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19-개성특급시 안화사

밀교신문   
입력 : 2020-02-17  | 수정 :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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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황도의 절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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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제3의 도시, 개성은 555년부터 송악산(松嶽山) 자락의 송악으로 불리었다가 919년에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開州)라 하고, 왕도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으로 탄생했다.

 

고려 광종은 950년 즉위 원년에 황제국을 선포하고, 다음 해 개경을 황도라 칭했다. 성종은 995년에 개주를 개성부로 승격시키고 행정지역을 왕경과 경기로 구분했다. 이후 개경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3년부터 다시 개성(開城)이라 불렸다. 1949년 개성시가 되었고, 1955년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2004년 1월 개성특급시로 명칭이 바꿨다.

 

오늘날 개성은 천년의 고대도시와 고려의 역사로 들어가 첩경이자 실마리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들어와 1개월간 개경에 머무르다가 돌아간 다음, <고려도경>을 지은 서긍(徐兢)은 “나라를 세울 때는 반드시 형세를 관찰하여 오래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는다”고 했을 만큼 고려 왕조의 도읍지로 보았다. 전국 연결하는 22개 역참의 육로는 개경과 서경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전국 13개의 조창을 연결하며 수로와 해로로 짠 조운로는 임진강 하구의 동강과 예성강 하구의 서강에서 세곡 등 물자운송을 개경으로 연결했다. 외국과의 항로는 개경의 외항인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 왕조의 심장인 개경에는 일찍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3년 평양에다 9개의 사찰을 건립했던 것같이, 오늘날 국정홍보처와 비슷한 역할의 10개 사찰을 919년에 건립됐다. 태조 왕건은 강력하고 부강한 고려를 만들기 위해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에 힘입은 것이다”라는 정책 기조는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경주 중심의 불교적 기반을 송악으로 재편하려는 숨은 의도가 담겼다.

 

개성은 우리나라 오천 년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고려 왕조는 이미 사라졌고, 법왕사 및 봉은사·현화사·흥왕사·귀법사·개국사·국청사·천수사 등 고려시대를 대표하던 여러 고찰은 모두 사라지고, 천년 도시의 가운데에 안화사만 홀로 남아 있다.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하다
풍수지리상으로 개경은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오관산이 개경 정기의 진원지임을 지적했듯이 오관산에서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산세가 수려하고, 사방의 산이 명당을 에워싸서 정기를 축적하는 전형적인 ‘장풍국(藏風局)의 땅’이다.
 
자연적으로 바람을 잘 갈무리하는 지세라서 저절로 명당의 위력을 지녔다. 송악산의 원래 이름이 부소산인데, “신라의 풍수가인 김팔원이 산의 형세를 보고, 왕건의 4대조 강충을 찾아가 ‘부소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에 강충이 그의 말을 따라 소나무를 심은 때로부터, 송악산의 명칭이나 개경을 송악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생겼다”고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편년통록>을 통해 전한다.
 
커다란 분지에 속하는 개경은 구릉지를 이루는 산들이 낮기는 하지만 주위를 두르고 있다. 진산인 송악산을 북현무로 하고, 안청룡을 자남산ㆍ바깥청룡을 부흥산과 덕암봉으로 하고, 우백호는 오공산으로, 남주작은 주작현·안산은 용수산으로 가졌다.
 
송악에서 발원하는 광명천과 자하천, 용수산에서 앵계, 자남산에서 나오는 배천과 지네산에서 발원하는 오천이 흐르지만 용수는 널 부족한 곳이다. 서쪽의 예성강 포구인 벽란도는 해양국제도시 개성의 해문(海門)이었고, 동쪽으로는 임진강과 사천의 합류점에 번성한 동강리 포구가 있었다.
 
서울에서 65km 거리에 있는 개성은 옛날에 송악·송도·송경으로 많이 불렸으나 개경과 중경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고려 4대 광종 11년에 수도 개경의 지명을 ‘황도’로 고쳤다. 도시의 이름을 천경 또는 제경(帝京)으로도 불렀다. 당시 10만 호에 약 50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개경에는 황제국의 원칙에 따라 황성에 다섯 개의 문을 거쳐 입조토록 했다. 제후국이던 조선의 경복궁에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까지 세 개의 문을 지났던 것과도 차이가 있다. 
 
‘세상을 향해 널리 열린 수도’란 이름의 개경은 기원전 640년 로마인들이 모라 인근 바닷가에 대규모로 건설한 인공 해안염전을 통해 티베르 강의 ‘소금길’을 기원전 4세기에 개척하면서 소금 유통의 중심지로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까지 유래했듯이, 해양 교역을 통해 ‘코리아’의 국명을 얻고 “모든 길은 개경으로”란 닉네임을 가졌다. 그러나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고종 때 몽고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안화사, 평화를 이루는 절
개성 안화사는 930년 음력 8월, 후백제의 견훤에게 인질로 잡혀가서 죽은 왕건의 아우 왕신의 원당으로 창건된 ‘안화선원(安和禪院)’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에는 송악산 자하동의 안화사가 고려 예종이 새로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1118년 4월에 크게 중창하고 사명을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로 개칭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1113년 내제석원의 주지 원응국사가 1117년에 안화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중창 불사를 총괄했다.” 이제현의 <역옹패설>에는 “정국안화사의 비석에 예종이 친필로 당나라 율체 4운(韻)의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그 뒷면에 태자 아무개가 글씨를 썼다고 했는데, 그분이 인종이다.”
 
고려 예종은 아버지 숙종의 원찰 건립을 위해 1117년 4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화사 창건 소식을 전했는데, 그다음 해에 송나라 황제 휘종이 불전의 편액을 능인지전이라 쓰고, 재상 채경에게 명하여 절의 액호를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라고 써서 법전에 쓸 재물과 화상 등을 함께 보내왔다. 예종은 신하에게 명하여 편액을 사문(寺門)에 걸게 했다. 당시 송나라 휘종이 조성해 보냈다고 전해지는 16나한상은 안화사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된 정국안화사는 “도성의 절 중에서 으뜸인데, 천자의 친필을 봉안하여 모셨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름 그대로 ‘나라를 평화롭게’ 또는 ‘평화로운 나라’를 기원하는 절이라는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국 또는 정난(靖難) 공신들이 있듯이 ‘천하를 편안하게 바로 잡는다’는 정광(靖匡)과 ‘신하가 임금에 대해 충성을 다 한다’는 정헌(靖獻)이라는 뜻에서도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개경 황도의 왕립사찰, 안화사는 예종 이후 많은 왕가, 종친들의 귀의를 받았다. 특히 예종의 비이며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진당(眞堂)을 만든 뒤 왕가의 행향이 더욱 잦아졌다. 예종이 사찰을 중창했을 때 당시의 주지는 원응국사이었고, 즐겨 찾았던 왕들은 예종·인종·의종·명종·고종·충렬왕·공민왕이었다.
 
개경 최후의 절, 안화사
930년에 창건된 송악산 안화사는 개성특급시 고려동에 자리하고 있다. 자하동(紫霞洞)은 고려동의 옛 이름이다. 해양대국을 자칭했던 고려 오백 년의 도읍지에 마지막 남은 절이다. 더 정확하게는 개성 시내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이다. 오늘날 개성시에 속하는 영통사·관음사·대흥사·화장사 등 4곳의 현존사찰이 더 있지만, 시가지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아직 그때의 주춧돌 등 초석이 남아 있는 거찰 안화사는 고려의 멸망으로 축소되었으나 1458년 여름, 이곳을 찾았던 김시습은 <탕유관서록>에서 송악과 안화사·왕륜사 등을 유람했다고 하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옛터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소실됐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의 김만영, 황팔석 스님이 1931년 옛터에다 사찰을 중창하고 일제 31본산제의 한 곳인 강화 전등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그 당시에 일본인 관료의 허가조건에 따라 건립하면서 대웅전 처마가 우리나라 전통식과 다르게 급경사를 이루고, 탑의 모양과 문양도 전통탑 양식과 다르게 세워졌다. 탑 상륜부가 벚꽃 문양이고, 특히 동그란 탑의 문양은 “조선과 일본이 한 나라가 되어 일본을 받든다”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전한다. 이때 우리나라의 명맥을 끊겠다는 의미로 쇠말뚝을 이곳에 많이 박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건립된 절과 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하는 증거로 남아 있다. 또 안화사에 소장된 문헌과 유물들이 그 당시에 모두 약탈당하고 말았다.
 
1951년 전쟁 때 파괴된 안화사는 1989년 7월 북한 문화보존총국의 주도로 대웅전과 오백전과 칠성각이 다시 복원됐다. 과거 찬란했던 고려시기 안화사의 모습은 이때로부터 다른 풍광이 되었다. 안화사는 2015년 4월 13일에 독일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반년간에 걸쳐 기와지붕과 조경 등을 보수 완료했다. 이것은 2014년 10월 북한의 민족유산보호지도국과 독일대사관이 맺은 ‘개성시 역사유적 보수협조에 관한 합의서’ 체결에 따른 것으로, 보수공사는 개성시 인민위원회와 민족유산보호관리소에서 담당했다.
 
보존유적 제1646호로 지정된 안화사는 1931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대웅전과 오백전(명부전), 요사채 3동 건물과 7층 백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옛 능인전 자리에 중수됐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평방도리 위에 다포식의 3출목 공포를 이루었다. 옆의 오백전 전각이 맞배지붕을 하고 풍판을 댄 주심포 건물인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오백전은 명부전인데, 다시 복원할 때 500 나한상을 조성해 모셨다.
 
7층 석탑은 대웅전 앞 돌계단 밑의 옛 인수전 자리에 서 있다. 또 양쪽에는 50m 되는 느티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현재 안화사에는 주지 만월스님과 부전 등이 상주하고 있으며, 개성의 시민과 불자들이 즐겨 찾는 개성의 대표적인 명승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안화사는 조선의 사찰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고려 왕들이 찾았을 만큼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에 도은 이숭인이 삼봉 정도전에게 차(茶) 한 봉지와 안화사 샘물 한 병을 보내며, 그가 지은 시에는 생수를 선물로 보낼 정도였다. 이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안화사의 샘물 한 모금을 먹으러 가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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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화사 대웅전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