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2 _ 개성특급시 관음사(하)

밀교신문   
입력 :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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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관음신앙의 성지

천마산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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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6세기 초, 백제의 승려 발정대사 등에 의해 전래한 이후, 6세기 말에 전국적으로 퍼졌다.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고, 7세기 초기에 조성된 백제의 관음보살상은 현재까지 여러 기가 전한다. 이보다 앞선 419년 중국 동진 시대의 역경승 축난제가 번역한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이 전해면서부터 널리 퍼졌다.
 
751년부터 20년간 조성된 경주 석굴암의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중국 북주시대의 역경승 야사굴다가 6세기에 한역한 ‘십일면관세음신주경’을 근거로 관음보살 조상이 유행한 대표적 사례다. 당나라 때 아지구다가 654년에 번역한 ‘불설다라니집경’에 근거하여 버들가지를 든 관세음보살인 양류관음 즉, 수월관음을 비롯해 백의관음이 등장하는
등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고려 충숙왕 때의 왕사 요원이 1331년 저술한 ‘법화영험전’과 같이 당시에 관음신앙이 생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생과 치유의 의미는 물론이고, 감로수가 담긴 정병과 보병에 꽂힌 버들가지는 실바람에 나부끼듯 작은 소원에도 귀 기울여 듣는 관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하게 됐다.
 
이러한 관음보살 성지의 한 곳이 개성 관음사이다. 관세음보살이 출현하였거나 기적을 베풀었거나 하는 것과 같이 고려의 관음신앙이 활발하게 펼쳐진 곳으로 불교도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이르기까지 현세적인 구세주로 관음상을 만들고 봉안했기 때문이다.
 
개경의 관음도량, 관음굴
관음사는 천마산 청량봉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박연폭포 범사정에서 바위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상박연과 길섶 바위마다 새긴 수많은 암각자의 이름을 보면서 1km 정도 더 올라가게 되면 관음사에 다다른다.
 
해방 전까지 민가와 콩밭이였던 관음사 주차장에서 호젓한 돌계단으로 오르는 것이 손수레 길보다 더 운치가 있다. 절 입구의 큰 너럭바위 위에 돌거북을 탄 <관음사사적비>가 지붕돌을 덮고 서 있으며, 성지를 지키는 장승처럼 천연기념물 제532호 은행나무가 서 있어 이곳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관음사 경내에는 대웅전, 승방 등 두 채의 건물과 칠층석탑·관음·대형 석조 1기가 남아 있으며, 입구 쪽에는 주지 청맥 스님 등이 주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개성특별시 박연리에 자리하고 있는 관음사는 970년 창건되기 전부터 있었던 자연동굴에다 926년 탄문대사가 한 쌍의 관음성상을 봉안하면서 개창됐다.
 
‘고려사’에는 1280년 1월 왕과 공주가 행했고, 1348년 11월 천마산 박연에서 수륙회를 열고, 이후 관음사를 보수했다. ‘고려사’에는 1382년 4월 박연과 개성의 큰 우물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말 선초의 권근은 “관음굴은 천마산에 있는데, 지세가 좁고 비탈지며 법당도 누추하고 찌그러져서, 일찍이 잠저에 있을 때 가 보고 원찰을 삼고자 중건하였다. 돌을 쌓아 터를 넓히고 들보와 기둥을 세워 그 집을 새롭게 하였더니, 부처님의 도우시는 힘을 입고 드디어 신민의 추대를 받았다”라고 중창 내용을 기록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83년 관음굴을 중건했는데, ‘태조실록’에는 1394년 관음굴에 직접 거둥해서 수륙제를 열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건연대가 처음 등장한다.
 
“이곡의 기문의 대략에, …관음굴은 박연 상류에 있다. 절 뒤에 바위 구멍이 집처럼 된 것이 있고, 그 안에 관음불 두 석상이 있으므로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고려 광종이 처음으로 그 곁에 집을 지었는데, 우리 태조가 잠저 때에 중건하였으며, 목은이 기문을 지었다”라고 했다.
 
관음사는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원찰이었다. 고려의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은 탄문·찬유·개청 등 승려를 등용했다. 왕건은 탄문대사를 계행이 매우 높은 스님이라 하여 별화상(別和尙)으로 칭했고, 또 구룡사에서 ‘화엄경’을 법문할 때, “새가 날아들고 호랑이가 뜰에 와서 엎드리는 일이 있었다”라고 하여 별대덕(別大德)이라 불렸다.
 
특히, 왕후 유씨가 926년에 잉태하자 왕명을 받고 관음굴에서 기도를 하니 그의 법력을 빌려 왕자(광종)를 낳았다고 예우받았을 뿐 아니라 968년 왕사에 책봉됐다. 그때 탄문대사가 2기의 관음보살상을 안치하고, 아이를 점지하고 낳고 기르는 것을 돕는 삼신할미와 같은 자모 관음기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970년 개창된 관음사는 천마산과 성거산이 만든 절이면서도, 또 상박과 하박의 박연이 천수관음의 모습처럼 매일 나타나는 거울 같은 가람이다.
 
1574년 허봉은 ‘연행록선집’에 “박연은 동구에서 보면, 흰 명주 한 폭이 푸른 수풀 밖으로 은은히 나온다”고 했을 정도다. 즉, 태초의 공간에 들어가 있는 관음사는 그야말로 투트렉(two track)의 스토리를 품은 절이다.
 
1689년 허목은‘미수기언’에서 “박연은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 있는데, 큰 폭포이다. 하연(下淵)이 하나 있는데, 물이 마르면 희생과 폐백을 쓴다. ‘오행지’에 이르기를 “1293년 겨울에 박연이 고갈되었다”라고 했다. 지금은 용사(龍祠) 아래에 태종대가 있다. 박연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제석산 밑을 지나 오조천이 된다”면서 박연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 놓았다.
 
관음사의 창건 연기설화에는 두 명의 수행자가 등장한다. 조선 전기의 채수가 쓴 ‘유송도록’에는 “박연에서 수십 보를 올라가니 돌부처 둘이 바위 구멍에 앉아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달달박박(怛怛朴朴)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노힐부득(弩肹夫得)이다. 관음사에 당도하니, 이 절은 곧 우리 태조 잠저 시절의 원찰인데, 목은이 기(記)를 지었다. 절 뒤에 굴이 있어 깊고 넓으며, 그 속에 석대사가 있는 고로 이름이 된 것이다. 골짜기 속에는 수석이 기절한데 날이 저물어져서 두루 구경을 못했다. 절 앞에는 반석이 있어 앉을 만하고 흐르는 물이 돌아서 돌을 부딪치어 소리가 요란하다”라고 했다.
 
신라 성덕왕 때 염불승이던 달달박박은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참선 수행하던 노힐부득은 관음보살의 화신 변재천녀의 도움으로 아미타불(박박)과 미륵불(부득)로 성불했다는 전설은 1285년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탑상>에 전한다. 경남 창원 백월산의 전설이 개성 천마산 박연에까지 깃든 것은 박연 위쪽에 자리하는 관음사의 창건 연기설화에 의한 것으로 북녘땅, 최고의 관음 성지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음사, 개성에 남은 천년고찰
절 입구의 너럭바위에 올라간 돌거북 등에 세워진 ‘관음사사적비’와 1797년에 쓰인 ‘관음사중건기’에는 탄문대사가 관음성상을 이곳에 모신 지 44년 후, 970년 고려 광종 21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자연의 박연폭포와 사람이 사는 관음사는 고려 때 왕사와 국사를 지낸 탄문대사의 후광에 힘입어 유명해진 사찰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박연폭포와 함께 단짝으로 소개되고 있다.
 
국보유적 제142호 관음사 대웅전은 ‘고려사’에는 1348년 11월 이후 다시 보수했다. 권근이 지은 <관음굴을 낙성하고 경찬하여 화엄경 법회를 하는 소>에 의하면 1383년 당시 도원수였던 이성계가 대웅전과 관음전, 승방 5채의 건물로 중건하고, 그 곁에 저택도 지었다고 한다. 또 ‘관음사중건기’에는 1393년에 크게 확장하고 수륙재를 열었으며, 조선 정종은 즉위하여 능엄법회를 열었다. 태종은 1400년 이 절에서 ‘국행수륙재’를 열었고, 선종계열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밭 2백 50결을 받았다.
 
1477년 산사태로 무너지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건물은 1646년에 승려 정명이 세 번째 중창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1797년에 승려 성훈이 중수한 건물이다. 이런 내용은 1824년 ‘중경지’에 그대로 기록됐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도 주지 이근식이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하였으며, 2018년 3월에는 독일대사관의 지원 협조로 대웅전 등을 대거 보수했다.
 
현재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극히 보기 드문 예이다. 아미타불 좌상과 입상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불단에 모시고, 그 위에는 마치 2층의 누각을 세운 것과 같은 중층 닫집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는 짧게 하면서도 마루들과 지붕면, 처마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휘임을 주어 건물에 잘 어울리며 장중한 느낌을 준다. 1930년대 말 대웅전 내부와 지붕 보수를 할 적에 지붕 앞쪽의 가운데 중간쯤에 파란 기와 한 장을 얻어 놓았는데, 이 기와가 천하제일 색으로 유명한 ‘고려 청기와’를 사용한 것이다.
 
대웅전의 정면과 후면의 창호는 꽃살문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4종류의 꽃살 창을 달았다. 특히 뒤쪽 문의 창호는 화병에 담긴 연꽃 문양과 왼손이 잘린 운나(雲那)의 모습을 통판에 새긴 수법이 매우 뛰어나지만, 미완성품으로 슬픈 전설이 전한다.
 
관음사 승방은 정자각 형태의 큰방(大房)으로 정면 4칸,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의 집이다. 보존유적 제540호 7층 석탑은 1349년에 건립된 후, 1660년 조선 현종 원년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높이 4.77m에 이른다,
 
국보유물 제154호 관음사 관음보살상은 10세기 조성설과 1125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120cm 크기로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달개와 법의 등 옷 주름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얀 대리석으로 조성된 관음보살상은 원래 한 쌍인데,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드리운 보살상과 두 손을 다 무릎 위에 드리우고 있는 보살상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현재의 관음굴에 그대로 있는 반면, 후자는 1992년 개성 고려박물관으로 갔다가 1995년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2006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왕건상과 함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나들이 한 바 있다.
 
관음굴 앞에는 1m 크기의 정사각형에 문양을 새긴 하마석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그 옆에 유명한 우물인 관음 약수는 “한 번 먹으면 10년 젊어지고, 두 번 먹으면 또 10년이 젊어지는데, 욕심을 부려 세 번 먹으면 원래대로 된다”고 전한다. 1940년 사진에도 등장하는 큰 돌확(石槽)은 그 쓰임새를 잃고 돌담의 위에 놓여 있다. 또 관음사 건너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운흥사 터와 그곳에는 2003년 다시 세상에 알려진 성거산 마애불이 있다.
 
이처럼 개성 관음사는 미타 미륵신앙의 창건설화가 탄생한 중심 무대로, 관음보살상과 함께 ‘미륵상·하생경’에서 그리고 있는 미륵용화 세상을 나타낸 불국토의 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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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관음사와 7층 석탑<현대아산 제공>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