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6-강원도 보현사

밀교신문   
입력 : 2019-12-16 
+ -

마지막 남은 일주문이다

보현사와 영추암

20191125144547_f1f5bec74d9f2a1f0b03478815b1b552_7cwt.png

 

오늘날 북녘 사찰에는 일주문이 없다. 사찰 입구에 서 있던 일주문은 1951~52년 사이에 방화나 폭격으로 소실됐다. 금강산의 표훈사와 신계사, 정방산 성불사 등에도 없다. 현재, 기존의 건물에 이름을 붙여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일주문에는 문짝이 없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여닫는 것은 오직 이 문에 들어선 자만의 몫이다. 너와 나, 주체와 객체, 차안과 피안의 구분이 없는 세계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일주문은 다르게 불이문이라 부른다. 두 가지이면서도 하나인 정신과 마음의 경계선이다. 언뜻 보기에도 2개 또는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일주문은 상징적으로 기둥을 하나 세웠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일컫는다. 이 문을 통과하면서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드나드는 것으로 사찰의 첫 관문이다.
 
옛 일주문에는 서산대사가 지은《선가귀감》에 나오는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구나.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글귀를 새긴 나무판이 양쪽에 붙였다. 안타깝게도 보현사 일주문에는 이런 멋진 글귀가 새겨진 주련이 붙어있지 않는다. 전쟁 이후에 북녘 사찰의 전각에서는 주련이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황룡산 보현사(普賢寺)는 고산 석왕사와 같이 강원도 안변지역을 대표하는 현존사찰이다. 보현사의 일주문은 석왕사 조계문과 같이 북녘 사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주문의 원형이다. 유점사가 금강산의 동서로 구분하는 기준 사찰이라면, 보현사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금강산 북쪽의 일주문과 같다. 산내 암자로서 현존하는 영추암은 영추사 등으로 불린다.
 
가장 오래된 일주문
안변 보현사의 일주문은 600년의 역사를 지닌 유명한 건물이다. 8세기 중엽에 창건되고, 15세기에 크게 중창된 보현사는 강원도 안변군과 통천군의 경계에 높이 솟은 황룡산(黃龍山)을 진산으로 하고, 그곳에서 뻗어 내린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사찰의 동쪽 달래골과 서쪽의 보남골에서 흘러내리는 구슬같이 맑은 물은 보현사 앞에서 합쳐져 혹은 깊은 못을 이루고, 혹은 장진폭포 등 폭포가 되면서 신곤골(절골)을 지나 멀리 안변 남대천으로 흘러간다.
 
보현사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일주문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광전의 동남쪽에 위치하는 일주문은 거친 돌로 쌓아 올린 축대 위에 다포계 맞배집 구성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조선 초기의 형식으로 보이나 포작 구성은 이와 다른 시기적 특징을 보인다. 건물은 길이 1.7m, 넓이 1.2m 되는 큰 주춧돌 위에 서 있다. 기둥은 윗지름이 60cm, 밑지름이 67cm 되는 듬직한 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는 3.24m이다. 주두 위에 얹은 두공은 바깥 3포, 안 5포로 앞면과 뒷면에 각각 4개씩, 양 옆면에 각각 1개씩 10개를 얹었는데, 그 1~2단의 제공은 소허형이다. 겹처마 배집지붕을 이었고, 안은 통천정으로 시원히 트여 놓았다. 단청으로 소박한 연꽃무늬를 잘 어울리게 그렸다.
 
사찰 입구에는 8세기 보현사가 창건될 무렵에 만들어진 무지개다리인 홍예교가 있다. 화강석으로 다듬어 만든 석교의 넓이는 2.5m, 길이는 약 12m, 높이 약 4.5m,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안의 직경은 약 6.1m로써 그 짜임새가 우수하다. 또 사적비 1기와 안내판이 서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보현사는 원산과 안변 시민들의 유원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현사, 금강산을 비추는 절
천년고찰 안변 보현사는 강원도 안변군 신아면 영신리 황룡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해방 전에 함경도이던 안변군이 194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에 편입되고, 1952년 하령리와 절골이라 불인 신곤리를 병합한 영신리가 사찰의 주소이다. 절의 북쪽 계곡에는 유명한 장진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보현사 스님들은 절 앞의 공수전리 삼거리에서 도납령(道納嶺)을 넘어 곧장 가는 방법과 장덕산 아래의 고개를 지나 고산군 고산리 인근에서 석왕사 스님들과 만나서 철령(鐵嶺)을 넘어 강원도 회양으로 가는 길에 금강산과 교우했다.  
 
조선 중기의 보우대사가 머물렀던 절이 보현사인데, “안변 황룡사 초암에서 여러 차례 재를 지냈다”는 일화가 16세기 말엽 보우선사의《피참록》에 전한다. 원산항으로 흐르는 남대천 중류의 철리(鐵里)를 거치는 길을 통해 석왕사와도 조우했다.
 
묘향산 보현사와 구별하기 위해 안변 보현사로 꼭 부르고 쓰는데, 금강산 북쪽에 자리한 안변에는 고려·조선시대에 새로 정복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군사 목적의 행정기구인 도호부를 변경에다 설치하고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고려 때 관문을 설치하여 ‘철관(鐵關)’이라 부른 철령관지는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685m의 고개다. 철령의 북쪽을 관북, 남쪽을 관동이라고 부르는데, 산세가 험준하여 남북의 경계에 방어 시설로 두었다. 삼봉 정도전은 이곳에 대해 “철령의 산은 높아 칼날과도 같은데, 동쪽으로 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가을바람은 유난스레 양쪽 귀밑을 불어 스치는데, 말을 몰아 아침에 북녘 변방에 왔노라”라고 노래했다. 이 높지 않은 고개, 철령은 1387년 12월 명나라 사신 설장수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 땅이니 요동 관할(철령위) 하에 두겠다”며,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 개의 역참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으로 한껏 역사의 주목을 받은 곳이다. 안변의 동남쪽 105리(42km)에는 평안도 평강 쪽으로 “3개의 기맥을 분기시킨다”는 분수령(分水嶺)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때 창건된 보현사와 영추암
강원도 안변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돼 해방 때까지 기차가 다니던 경원선과 금강청년선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분단 전까지 함경도였던 안변은 서울에서 철령을 지나 함경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보기 드물게 ‘안변 30리 벌판’이라 불리는 넓은 들이 펼쳐진 곳이다.
 
안변의 대표사찰 보현사는 1799년에 간행된《범우고》에서는 “보현사는 신라시대 효공왕 때 창건되었다.” 1872년에 편찬된《북관읍지》와 1899년 편찬된《안변도호부읍지》에 보면, “보현사는 신라 효공왕 원년 737년에 창건된 이후 세 번이나 불에 탔다. 전각과 요사채가 5채가 있었는데, 1775년에 소실되어 당시 요사채 한 동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중창되어 원래 중심건물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6․25전쟁 전에는 보광전ㆍ응진전ㆍ극락전ㆍ명부전ㆍ시왕전ㆍ초향각ㆍ산신각ㆍ일주문 8동의 전각이 있었다. 1951년 6월 초순 미공군의 폭격으로 보광전 불단과 문짝 등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원상태로 보수한 것이다.
 
국보유적 제104호 안변 보현사에는 현재 보광전과 명부전ㆍ염화실ㆍ일주문 4동과 고려시대에 만든 8m의 석교가 남아 있다. 그 옆 산기슭에는 산내 암자인 영추암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 보현사와 영추암에는 사찰관리인이 배치되어 있다.
 
일주문 서북쪽에 자리한 보광전은 18세기에 다시 지은 후에 여러 차례 보수됐다. 건물의 구조는 1731년 중건된 석왕사 대웅전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중심건물인 보광전은 높이 2m나 되게 정교하게 쌓은 축대 위에 세운 정면 3칸(9.22m), 측면 2칸(6.16m)의 겹처마 합각집이다. 건물은 부재가 웅건하고 짜임이 견실한데 특히 모서리 기둥은 다른기둥보다 유달리 굵으면서 안기울임을 주어 듬직해 보인다. 두공은 바깥 5포, 안 7포이다. 두공의 제공은 바깥 정면은 꽃가지형, 후면은 닫긴형으로 서로 다르지만, 안제공은 모두 꽃봉오리 형으로 통일했다. 두공의 제공과 첨차는 돌출이 심하고, 그 윤곽의 굴곡이 예리하여 몹시 장식적이다. 내부에는 중보에 소란반자를 설치하고, 그 주위로 빗반자를 대여 내부공간을 넓혔다. 단청은 금단청으로 치레그림(별지화)을 많이 그려 놓은 것이 아주 이채롭다. 대들보에는 포도넝쿨무늬, 칠보무늬, 액방에는 용과 사자ㆍ학ㆍ대나무, 포벽에는 불상과 나한상 등 여러 가지 내용의 그림들과 비단 무늬들을 그렸다. 건물 중앙의 7개 돌계단의 아래 양쪽 끝부분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에 건립된 석왕사 대웅전 돌계단의 해태상과 아주 비슷하다.
 
보광전 옆 서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8.1m), 측면 2칸(4.65m)인 맞배집이다. 건물의 정면은 포식두공(바깥 3포, 안 5포)으로, 후면은 익공식 두공(2익공)으로 꾸몄는데 이런 두공은 아주 희귀한 구조이다. 명부전은 근대에 보수한 건물이다. 전쟁 시기에 극락전과 응진전은 소실됐다. 보광전 앞의 서남쪽에 있었던 응진전은 정면 7칸(13.54m), 측면 1칸(4.3m)의 2익공 바깥 도리식 두공을 한 겹처마 배집이었고, 극락전은 앞면 4칸, 옆면 2간의 합각집으로 두공은 정면은 단익공식이고 뒷면에는 없었다. 초향각이라 불렀던 염화실은 동쪽편에 있는데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배집이며 두공을 하지 않고 지었다.
 
보존유적 제299호 영추암(靈鷲庵) 또는 영추사는 황룡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다. 절 주소도 지금의 보현사와 똑같다. 본전과 산신각 2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영추암은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북녘의 전통사찰인데, 국내 언론과 기록에서 강원도 통천군의 용견암 또는 용추사와 종종 헷갈린다. 전쟁 시기에 소실된 통천 용견암은 1765년 편찬된 전국 읍지의 하나인《여지도서》에 처음으로 기록됐다. 
 
황룡산 영추암은 737년에 창건된 보현사의 부속 암자로서, 800년 이전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보현사가 창건된 이후 몇 차례 화재를 입었고, 16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볼 때, 영추암도 이처럼 수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것이다.
 
영추암의 본전은 건물 구조상으로 극락전 또는 명부전의 형태를 띠고 있다. 높이 0.8m로 잘 다듬은 화강석 2단의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지은 본전은 정면 3칸(6.6m), 측면 2칸(4.6m)으로, 2익공 공포이며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 있는 배집 지붕을 한 건물이다. 산신각은 앞면 2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다. 2011년 6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바 있는 현존사찰이다.
 
안변평야로 불리는 강원도 안변은 서남의 리천, 동남의 흡곡에서 오는 여러 도로가 안변을 통과하여 덕원으로 뻗어 있다. 또 안변-회양간 도로를 이용하면 군소재지 안변읍까지 12km이다. 이처럼 가까이 있는 곳에 신라 천년의 가람, 보현사와 영추암이 자리하고 있다.
6면-안변보현사_한국문원 사진자료.jpg
1900년대 안변 보현사 일주문 (사진출처 : 《금강산》 한국문원, 1995년)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