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7-강원도 명적사

밀교신문   
입력 :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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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진주를 품다

속고산 명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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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원산은 함경도의 땅이라 불렀다. 강원도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들이 더 많다. 그만큼 우리에게 함경도 원산으로 익숙한 도시다. 지금, 원산은 강원도의 도 소재지다.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되고, 도의 소재지도 철원에서 원산으로 옮겨졌다.
 
1950년 전쟁 때, 더 유명해진 원산은 인천과 부산항과 같이 1878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무역항이다. 1880년에 정식 개항한 원산은 일제강점기 때에 명태의 중계무역과 콩 수출항으로 유명한 곳인데, 러시아식 명칭으로는 ‘포트 라자레프(Port Lazarev)’이라 불렸다. 그다음은 재일동포 북송선에 관한 이야기다.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동포 975명이 옛 소련의 군함을 개조한 수송선 쿠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 2대의 북송선을 타고 청진항에 도착했다. 그 후 1971년부터 만경봉호를 통해 니가타〜원산 노선의 북송선은 1984년까지 186차례에 걸쳐 9만3,340명이 북녘땅을 밟았다. 재일한인 북송사업의 상징이던 만경봉호는 3,500t급 규모로 300명이 정원으로 평양의 만경대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 정박한 미해군의 정보수집함 ‘USS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다. 미국 군함이 다른 국가에 나포된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미국 측이 북측에 사과문까지 제출하고 포로 신병을 인도받았다. 원산항에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원산에서 평양까지 육로 이송, 옮겨서 평양의 대동강변에 당시의 모습대로 전시하고 있다.
 
입에서 입을 통해 회자된 원산은 1951년 양명문의 시에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명태》을 통해서다.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던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는 가사는 동해의 진주라 불린 원산항의 함축적 이미지를 읊은 대목이다.
 
경남 통영, 전남 여수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미항으로 꼽힌 원산은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다. 북한의 서해 남포와 같이 동해 제일의 항구이다. 19세기 초반에 널리 알려진 송도원과 명사십리 해수욕장 등이 자리하는 천년의 도시이다.
 
2000년 된 이야기, 원산
예로부터 동예와 고구려의 땅, 원산은 제4대 개루왕 말기에 백제의 영토였다. 160년 이전에 백제는 함흥 아래 정평군에 쇠를 잘 다스리는 수시리 성을 두어 초고(肖古) 왕자를 파견했다.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으로 불린 초고왕자는 160년 함경남도 함흥ㆍ원산에서 동해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인 이즈모에 출정하여 왜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를 정복했다.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인 와카히(稚日女命)는 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한 연도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어 알려졌다.
 
백제의 제5대 초고왕은 즉위 전, 160년에 왕자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항해하여 왜국을 정복한 최초의 왕이다. 그때 왜국의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비롯한 12신녀 중에서 8신녀를 포로로 삼았으며, 그들로부터 8명의 자식을 얻었다. 그로부터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와 폭풍을 다스리는 신 ‘스사노오(素戔嗚)’는 160년 함경도 함흥ㆍ원산에서 출항해서 일본 시마네현의 여왕 히미코를 정복한 백제의 초고왕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처럼 원산은 최초로 일본 정벌을 이룩한 백제 군대의 출항지로써, 현재에도 속고산 등의 지명과 함흥 남쪽 정평군에 400m 토성인 수시리 고성(隨時里古城)이 남아 있으며, 일본 최고의 문헌으로 712년에 편찬된《고사기》와 720년의《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명적사, 강원도 원산의 절
원산 명적사는 18세기 중엽의《여지도서》<덕원부읍지>편에 “덕원부 서쪽 25리 반룡산(盤龍山) 밑에 자리한다. 절에는 35명의 스님이 있다”고 함으로써 반룡산 명적사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안변 석왕사의 말사였던 명적사는 600년 신라시대에 창건한 때로부터 속고산(速高山)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의 동해안 진출은 155년 개루왕 때 처음 이루어졌다. 그 후 원산시 북쪽 문천의 속고봉과 덕천의 속고산과 같은 지명이 백제 초고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따서 생겨났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의달산 즉, 고대 쇠달산으로 적고 신사가 있었다”고 했다. 현재의 강원도 원산 속고산이 그 쇠달산이다.
 
국보유적 제105호 명적사는 원산지역의 유일한 사찰로 명승지이다. 강원도 원산시 덕원면 영강리 속고산이 지금의 주소다. 서남쪽의 장사봉 아래에는 적조암이 자리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남쪽으로는 송봉덕산이 한눈에 조망된다. 이밖에도 원산지역의 절은 백산 운석사와 성치산 무달사 등이 있었는데, 터로 남아 있다.
 
600년경 고구려 시대에 개창한 명적사는 676년 신라의 한반도 남부통일 시기를 거쳐 9세기 초기인 800년경 신라 승려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원산시 세길동인 구 덕원면에는 신라 경덕왕이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세워 발해와의 국경선 수비 관문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시기에 신라의 사찰들이 이곳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784년(신라 선덕왕 5년)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구법을 다녀온 도의(道義)국사에 의해 개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의국사는 821년에 강원도 양양 진전사로 들어가지 전에 함경도 함흥과 원산 일대를 거치면서 속고산에 사찰을 건립하거나 수행한 것으로 비정이 된다. 760년경 지금의 서울(北漢郡) 출신의 도의국사는 출가하여 법명을 명적(明寂)이라 했다. 952년 편찬된《조당집》에서 도의국사는 “스님의 성은 왕씨, 법호는 명적, 시호는 원적(元寂)이며 도의는 법명이다”고 했다.
 
고려 때의 기록이 전하지 않는 명적사는 1635년 조선시대에 다시 중건됐다. 1983년 출판된《우리나라 역사유적》에서는 창건연대가 고려 이전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16세기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이나 조선 후기의 영조 연간에 편찬된《여지도서》에는 “명적사에 승려가 35명이 있었다”고 기록했었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가람고>,<범우고>에는 사찰명만 적혀 있을 뿐이다. 조유수가 1741년 편찬한 <동계집>에는 “보운도일(普運道一) 대사가 명적사에서 입적했다”고 비문을 썼는데, 도일대사는 명적사를 대거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1771년에 다시 중수되었으며, 그 후 1896년 고종 건양 원년에 크게 보수한 대웅전과 심검당 2동의 전각이 남아 있다. 근세기에 윤치호의 영문판《일기》에서도 “1902년(광무 6년) 4월 24일에 몽월암(蒙月庵)과 명적사를 방문했다”고 적었다. 1910년 일제의 조사기록에는 답(沓) 10,724평, 전 17,441평, 대지 408평, 임야 494,610평, 사사지 413평으로 총 523,596평을 소유했던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명적사 대웅전은 장대석으로 쌓은 높이 1m의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11m), 측면 3칸(7.3m)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공포는 바깥 7포, 안 9포로 되었다. 잘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운 흘림기둥들은 가운데 칸에서는 넓게, 좌우간에는 그보다 조금 좁게 배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바깥 7포, 안 9포의 아름다운 두공을 짜 올린 팔작지붕을 하였다.
 
잎이 달린 연꽃봉우리를 형상한 제공과 첨차는 치밀하게 맞물렸다. 두공 위에 올린 봉황새와 용머리 조각은 섬세하고 세련되었다. 두공 사이 벽의 장여 밑에는 작은 연꽃조각을 붙여 놓았다. 겹처마 합각지붕의 완만한 곡선과 날아갈 듯한 모습은 전각과 잘 어울린다.
 
꽃무늬 문양이 아름다운 명적사 대웅전의 문짝은 꽃무늬 문살로 유명하다. 가운데 칸의 문짝에는 연꽃무늬와 매화무늬를 새겼고, 양옆 칸의 문짝에는 각각 모란과 국화 무늬를 새겼다. 서로 다른 꽃무늬로 아로새긴 문짝들은 마치 아름다운 꽃 비단을 드리운 듯하다. 내부에는 살미 끝 연봉 조각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천장은 마루반자와 빗반자로 구성되었다. 천정의 측보에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머리 조각을 얹었고, 부재마다 아름다운 모루단청을 입혔다. 대웅전은 공포 조각 수법과 형식 등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특징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을 대표하는 전각이다.
 
심검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합각식 건물이다. 정면 3칸에 툇마루를 깔고 우측 두 칸은 부엌 겸 공양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경내에는 봉명당 부도 등 4기와 비 2기가 남아 있다. 재일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는 “2015년 6월 북한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원산 명적사, 고산 석왕사, 금강산 표훈사 등 도내 명승지를 관리하고 유산을 보호를 위해 개건 보수를 추진했다”고 한다. 원산 명적사는 2016년 여름, <미주현대불교>방북단에 의해 처음으로 서방언론에 공개됐다.
 
 명사십리와 송도원
‘십 리 구간에 펼쳐진 이름난 사취’라는 뜻의 명사십리(明沙十里)와 ‘푸르게 우거져 있는 소나무숲과 거친 파도가 있는 동네’란 뜻의 송도원(松濤園)은 원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강원도 원산시 용천동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93호 명사십리는 원산항 남동쪽 용천리 남대천 하구에서부터 길게 뻗은 갈마반도의 바다 기슭에 4km로 펼쳐진 흰 모래 터(백사장)이다. 해수욕장의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울모래등’이라 하여 명사(明沙)가 아닌 명사(鳴沙)라고도 쓴다. 특히 백사장 가에서 붉게 피는 해당화(海棠花)가 유명하다. 원산시에서 약 3km 떨어진 송도원은 원산 송흥동에 있는 해변의 명소이다. 1901년 개장한 송도원해수욕장은 장덕산으로부터 문암, 바다로부터 솔밭을 지나 송천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700여 년 전에 조성한 소나무 방풍림은 흰 모래밭, 붉게 피는 해당화가 잘 조화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룬다. 이밖에도 원산시 송천동의 천연기념물 제197호 튤립나무와 제199호 칠엽나무, 제195호 원산 금송(金松)은 금솔이란 이름으로 원산농업대학에 자리하고 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경성의 고관대작들은 여름철 피서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안변 석왕사의 약수를 먹고, 원산 명사십리에서 해수욕하는 것을 최고의 자랑, 스펙으로 여겼다. 1937년 8월 중일전쟁 전시 때에도 송도원 해수욕장은 “폭서로 인하야 여름 왕국의 호화판이었다”는 언론기사가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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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산 명적사 대웅전 (사진출처 : 조선의 절 안내)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