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8-강원도 용추사

밀교신문   
입력 : 2020-01-31 
+ -

총석정의 비원을 담다

추지령 용추사

thumb-20191230100611_9432395116bc6b6961f98fb24dc951bd_1gf3_220x.png

 
금강산의 산신은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 이외에 또 하나의 비경을 바닷가에 숨겨 놓았다. 해금강으로 불리지만 엄연히 다른 곳이 총석정(叢石亭)이다.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 바닷가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들과 절벽을 일컫는다. 총석대는 바다의 해룡들이 금강산에 오르지 않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수만 개의 천 길 장대를 세워놓은 곳이라 전한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총석정은 고을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 모여 섰는데, 모두가 육면이며 형상이 옥을 깎아 놓은 듯한 것이 무릇 네 곳이다. 정자가 바닷가에 있어 총석에 임하였기 때문에 총석정이라 이름하였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의 술랑ㆍ남랑ㆍ영랑ㆍ안상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하였기 때문에 이름하여 사선봉이라 한다”고 했다.
 
18세기 중엽, 이의현의‘도곡집’ <유금강산기>에는 “모두 육 면의 긴 수직 돌[條石]로 몸체가 이루어져 수십 개의 긴 수직 돌을 합하여 한 무더기 총[叢]을 이루었다. 그 위에 왜송(矮松)이 자라고 혹은 사초가 덮여 있으며, 또 두 그루의 소나무가 푹 파인 곳[缺岸]에 자라서 한 석문을 이루니, 이 역시 모두 육 면이고, 정자 가의 절벽이 총총하게 서서 배열된 것도 모두 육면이다. 나는 처음 길가의 돌을 보고서 진실로 놀랍고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곳에 이르자 눈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똑같은 모양이었다. 이는 정교한 장인이 망치질로 쪼아서 만든 솜씨가 아니었는데 그 모양이 모두 이와 같으니, 실로 이는 천지 사이에 궁구하기 어려운 이치였다”라 평했다.
 
관동팔경의 제1경 총석정은 천연기념물 제214호와 명승지 제13호이다. 미군 B26 폭격기가 1951년 6월 원산항을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에도 금강산과 이곳은 예외였다. 주상절리를 만든 자연의 경이는 제주 대포동 지삿개바위와 광주 무등산 입석대, 감포 앞바다에도 있지만, 통천 총석정은 가히 떨기 돌(叢石)의 으뜸이다. 이 수십 개의 육모 돌기둥들이 떨기를 이루는 떨기 돌을 보려고, 신라의 신선에서부터 그 후 수많은 묵객이 이곳을 찾아 노래했다. 그들을 맞이하고 뒷바라지한 사람들은 통천의 민중들과 용추사의 승려였다.
 
총석정, 민중의 비원이 서린 곳
정자에서 3.4m 떨어진 바닷가에는 사선봉으로 불리는 내 개의 높다란 총석주(叢石柱)가 특징이다. 현무암 총석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그 면들이 갈려지고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6각형·8각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의 돌기둥이 장관을 이룬다. 총석들은 그 생김새에 따라 바다로 향해 오른쪽에 앉은 모양, 왼쪽에 누운 모양, 그 사이에 선 모양이고, 주위에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기둥 위의 낮은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통천금강’이라 부르고 해돋이가 최고의 장관이다.
 
예로부터 총석정은 가히 신선이 즐길 선경으로, 고려와 조선의 사람들이 찾아 경관을 읊은 이들의 시문과 그림이 전해진다. 특히, 겸재 정선은 만년에 이 네 개의 돌기둥을 세 개 혹은 두 개 등으로 마음대로 변형시켜 그리기도 했다.
 
1930년대 사진 속의 해금강 총석정은 절벽 끝에 정자가 보이고, 해강 김규진이 쓴 총석정 현판 글씨가 있었다. 정자 옆에는 매향비가 있다는 글자까지 보인다. 매향비는 구복적인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사람들이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비를 세운 것이다. 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그 향나무가 오랜 세월 스스로 바다에서 떠오른 향나무를 태우면 좋은 향기가 나서,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민중들을 구원해 줄 것을 믿던 매향의식을 갖던 곳이 총석정이다. 통천군의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 후 미륵부처가 온다는, 손에 잡히지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향나무를 묻으며, 오지 않을 미륵에게 향 공양으로 간절하며 또한 슬픈 의식을 매년 치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는 군민 김영제가 총석정을 중수했으며, 장홍식이 쓴 총석정의 찬기(撰記)는 1976년 통천군민회가 발행한‘통천군지’에 전한다.
 
신라 때 총석정의 절, 용추사
추지령(楸池嶺) 용추사는 2002년 10월에 다시 복원됐다.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 백운암리의 동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용추사로 이름이 바뀐 용공사(龍貢寺)의 극락보전에는 목조 아미타 불상을 비롯하여 석가모니불 탱화, 진영이 봉안되었으나 현재는 새로 복원된 대웅전, 비와 부도만이 남아 있다. 전쟁 때인 1951년 6월 폭격으로 파괴된 용공사는 2002년에 복원하면서 일제 봉건잔재의 청산과 지명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북한 당국의 지시로 사찰 이름이 용추사로 바뀌었다.
 
‘조선중앙방송’은 2002년 10월 31일에 용추사의 복원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다. “역사문화유적 보존정책에 의해 용추사는 오늘 원상대로 복구되어 민족의 재능을 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본래 이 주변에는 7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전쟁 때 미제의 폭격에 의해서 다 없어지고 용추사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중앙방송>에서는 “총건평 30.3㎡로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되어있는 용추사는 삼국시대에 안변 보현사의 말사로 세워진 사찰이다”라며, “용추사는 잘 다듬은 돌 2단으로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여러 가지 두공과 익공식으로 된 겹처마 배집지붕을 했다.” 또 “처마는 단청으로 장식해서 선조들의 높은 건축술을 보여주고 있다”고 용추사를 소개했다.
 
835년(신라 흥덕왕)에 와룡선사가 창건하여 발삽사(勃颯寺)라 했다고 전한다. 와룡선사가 달마대사의 후신이라는 전설도 이때 생겨나 전해졌다. 921년 총석정을 다녀간 고려 왕건은 와룡조사를 흠모하여 새롭게 중건하고, 태조의 교지로 군의 세공을 절에 기부하였으며 용공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989년 성종이 제관도인에게 명하여 중수했다. 조선 중기에는 1523년에 중창하였고, 1718년에 일어난 산의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가 그 후 청계선사가 중건하면서, 불에 탄 전각의 모습과 자국을 보기 싫어서 동쪽 산기슭 밖으로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중건했다. 17세기 후반 임영의 ‘창계집’에도 용공사라 기록되었고, 1778년 이병연의‘사천시초’에서는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작품인 겸재가 1711년에 그린‘신묘년 풍악도첩’의 <용공동구>와 다르게 제화 시에〈단발령>,〈용적사>라고 기록했다. 겸재 정선은 자신의 그림에서 이미 폐사된 용공사를 그리지 않고, 사찰 입구의 계곡미를 장쾌하게 그려 놓았다.
 
용공사, 금강산의 또 다른 절
18세기 중엽에 용공사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이루도록 기원하는 금강산의 절’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의 이의현이 쓴 ‘도곡집’ <유금강산기>에는 “이 사찰은 금강산 북쪽 산기슭에 있었는데, 사찰 일주문에 ‘금강산 만수성용공사’라는 편액을 붙였다. 신라의 와룡선사가 827~835년에 처음 창건하였는데, 고려 때 거둬들인 세금을 이 사찰에 주었기 때문에 용공(龍貢)이라 이름했다고 한다”라고 하여 장소와 절의 연원을 밝히고, 또 “불전과 요사채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장안사보다도 더하며 승려도 백 명에 가까우니, 거대한 사찰이다”라고 하여 당시 용공사가 금강산 장안사보다도 더 큰 절이었다고 했다.
 
또한 도곡 이의현의〈유금강산기〉에는 “불전과 요사채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장안사보다 더하였으며 승려도 백 명에 가까우니, 거대한 사찰이다. 고려 때에 공세(貢稅)를 절에 주었기 때문에 용공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또 “유점사 말사이다. 삼국시대에 와룡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왕실의 와룡조사에 대한 각별한 배려로 군공(郡貢)을 받았으므로 용공사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문종·세조·성종·인종·명종·선조·인조·효종 등의 아홉 임금이 이 절을 사모하여 어필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됐다. 또〈유금강산기〉에서는 “총석정을 구경하고… 날이 어두워져…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 앞장서 인도하게 해서 광석교 앞에 이르니, 바로 용공사의 동구였다. 용공사의 승려들이 남여를 가지고 나와서 맞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용공사 동구 밖의 광교천 다리를 기록하고, 스님들이 관료의 가마꾼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 말에는 1860년도의 산불로 인해 법당 5곳과 요사채 8채가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김시연이 내탕금 1만 5000냥을 얻어 중건했다. 그러나 1884년에 도둑 떼들에 의하여 요사채와 승방 등이 불타 버렸고, 이에 김규석이 공명첩 500장을 돌린 뒤 중건됐다. 1903년에 다시 화재로 법당과 어실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그 뒤 다시 중건했다. 그때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 삼존불, 영산전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세불 등 모두 9불이 봉안됐다. 또 탱화는 후불탱화 3점, 감로탱화 3점 등 총 19점이 봉안했고, 사보(寺寶)로는 오동 향로와 범종이 있으며, 유암선사비와 설송당대선사비·철웅대사비 등이 있다. 부도는 중봉탑·환송당탑·도암당탑 등이 있으며, 진영으로는 유암선사의 영정 외에 19점이 봉안되었다.
 
1924년에 간행된 ‘유점사본말사지’에는 신라의 발삽사, 고려와 조선시대의 용공사이었던 용추사를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유점사의 말사였고, 전쟁 이전까지 극락보전과 영산전해장전·연루전·어실각·산신각·하별당·양로당 등 여러 전각과 3층탑 그리고 부도가 있었다. 또 “그 이후에… 은적암이라 하였다”는 ‘유점사본말사지’의 기록으로 용공사와 은적사를 같은 사찰로 적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사찰이다. 용추사가 위치하는 추지령 동쪽 기슭에는 서남쪽으로 고윤산, 북서쪽으로 우동산이 있고 기대령과 추지령이 있으며, 벽운암리에는 유명한 쌍룡폭포가 있다. 이 폭포 인근에는 용견암, 북쪽의 추지령에 용공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대까지 인근 신일리에 은적사, 송전면 갈평리에 화장사가 있었다.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 신일리에 있던 은적사는 835년(신라 흥덕왕) 와룡조사가 창건하여 발풍사(勃楓寺)라 하였으며, 921년 태조의 왕명으로 와룡선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의 세공을 바치도록 하고 절 이름을 용공사로 고쳤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다가 1718년 산불로 소실되어 청계대사 등이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절을 옮겨 중창했다. 그 후 영월·만월·청파대사가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용흥암 또는 용견암이라고 했다. 1876년에는 도적들이 방화하여 절을 불태웠으나 수봉ㆍ제하대사 등이 다시 중건하여 은적사라고 하였다.
 
1395년부터 사용된 강원도의 명칭은 강릉과 원주에서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양간지풍(襄杆之風)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는 통천 총석정의 바닷가에는 ‘꽃 중의 신선’이라 불리는 해당화가 비록 향기는 없을지라도 민중들의 삶 속에 붉은 꽃깔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6면-총석정_조선관광 2005년판.jpg
강원도 통천 총석정, 관동팔경의 제1경 (사진출처: 조선관광 2005년판)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