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0-개성특급시 사찰들

밀교신문   
입력 : 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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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라진 절을 찾다

황도의 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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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최치원은 “계림(경주)은 누런 낙엽이고, 곡령(송악)은 푸르른 소나무다”며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신라 말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려 후기에도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풍수 도참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고려사>에 수록된 왕건의 선대이야기는 풍수도참에 의한 예언으로 “도선은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추려 보고, 세조에게 삼한을 통합할 성자를 낳을 것이니 왕건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예언은 왕건이 918년 6월 15일에 고려를 건국하면서 적중했고, 도읍지 개경이 탄생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인삼, 청자, 대장경과 고려 왕조 500년의 상징이었다. 개경의 진산인 송악산은 555년부터 불렀고, 부소갑(扶蘇岬)·곡령·문숭산 등으로 불렀다. 고구려 때 ‘소나무의 으뜸 산’이란 부소갑으로, ‘열린 성’이란 뜻의 동비홀(冬比忽)이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쓰였으며, 근대까지도 부소갑이라고 쓰였다.
개국 초기에는 주로 개경이라 불렀지만, 흰 두루미 모양의 산이란 곡령은 최치원과 도선국사가 사용한 개경의 이름이었다. 송도·송경·황도·왕도·왕경 등으로 부른 고대도시이다. 1345년 원나라 <송사>에는 “개경을 촉막군(蜀莫郡), 송악산을 신숭산”이라 했다. ‘신처럼 받드는 산’과 달리 촉막군 표기는 개경의 별칭이 아니라 송악군을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는 민가보다 절이 더 많다고 했다. 16세기 말, 조선 중기의 차천로는<오산설림초고>에서 “고려 수도 개성에만 300여 곳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고 했다. 고려 말의 이색은 1352년 공민왕 원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불가의 사찰과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 서로 얽히고 섞여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고려의 불교는 산사보다도 시사(市寺), 즉 개경 도심에서 그 흥망성쇠를 가졌다.
 
태조 왕건은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면서 919년 8월을 기해 도성 안에 “법왕사(法王寺)·자운사(慈雲寺)·왕륜사(王輪寺)·내제석원(內帝釋院)·사나원(舍那院)·대선원(大禪院, 普濟寺)·신흥사(新興寺)·문수사(文殊寺)·통사(通寺)·지장사(地藏寺)’의 10대 사찰을 왕명으로 건립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전하는 기록과 함께 고려 황도의 대가람을 찾아본다.
 
서라벌의 불교, 개경에 오다
918년 다6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936년까지 호족의 통합정책과 북진·숭불정책을 추진하여 재통일을 완성했다. 태조 왕건의 사원 개창프로젝트는 후삼국의 통일정책과 병행됐다.
 
<고려사 최응열전>에 “태조가 최응에게 말하기를 ‘옛날 신라가 9층탑을 만들어 마침내 통일의 일을 이루었으니 지금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는 9층탑을 세워 그 공덕을 빌어 추한 무리를 제거하여 삼한을 합쳐 한 집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대화”에서도 불교를 기반으로 한 왕건의 통일정책을 볼 수 있다.
 
지금의 경주, 서라벌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 목탑과 개경 한복판에 세워진 대선원(보제사)의 5층 목탑은 신라와 고려 왕조의 랜드마크였다. 919년 태조의 사찰 건립은 궁궐 주변과 북쪽 송악산 기슭에다 세웠다. 절들은 황도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수도 방위의 군사적 목적과 교통 요지로서 기능을 담당했다. 나성의 축조 후에 세워진 사찰은 흥왕사·국청사·경천사·천수사 등과 함께 1283년의 묘련사와 1309년의 민천사도 나성 밖에 세워졌다. 
 
개경에는 왕과 왕비의 초상을 봉안하고 명복을 빌던 원찰의 창건이 많았다. 919년 개경에 열 곳의 사찰이 건립되면서 대흥사(921년), 광명사·일월사(922년), 외제석원·구요당·신중원·흥국사(924년), 묘지사(927년), 귀산사(929년), 안화선원(930년), 개국사(935년), 광흥사ㆍ내천왕사·현성사·미륵사(936년) 등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도까지 지속됐다.
 
<고려사>와 <고려도경>에는 51개소, 원나라의 역사서 <송사>에는 70여 사원이, 고려 말엽에는 개경에만 300여 사원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15세기까지 17곳의 절이 건재하고 19곳의 절터가 남아 있었다. 그 위치와 창건연대를 알아볼 수 있는 사찰은 34곳, 고려시대 사찰의 이름이 127개소에 이른다.
 
개성에 마지막 남은 안화사는 궁성 한복판에 가장 거대한 사찰로 919년 창건된 보제사(대선원)와 다르게 송악산의 절경과 잘 어우러지는 산지 가람형의 대사찰로 930년 가을에 창건됐다. 선종 계열의 안화사는 내제석원·외제석원·사나원·광명사·구산사·대선원(보제사) 등과 같이 선풍(禪風)의 거점이었다. 중창 때부터 예종의 진전사원으로 왕이 머물던 제궁(齊宮)이 있었는데 동서쪽으로 약 100칸, 남북 40칸 정도에 달하는 초석이 아직 남아 있다. 도성의 ‘북쪽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안화문은 안화사의 위치와 이를 연결하는 도로로써 궁성을 보호하는 군사지역으로 황실의 후원 기능을 맡았다. 12세기 초, 송나라의 서긍은 안화사를 도성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 했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워서 병풍 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극찬했다.

 
태조 왕건의 사찰들
고려 왕건은 재위 918∼943년까지 28개소의 사찰을 건립했다. 태조로부터 예종 때까지 개경의 약 23km 나성 안에는 총 70여 곳의 사찰이 건립됐다.
 
<고려사>에는 919년 개경에 자운사와 원통사를 비롯한 10대 사찰이 기록됐다. 법왕사는 이때 왕건의 명으로 건립되어 11월 개경에서 ‘팔관회’가 처음 개최되었고, 왕륜사는 919년 8월 창건되어 음력 2월 보름을 기해 고려의 ‘연등회’가 처음 열린 절이다. 1038년 2월부터 연등회는 궁성과 대봉은사(大奉恩寺) 구간에서 행해졌다. 부소동 입구 왼쪽에는 구산사 옛터가 있다. 제석원은 928년 3월 태조가 신라의 승려 홍경이 중국 후당의 민부(閩府)에서 받은 대장경을 처음 싣고 예성강 벽란도에 이르렀을 때, 왕이 친히 나아가 맞이하고 봉안한 절이지만 모두 폐사됐다.
 
용수산 대선원은 태조가 919년 8월 세웠는데, 광종 때에 보제사로 개칭됐다. “원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인데, 큰절(大寺)라 한다. 건물이 가장 크고 1천여 채(칸)나 되는데, 절 안에는 연못 세 곳과 아홉 개의 우물이 있다. 그 남쪽에 5층 탑을 세웠다”라고 권근의 <양촌집>과 <고려사>에 전한다. 원나라 간섭기인 1275년 중창할 때, “원나라로부터 복을 누린다”는 뜻의 연복사(演福寺)로 하룻밤 사이에 개칭했다. 공양왕의 명으로 1390년 1월 복원을 추진해 1392년 5월 연복사 탑이 완성되었으나, 사대부들의 상소로 중단되었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듬해인 1393년 1월 5일 낙성했다. 탑의 위층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으며, 중간층에는 대장경을 수장했다. 고려와 조선의 국책사업으로 건립된 보제사 또는 연복사는 1563년의 화재사건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 당나라처럼 넓고 큰절로서 남문네거리의 넓고 큰 다리란 이름을 붙여 광통보제사라 했다. 1123년 서긍의 <고려도경>에 “금당은 왕이 거처하는 곳보다 더 좋다. 서쪽에는 높이 200척(60m)의 5층탑이 있고, 요사채는 1백 명이 머문다.” 그때 대종은 974년 탄문대사가 조성해 궁성의 신봉루에 걸어두고 팔관회 등에 사용했다. 그 후 보제사의 범종은 1346년에 새로 조성됐는데, 무게 약 14톤이 되는 거종으로 원나라 장인들이 고려에 들어와 금강산에서 직접 주조했다. 상원사종·봉덕사종(에밀레종) 등과 함께 우리나라 5대 명종이다. 1563년 개성유수 이건의 사소한 불장난으로 말미암아 연복사가 전소되어 범종은 개성 남대문 누각으로 옮겨졌다. 국보유물 제136호인 범종은 20세기 초기까지 개성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는데, 그 종소리가 10여 리까지 퍼졌다고 한다. 1940년 초기에 서울 보신각의 종처럼 제야의 종으로 사용됐다. 6.25 전쟁 때 개성 남대문의 파괴로 인해 나뒹굴기도 했으며, 기관총탄을 28군데나 맞아 흠집이 난 생채기를 안고 있다. 국보유적 제124호 남대문은 1394년에 완공되어 보수를 거쳐 1900년에 크게 개수했다. 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5년 다시 복구하고, 석봉 한호의 글씨인 편액을 걸어 놓았다.
 
922년에 창건된 광명사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활약하던 때에 담선법회가 열린 곳이다. 바로 옆에는 일월사가 자리했다. ‘왕도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었던 개국사는 935년 태조가 창건한 이래로 고려의 철인들이 매일 정해진 때에 맞춰 앞 네거리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공유했다. 비보풍수로 세워진 개국사는 현종 9년에 탑을 중수해 불사리를 봉납하고, 계단을 창설하여 3,200명의 승려를 도제했다. 문종은 송나라 대장경을 이운·봉안했다. 924년 창건된 흥국사에는 귀주대첩의 총사령관 강감찬을 기념하는 공양탑을 세우고 돌기단에 원문(願文)을 새겼다. 중국 이외의 조하(朝賀)를 이곳에서 받았다. 광종은 951년에 부왕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와 모후인 태조비 신명왕후의 원찰 불일사를 창건했다. 오늘날 폐사된 여러 사찰의 문화재는 1991년부터 개성박물관(고려성균관)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의 원찰들
1020년 8월, 현종은 부왕과 모후를 위해 영취산 현화사를 개창했다. 1011년 2월 보름 청주 행궁에서 조성 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조대장경>은 1022년 10월 현화사에서 판각기념 경축행사가 처음 봉행됐다. 대장경의 조성 기문은 문화시랑 평장사 강감찬이 처음으로 지었다. 1056~1068년까지 12년간에 걸쳐 2,800칸을 건설한 고려 최대의 절 흥왕사는 문종 자신의 원찰로 창건됐다. ‘지식정보의 위대한 혁명가’ 의천대사가 1086년 이곳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세계 최초의 대장경 주석서인 <고려교장>을 완성하고, 1101년 10월 5일 개경 총지사에서 입적했다. 숙종 때에는 대각국사의 <교장>을 간행한 홍교원이 다시 160칸으로 중창되었다. 고려인으로서 원나라에 가 있던 신당주의 노력으로 원나라 기황후로부터 후원을 받아 금강산과 개경의 경천사 등 많은 절의 중수가 추진됐다.
 
천 년 전, 송나라의 학자 서긍이 본 개경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으로, 왕궁에 필적할 규모의 사찰도 10곳이 넘었다. 영남 사림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은 1478년 <유송도록> 발문에서 “쌓은 것은 5백 년을 쌓아도 부족하였고, 허무는 것은 하루 만에 헐고 남음이 있었다”고 고려 왕조의 도읍지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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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