무 통에 샘물 떨어지고, 구름방아 더위를 찧는구나”라며 삼수암 목탑과 백 척의 누각을 기록했다. 조선총독부와 임운이 각기 기록한 사찰명이 다른 것은 지명에 대한 오기라 할 수 있다.
 
석왕사로 가는 길목에는 예로부터 유명한 석왕사 약수가 있다. ‘삼방약수’로 불린 이 약수는 광천수로 일곱 군데에서 각기 다른 성분의 약수가 흘러나오고, 일곱 가지의 맛도 다양하고 독특하다.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1919년 8월 경원선 열차를 타고 삼방약수를 거쳐 석왕사를 여행했다고 한다. 1930년대의 유람풍습은 가을철에 함경도 안변 석왕사로 단풍놀이 다녀오는 것이 유명한 관광 코스였다. 오늘날 가을 단풍 행락과도 비슷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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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의 석왕사 전경 (사진출처 : 조선총독부 유리원판목록집Ⅱ)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