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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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당대종사의 수행과 진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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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의 인연 계기
대종사는 1902년 평범한 유교 가문의 장남으로 울릉도에서 탄생하였다. 한방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 손원섭(孫允燮·1884~1927)와 어진 성품의 어머니 김양삼(金良三·1883~1949) 사이의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월성 손 씨 21세손이며, 선조는 경주에서 상주, 순흥(順興·안동), 영천, 군위 등을 거처 영일 계전에 정착하였다. 그 후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근대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민간인의 거주를 허용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사람들이 왕래하고 거주하여 나라에서 순찰하고 관리해 왔다. 그리고 1882년 울릉도를 주람순찰(周覽巡察)한 보고서는 함흥사람 사인(士人) 김석규(金錫奎) 등 한국인 14명, 일본인 78명의 거주를 밝혔다. 그 보고에 의해 나라에서 민간인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키는 개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고종 20(1883)년 본격적인 개척사업을 추진하여 4척의 배에 모집 민간인 16가구 54명과 식량과 종자 등을 싣고 울릉도에 이주 정착시켰다. 그때부터 중앙정부는 울릉도를 다스리는 정식관리를 임명하여 관리했다. 그리고 일본인의 퇴거를 명령하였다. 울릉도의 근대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대종사의 증조부 수호(洙浩·1831~1889) 사망은 1889년이고, 조부 병수(秉秀·1859~1937)의 탄생은 1859년인 것을 감안하면 울릉도에 이주는 조부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확한 연대는 1883년에서 대종사의 탄생(1902) 전 해인 1901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식적인 개척정책 이후 울릉도의 생활여건과 별다른 이주 모집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1883년 개척선을 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1890년과 1892년에 도민에 대한 구휼활동이 있었고, 1894년에는 흉년에 의하여 도민이 도탄에 빠진 사실을 볼 수 있다. 부친(윤섭)의 탄생이 1884년이나 출생지가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울릉도 이주 시기는 추정할 수 없다. 대종사의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한 이유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집안이 울릉도로 이주한 시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일본이 조선 통치 야욕을 노골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개화의 새 기운이 무르익던 때였다. 당시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주민들의 생존이 힘들었다. 대종사의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한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한 출세간적 연기적인 의미는 대종사 탄생의 인연 계기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대종사는 아침마다 가장 먼저 온몸을 밝히는 울릉도 성인봉(聖人峰)과 기연을 맺었으며, 불기 2446(1902)년 5월 10일 푸른 바다가 내려 보이는 산기슭 언덕진 곳, 지금은 금강원(金剛園)이라 부르는 사동(沙洞) 중령(中領) 외가에서 육신을 나투었다.
 
진각성존의 탄생은 곧 대일여래의 광명을 받아 중생의 심전을 밝히는 대종사의 한 생애를 예고한 것이다. 항시 동해의 서광을 가장 먼저 몸에 두르는 성인봉의 명칭은 미래 성인의 탄생을 짐짓 지시한 예언적 이름이 되었다.
 
2) 향학의 의지와 세상 경험
 
(1) 서당에 공부하다
대종사의 청년기까지 이름은 덕상(德祥)이었다. 울릉도라는 자연환경이 소년기의 정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울릉도를 감싸고 있는 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성인봉은 생득적 순수성과 총명에 사색의 동기와 환경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에 만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평선은 동경심의 대상이 되었다. 수평선 넘어 펴져 있을 비밀의 세계는 사색의 동인이 되었다. 대종사는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그러면서 엄격한 가풍의 집안에서 자랐다. 자상한 조부, 한의술에 조예가 깊은 부친, 그리고 엄한 시어머니인 조모, 순종하고 슬기로우면서 불심이 돈독한 모친 슬하의 2남 3녀의 장남으로서 성장하였다. 매사에 의욕과 의지력이 강하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효순심이 강하였다. 모친은 월성 김  씨(양삼) 가문의 출신으로 매우 자애롭고 사려가 깊었다. 외가가 언제부터 울릉도에 거주하였는지 모른다. 외조부(김병두)가 울릉도에 거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호적도 찾을 수 없다.
 
모친은 지중한 인연으로 대종사를 출산하고 열반에 들 때(1949년 8월 9일)까지 뒷바라지하였다. 대종사의 삶에는 모친의 정성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대종사의 가문은 선대부터 소문난 한의(韓醫)의 집안이었다. 부친도 한의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학문의 깊이도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조부도 주위의 병고를 많이 돌보았다. 그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한의에 대한 관심이 많고 식견도 깊었다.
 
울릉도에는 개척 이전까지 교육이 없었다. 개척 후 육지에서 글을 읽던 사람들이 서당을 열거나 필요에 따라서 훈장을 육지에서 초빙하거나 하였다. 나리서당(羅里書堂), 중저서당(中苧書堂) 등 13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제 강점기에 폐쇄당했다. 사동서당(沙洞書堂)은 사동 1리의 옥류재(玉流齋)라는 재실(齋室)에서 시작하였다. 김광호(金光鎬)가 훈장을 맡았다. 그리고 사동 2리 옥천에 옥천서당이 있었다. 박시현이 훈장이었으며, 박시현은 북면 석포에서 서당을 차려 훈장으로 있다가 옥천으로 이주하면서 옥천서당을 설립하였다. 김광호 훈장이 옥류동에서 이주하자, 사동서당은 사동 삼리(간령)로 옮겨 간령서당(簡嶺書堂)이 되었다. 그리고 사동서당은 폐쇄되고 지금은 옥류재 터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7세 때에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렇다면 대종사가 들어간 서당은 사동서당으로 보인다. 부친의 밑에서 천자문 등을 공부하고 7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훈장 김광호가 1910년 11월 18일 도동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렇다면 사동서당의 김광호 훈장 밑에서 3년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김광호 훈장은 울릉도에 들어오기 전에 육지에서 감찰 벼슬을 하였다고 하여 세칭 김 감찰로 통하였으며 울릉도 교육공로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대종사의 총명은 서당에서 나타났다. 지금 대종사가 10세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미완성의 한시(漢詩) 시구(詩句)가 남아 있다.
그 시구는 “마음하나 천만을 당적하고(心一當千萬)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質白畵丹靑)”라는 이구(二句)로서 미완성의 오언시(五言詩)이다.
 
한시는 보통 절구(絶句), 율시(律詩), 배율(排律) 등의 형식이 있다. 오언 시구는 어떤 형식의 일부인지 모른다. 본래 미완성의 시구인지, 아니면 일부의 시구가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10세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본래부터 미완의 시구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구는 대종사의 삶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이 시구가 본래 시의 전반부인지 후반부인지는 모른다. 마치 설산동자가 무상게(無常偈)를 들을 때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어린 대종사의 총명에 바다와 하늘이 감싸고 투영되어서 마치 명경(明鏡)같은 광경이 눈앞에 어린다. 세상만사를 품안에 안고 있는 저 푸른 바다, 온갖 모양을 다 그리고 싶은 청명한 하늘, 그것은 비단 바다와 창공이 아니라 맑고 티 없는 자신의 순수 속에서 투영되어 나온 영감이고, 심비(深秘)일 수도 있다. 여기서 대종사의 생득적 순수성과 총명을 볼 수 있다. 이미 이 시구는 대종사의 앞길을 예견하고 있다. 수평선은 있기는 있지만, 그 지점은 없다. 수평선은 있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서 그 위치가 변한다. 울릉도는 수평선에서 나타났다가, 수평선에서 사라져 버린다. 울릉도는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수평선만은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은 수평선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 수평선은 잡을 수가 없다. 대종사의 총명한 마음은 이 수평선의 비밀을 찾아 길 없는 여행, 사색의 여로를 넘나들면서 수평선의 비밀을 이와 같은 시구로 읊었다. 마음하나[心一]의 경지, 이는 곧 수평선의 경지이다. 거기서 만상이 나투고 사라지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곳, 그 경지, 그것이 무엇인가. 공(空)이라 할까, 진실(眞實)이라 할까, 심(心)이라 할까. 무엇이라 하여도 그것은 그렇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눈앞에 전개하고 있는 세계, 이 신비한 우주 세계의 비밀스러운 경지가 대종사의 마음을 통과하여 마음하나[心一]라는 말로 흘러나온 것이다. 이 시구 중의 ‘하나’는 지식에 대한 지혜의 경지를 가리키며, 이 지혜의 경지는 안[內]의 경지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아가 이 지혜의 경지는 밖에 나타난 현상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물질세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생명의 세계를 보는 경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혜안(慧眼)에 비친 경지는 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생명적 교감을 나누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 하나의 생명적 흐름, 여기서 뭇 상대적 현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바탕, 이를 마음하나[心一]라고 나타내고 있다. 말이 궁하여 마음[心]이지만, 심(心)은 본래 너와 나의 상대적 마음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주 법계에 보편적으로 흐르고 있는 의식, 즉 생명성이라 보아도 된다.
 
“의식의 흐름이 세계다”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말하면 “생명의 흐름이 이 법계다.” 그래서 이 뭇 생명의 원천이요 근원인 이 전일생명(全一 生命)의 경지를 부처님의 세계라 보고, 후에 ‘하나부처님’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부처)님’이다. 여기서 대종사의 마음하나[心一]의 사색은 종교적 세계를 펼쳐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종사의 사고 바탕에는 ‘밝게 사는 원리’가 깔려 있었다. 이것은 ‘금강정경’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어두운 눈으로 보면 어둡게 보이지만 밝은 눈으로 보면 모두가 밝게 보인다. 진각행자가 늘 예참하는 ‘삼십칠존의 세계’는 밝은 사회건설의 틀을 보여 준다. 그러나 대종사는 이를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철학적 이론적인 언어를 빌려 대종사의 말씀을 조감하여 보면 “마음하나 천 만을 당적한다”는 실상(實相) 반야적[空]인 면을 암시하고, ‘대일경’적인 본유(本有)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연기(緣起) 유식유가적(唯識瑜伽的)인 면을 암시하고 ‘금강정경’적인 수생(修生)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본유와 수생은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불이(不二)이며, 하나로 통일된다. 이것이 진실의 경지를 실제로 체감하는 실천의 길이다. 이 시구가 머금고 있는 경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대종사의 심경에 싹트고 있었다. 소년 덕상의 마음은 이처럼 우주 진실의 경지를 향하여 사색의 나래를 젓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 덕상에게는 배움이 더 절실하였다.
 
경정 총인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