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1-개성특급시 관음사 (상)

밀교신문   
입력 :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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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삼절, 피항처를 가다

개성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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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500명의 남측 관광객은 2005년 8월 26일 개성을 처음 찾았다.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지나 고려 오백 년 도읍지의 문화유적인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고려박물관(성균관), 왕건릉, 공민왕릉 등을 관람하는 시범관광은 당일 코스로 3회에 걸쳐 진행됐다. 2007년 11월부터 관광 시작 1년 만에 11만2천 명이 개성을 갔다. 개성관광은 동해의 금강산과 함께 남북문화교류의 장이었으나, 2008년 11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중단되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개성까지는 약 65km이지만, 입경 절차 등으로 인해 도라산 남북출입국사무소(CIQ)를 거쳐 개성 시내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린다. 개성에 갈 때 ‘이것’만은 꼭 챙겨야 하는 것은 첫째,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인데, 발급받은 ‘개성관광증’은 현지에서 신분증을 대신한다. 이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게 된다. 둘째, 화폐는 달러와 유로화만을 사용한다. 셋째, 반입금지 물품은 필름 카메라와 초점거리 160mm 이상 렌즈, 휴대폰(배터리 포함), GPS, 내비게이션, 녹음기를 가지고 갈 수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휴대폰을 가지고 갈 수 없는 나라다. 넷째, 주의사항으로 개성관광 중에는 버스 이동 중에나 관광지 이외에 대한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남측에 경주와 공주가 있다면, 북측에는 개성을 천년의 고도로 꼽는다. 중세 고대도시 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개성시 인민위원회와 관광총회사에서 나온 사람이 안내를 맡고, 박연폭포가 가장 먼저 내방객을 맞이할 것이다.
 
개성관광의 백미, 박연폭포
개성 시내에서 박연폭포까지 20㎞인데, 비포장길로 30분 남짓 소요된다. 개성 외곽의 고갯길에 다다르면 개성을 둘러싼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만삭이 된 여인이 두 팔 벌려 개성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다. 개성 시민들이 송악산을 ‘어머니산’이라 부르는 이유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기 위해 고려 왕조에 정기를 불어넣어 주던 송악산의 여신을 임신시켰다는 억지 설화도 생겨났다.
 
개성시를 벗어나면 길도 제법 험하고 좌우로 휘어지는 모양새가 강원도 대관령의 옛길과 비슷하다. 성거산에서 발원하여 저탄강으로 흘러드는 오조천의 상류지점에 박연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아흔아홉 굽이를 돈다’는 아호비령의 산줄기로 이어진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박연폭포와 몇 곳의 구담과 용담이 있어 예로부터 ‘송도의 금강’ 또는 소금강이라 불리고, 또 크낙새 보호구역으로 유명하다.
 
국가천연기념물 제388호 박연폭포는 일명 ‘산성폭포’라 하는데, 송도팔경의 한 곳으로 높이는 37m, 너비가 1.5m에 이른다.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한국 3대 명폭이다. 개성관광은 단연코 박연폭포다.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보러 가는 관광의 첫 코스이다. 붕어빵에 단팥이 없으면 그렇듯이 개성에 박연이 없으면 핵심 포인트가 사라진 꼴이다.
 
천마산과 성거산이 마치 창과 칼을 빼 들고 서로 자랑이라도 하듯이 깊은 골짜기를 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천 길 높이로 솟아 박연폭포를 이루었다. 박연(朴淵)에 대한 두 가지 어원은 첫째, 박진사가 용녀를 따라 용궁에 다녀온 일화가 있어서 박연인데, 고모담에 의한 이름이다. 둘째는 바가지 모양을 한 연못이라 하여 박연으로 불린 것인데, 폭포 위의 연못에 따른 이름이다. 또 ‘바가지와 같이 생긴 연못에서 떨어지는 폭포’라고 하여 박연폭포라고 불렀다는 설이 더 회자되었다. 이 박연은 둘레 24m에 직경 8m와 깊이 5m 정도의 선바위가 있는데, 장마에 큰물이 흐를 때면 수백 명의 범패승이 염불하듯 ‘어산소리’가 산천을 뒤흔든다고 한다. 지금은 계곡 암사가 꽉 채워져서 그 소리는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폭포 아래쪽에는 둘레 120m에 직경 40m의 커다란 물웅덩이인 고모담이 위치한다. 이 용담에는 높이 4m에 길이 8.4m, 너비 5.5m의 용바위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42호이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설과 신화를 낳았다.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의 부적 전설과 <세종실록지리지> ‘박연’에는 “용녀가 자기 남편을 죽이고 박 진사를 남편으로 맞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구전되고 있는 박연폭포 전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명필 한석봉이 박연폭포 이무기로부터 얻은 붓으로 신필이 되었다는 전설 등 이에 관련한 야담들이 널리 전파되었다.
 
폭포수로 만들어진 고모담의 계곡물은 “폭포가 쏟아지는 것이 마치 뗏목이 급류를 타고 흘러내려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의 범사정이 있는 바위 아래로 감돌아 오조천으로 들어간다. 박연의 이런 풍광들은 겸재 정선의 명작인 <박연폭포>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면, 조선시대 속에 첨벙 빠져드는 글이 함께 있어 폭포의 웅장한 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표암 강세황이 투시법으로 그린 <송도기행첩>에는 폭포의 수직성을 강조하여 강렬하고 과장된 느낌을 주는 겸재의 그림과 달리, 폭포 주변의 풍경을 깔끔한 화필로 담당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박연폭포, 송도삼절의 탄생지
일명 ‘성산폭포’라 불리는 박연폭포는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은 명소이다. 13세기 고려 이규보는 ‘박연에 쓰다’ 시에 “용왕 딸이 피리 소리에 홀려 박 선생께 시집갔다”라는 내용과 고려의 이제현은 ‘박연폭포’ 시에서 “흰 비단이 천자나 날아오르고, 청동 같은 절벽은 만 발이나 내려가 있다”라고 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용궁부연록’에서 박연폭포를 ‘표연(瓢淵)’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군신을 막론하고 일반 백성까지도 박연폭포에 대한 전설을 하나씩 가지고 만들어냈다고 한다.
 
박연폭포를 대표하는 예인은 바로 황진이다. 16세기 초, 개성 기녀의 신분이던 황진이의 말에서 ‘송도의 세 가지 유명한 존재’란 뜻으로 ‘송도삼절’이 유래한 것이 사실이다. 이수광의<지봉유설>과 이덕무의<청장관전서>에서도 그녀가 말하기를 “화담 선생 및 박연폭포가 나와 함께 송도의 삼절(三絶)”이라고 했다. 근대 시인 김억은 <옥잠화>에서 황진이를 천재로 평하고,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 적었다.
 
그런데 ‘송도삼절’이라 처음 쓴 사람은 허균이다. 교산은 1611년에 지은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에 “송도삼절은 진이가 어느 날 화담에게 한 말이다. ‘선생님, 송도에는 절미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의 대답”까지 인용하고, 그녀에 대해 기록했다. 황진이의 실체 자체는 분명하지만, 그 활약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구전되고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원래 송도의 삼절은 허목의<기언별집> 등 여러 기록에서와 같이 한석봉의 글씨,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흔히 송도삼절은 절승(絶勝)의 박연폭포, 절윤(絶倫)의 서경덕 그리고 절색(絶色)의 황진이를 가리킨다. 조선 최고의 명기임을 자칭했던 황진이는 16세기 초, 박연폭포의 용바위 위에다가 “물줄기 내리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라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서 초서체로 휘갈겨 쓴 글씨를 남겼다. 이 새김 글자는 당나라 때 이백이 지은 <여산폭포를 바라보며>란 한시의 두 절구를 인용해서 박연을 찬미한 것이다. 이 글씨의 왼편 위쪽에는 그 후, 누군가 네모나게 감실을 만들어 총 28자의 한시를 새겨 황진이와 박연폭포를 다시금 예찬해 놓았다. 이때의 새김 글귀로 말미암아 송도삼절은 박연폭포에서 탄생한 셈이 된다.
 
“여산의 진면모가 여기에 그림처럼 펼쳐졌구나.(廬山眞面畵中開)/옛날부터 유람객이 얼마나 많이 왕래하였으랴.(自古遊人幾往來)/기이한 이 절경을 보기 위해서이다.(欲識此間寄絶處)/이백의 시와 황진이의 필체 둘 다 뛰어난 재주로구나.(白詩黃筆兩雄才)”
 
윗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경진년 9월 일 이산(怡山)’이란 글이 덧붙여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산’이란 이름이 누구인지 명확지 않고 아직도 불분명하다. 이 글귀는 교산 허균이 1580년 11월 너럭바위에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박연을 찾아온 허균은 ‘너무 기뻐서 자신이 쓴다’는 의미로 이산이란 한 번밖에 쓰지 않은 이명(異名)을 새긴 것
이다. 황진이가 바위에 쓴 한시는 박연을 더 박연답게 만든 문화유산이다.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한 치 깊이의 글자를 새긴 황진이의 초서체는 무협지에 나오는 절정고수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양반들은 박연 곳곳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 자연을 훼손시키고, 시대를 넘어 흉물스런 방명록처럼 쓰여 있다.
 
관음사, 송도삼절의 피항처
16세기 중엽, 황진이는 천마와 성거산이 조화롭게 만든 박연폭포를 찾아와서 박연을 해동의 으뜸 명승지로 소개했다.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야담과 설화를 인용하거나 지어낸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플라토닉 러브스토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일의 기록과 다름없는 러브스토리를 엮어낸 곳이다. 박연에 의한, 박연을 위한 황진이의 예경은 800m 떨어진 천마산 관음사에서 승화되었다. 관음사는 천마산의 비경, 박연폭포에서 행해진 낭만과 휴식 그다음에 오는 공허함을 채우고 힐링하기 위한 피항처(避港處)로 개경을 대표하는 명소였다. 절로 가는 길에는 관음사의 창건 연기설화로서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한 두 수행자의 석불상을 만났고, 관음 석굴에 모신 백의관음보살 두 분을 친견하며, 대웅전 문살에 그저 문양만으로 남은 관음보살의 화현인 운나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아미타불께 안녕과 소원을 빌며 살았다.
 
비록 화담과 명월은 모두 사라졌지만, 박연 골짜기 속에 기묘한 수석들은 오늘도 내일도 자신을 감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날이 저물어져서 도로 구경을 못 한 옛 선인들의 회한도, 개성에서 60km 구간에 펼쳐진 무채색의 반쪽 풍경화는 분단의 또 다른 상징이지만, 기억 속에 남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낡은 그림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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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박연폭포 전경(사진 : 도라산 남측CIQ 홍보판)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