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3 _ 개성특급시 대흥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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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세시풍속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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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사람들은 자신들을 ‘개경사람’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애향심이 강한 개경사람들은 3월과 10월 세시풍습으로 대흥산성의 돌기를 즐기고 염원했다. 대흥산성을 오르는 ‘순성(巡城)놀이’는 개경사람들이 철쭉이 피는 봄에, 가을에는 단풍 들머리쯤 천마산에 올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놀이다. 나이든 할머니들도 평생에 한 번은 천마산 대흥산성을 타고 박연폭포까지는 걸어서 갔다 와야 할 것으로 알고, 그래야만 저승에서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북성지(北城址) 돌이’라고 하는데, 개성에서는 ‘북성기’라고 부른다.
 
이 북성기는 “한번 가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번 가면 무병장수하고, 세 번 가면 극락에 간다”라는 답성놀이 또는 성밟기인 북성기를 한번 하고 나면, 그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으로 그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다시한번 기어이 돌아보고 싶게 한다. 그러므로 대게 두 번은 돌게 된다. 그러나 북성기 돌이는 “한 번을 돌든지 그렇지 않으면 세 번을 돌아야 한다는 것이 개성의 풍습이다. 해로한 노인들이 손을 잡고 서로 밀고 끌면서, 이 험준한 코스를 극락 가는 정성으로 탐방한다. 젊은이들은 두 밤 자고 사흘에 돌아오고, 노인들은 서너 밤을 자고 4~5일 만에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근현대 수필가 류달영의 ‘황무지 공원에서’ <민중의 산 천마산>편에 전한다.
전북의 고창읍성을 비롯한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으로 대표되는 성벽 밟기와 같이 개성의 민속놀이에는 대흥산성과 대흥사를 중심으로 하는 북성돌기라는 북성기 놀이가 있다. 이 돌기는 성벽을 튼튼하게 유지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성 밟기로, 임진왜란 이후에 개성의 민중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세시풍속이다.
북성기 돌기의 하이라이트
 
개성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한번은 해야 하는 일로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 북성기 돌기를 꼽는다. 추수한 다음에 주로 하는 북성기 돌이 코스는 장단 화장사에서 대흥산성 성벽을 걸어서 대흥사에 도착하는 순환코스이다. 대흥산성 성곽을 하루 만에 걸어서 마치는 일정과 네 닷새 동안 하는 코스가 있다.
 
개성에서 35리쯤 되는 경기도 장단의 보봉산 화장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음 날 시작하는 경우와 20리쯤 되는 황북 장풍군 성거산의 원통사에서 출발하는데, 천연의 요새라 불리는 대흥산성 성벽에 올라 산성의 북문 성거루(聖居樓)까지 도착하는 코스를 말한다. 코스별로 6~7리쯤 지나면 깎아 잘린 절벽 위로 연속된 성터를 타고 북쪽 성곽으로 걸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무자긴드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눈 아래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춤추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등 누구나 감흥을 탄다고 한다.
 
919년 태조 왕건이 건립한 원통사에서부터 대흥산성의 옛터에 이르는 북성기 코스는 실로 아슬아슬한 위험한 곳들이 허다하다. 반드시 바위를 등에 지고 내려가야만 하는 지돌이, 바위를 단단히 껴안고 돌아야만 하는 높은 절벽의 안돌이, 허공에 솔밭처럼 솟은 세 개의 바위머리를 딛고 건너뛰는 노기거리, 수십 길 깊게 쪼개진 바위를 껑충 뛰어 건너야 하는 주춤 바위, 여자의 치마 입은 허리처럼 턱이 진 곳으로 줄 타듯 밟고 도는 치마바위, 이렇게 아슬아슬한 험로를 거치고 나서 비로소 다리를 뻗고, 땀을 씻고, 숨을 돌릴 수 있는 마당바위, 깊이 쪼개진 바위틈이 유일한 통로가 되어 몸을 옆으로 하고 빠져나가야 하는 짬바위, 누구를 막론하고 앉아서 주춤거리지 않고서는 내려갈 수 없는 은바위 등 거듭하는 전율을 느끼면서 성벽로 올라서게 된다.
 
경기민요 <개성난봉가>에서도 “안도리 지도리 돌고 돌아 차일바위 넓고 나. 땀 좀 들여가세. 노기거리 지나서 무자긴드렁 지낼 제 열 길 백 길 높더라. 현기증 일어나누나”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자손이 많은 사람은 음식을 가지고 개성에서 박연을 큰길로 돌아서 이곳에 찾아와 어른들을 맞고 대접한다. 모두 부모 앞에 꿇어 절하고 잔을 드린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자리를 같이하여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건강과 복을 빌어준다. 이것을 ‘들이맞이’라고 하는데, “산성으로 들어와서 맞이한다”라는 뜻이다.
그다음에는, 대흥사에서나 칠성암 등에서 한동안 다리를 쉬고 나서 부처님께 복을 빌고 다시 무자긴드렁을 타고 가다가 거의 일곱 마장 푼수나 되는 열두 고비의 급한 곳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는 코스가 개성의 북성기 돌기이다. 대흥산성 여섯 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북문의 성거루를 지나면 관음사에 이르게 되고, 더 올라가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절 대흥사에 도착하게 된다.
 
대흥사, 산성 중심을 이루다
천마 또는 성거산성이라 불리는 대흥산성은 태조 왕건이 만일을 위해 920년경에 피난성으로 쌓은 것으로, 자연적 지세를 잘 이용한 천험(天險)의 요새다. 보존유적 제126호 대흥산성(大興山城)은 1011년부터 3차에 걸치는 거란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궁궐방어용으로 강감찬의 제의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가 21년 동안 도성 전체를 둘러쌓는 발어참성 공사를 진행하면서, 1029년 산성의 제 모습을 갖추었다. 1676년에 다시 쌓은 산성은 주위가 5,975보이고 첩(堞)이 1,530개였다. 1783에도 산성을 보수한 기록이 확인된다.
 
대흥산성은 14세기 말 송악의 내외성과 발어참성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산성이다. 동서쪽의 길이가 약 2,500m이고, 남북 길이는 약 3,000m이며, 성안의 전체 넓이는 대략 580만㎡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0.1㎞, 높이는 평균 4~8m이다. 지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능선과 평지 구간에만 성벽을 쌓았으며, 성벽에다 10개소에 치(雉)와 3개의 장대를 설치하고 동서남북 등 6개 성문과 4개의 암문, 4개의 수문을 두었지만, 북문에만 문루가 남아 있다. 산성에는 제승당ㆍ영청대ㆍ대승당ㆍ청심당 등과 그 중앙에 있는 대흥사에 승창(僧倉)이 있어 군기고·화약고 등을 두었으며, 군량미 등을 비축하던 4곳의 창고 터가 남아 있다.
 
대흥산성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중간에는 관음사, 상류에는 큰 소나무와 전나무가 많은 대흥사가 있다. 계곡에는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반석과 그 아래에 석문담(石門潭)이 자리하고, 그 위에는 두 개의 선돌이 마치 대문과 같이 서 있다. 또 1리를 더 가면 마담(馬潭), 조금 더 올라가면 태종대가 있는데, 계곡 한복판에 반석과 여울과 좌우에도 바위가 있다. 오른쪽 바위 끝에는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스님들이 “이곳은 태종께서 놀던 대이며, 이 소나무는 태종 때부터 있었던 소나무”라 한다. 길이 4척의 소나무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사라졌다.
 
이처럼 대흥산성은 왕이 피난 시에 사용할 행궁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갖추었으나, 고려 왕조는 산성과 행궁으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고려 왕실에서는 산성의 북문루와 특히 대흥사를 ‘별연(別宴)성지’로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삼복절의 피서지로도 유명했다. 민요 ‘개성난봉가’ 노랫가락에도 “관음약수 한잔에 짚신(草鞋) 고쳐 싣고, 산성에 올라”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곳이 바로 대흥사였다.
 
대흥사,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다
조선시대의 대흥사는 17세기 중엽, 김육은 ‘잠곡유고’ <송경유람기>에서 “대흥사 옛터에 당도하였다”라고 기록하여 폐사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대의 전경은 “금강산 정양사에 비견할만하다”라고 했다. 1757년 표암 강세황이 직접 답사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에서 대흥산성 안에 있던 <대승당>과 <태종대> 등과 같이 별도의 화첩으로 잘 묘사되어 있을 만큼, 위풍당당했던 대흥사는 1940년대 산불에 의해 소실되고, 6.25 전쟁으로 폐사되고 말았다.
 
오늘날 대흥사는 1932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고적도보’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과 다르지만 1990년 초, 1km 아래쪽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대승당 건물로 이전하여 다시 복원됐다. 솟을대문이 있는 대승당은 고려의 행궁과 조선 사대부의 별채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위성사진에서도 현재의 대흥사 서쪽에 더 넓은 빈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옛 사찰의 중심영역으로 소실된 다음, 빈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보존유적 제529호 대흥사는 청량봉을 뒤로하고 서남향으로 자리하는데, 지금 4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절 입구에서 24개 장대석의 돌계단을 올라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면 좌․우측에 동․서재 건물과 중앙에 명륜당을 둔 향교와 서원과 같은 유교식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삼문(三門)으로 된 솟을대문과 회랑과 같은 담장, 본전을 가운데로 하여 동쪽에 심검당, 서쪽을 명부전이라 부르지만 모든 건물에 편액을 걸지 않았다. 또 불상과 탱화 등은 남아 있지 않는다.
 
특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는 대흥사의 솟을대문은 18세기 중반,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어첩을 봉안하려고 건립한 경북 의성 고운사 연수전의 만세문과도 아주 흡사하다. 고운사 연수전의 대문과 달리 대흥사 솟을대문 앞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실 건물에서만 사용하던 장대석을 쌓아 올린 돌계단 석축이 놓여 있다. 돌계단 아래의 마당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찰 뒤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또 동쪽 한편에는 재래식 해우소가 작은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
 
천마산 청량봉 너머 동쪽에 자리하는 관음사와 함께 단짝으로 소개되는 대흥사는 1995년 8월 재미교포 방문단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 교포방문기에 의하면, “대흥사에는 관리인 부부가 살고 있는데, 평양으로 간 아들을 둔 50대 초반의 부부”라고 회고했다
 
개성 사람들은 아직 송악산의 외성과 대흥산성의 답성놀이를 봄·가을 세시풍속으로 여긴다. 이를 경험한 기성세대는 물론 앞으로 후손들이 즐기고 가꾸어가야 할 민속이라 할 수 있다. 개성의 세시 놀이는 그 중심에 대흥산성의 안주인 대흥사가 있어 기원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시 찾아가면 북성기 돌기가 또 재연될 것이다.
6면-개성 성벽_재정리 사진_ 1918년촬영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_유리집5 85쪽.jpg
1918년 개성 나성 성벽의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