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4-개성특급시 대흥사(하)

밀교신문   
입력 :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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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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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개경으로 불린 개성은 고려 500년의 역사문화가 총화된 곳이다. 또한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한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소나무가 있는 산이란 송악(松岳)과 푸른 소나무가 있는 고개란 뜻의 청목령(靑木嶺), 고니 새의 목처럼 생긴 고개의 곡령(鵠嶺) 또는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을 끼고 있는 도읍지라는 뜻에서 유래한 송도(松都)나 송경(松京) 역시도 개경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고대도시를 파노라마처럼 바라볼 수 있게 한 사람은 18세기 표암 강세황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송도기행첩’이란 그림과 글로써 남겼다. 이 그림이 널리 회자된 것도 개경을 다룬 그림이 한양과 비교하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개국 1년 후, 919년에 고려의 도읍지가 된 개경을 아름답게 소개한 것은 14세기 중엽 이제현의 ‘익재난고’에 <송도팔경>이란 시로 처음 등장했다. 이 글은 1424년 ‘세종실록지리지’ <구도개성유후사>에도 기록됐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에서 더 유명해진 명칭이지만, 그 여덟 가지 경치는 “자하동의 승려찾기, 청교의 손님보내기, 북산의 연기와 비, 서강의 바람과 눈, 백악의 갠 구름, 황교의 저녁노을, 장단의 돌벽, 박연폭포”를 말한다.
 
송도팔경과 함께 개성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 찾던 곳이 대흥산성이다. 개경의 북쪽 산성 안에는 박연폭포와 “국왕이 모인 사람들을 위해 볕가리개를 쳤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으로 경치보기가 가장 좋다는 차일암, 용마(龍馬)가 살던 마담, 태종대 그리고 관음사와 대흥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대흥사는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김부식이 말년에 즐겨 찾은 곳이다. 그가 지은 시, <대흥사에서 소쩍새 울음소리 듣다>를 통해 느낄 수도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에는 송도삼절과 같이 유명해진 대흥산성의 대흥사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송도기행첩》에 다시 등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송도, 실경산수화에 담기다
 
18세기 실경산수화의 걸작인 ‘송도기행첩’은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행운인데, 그 속에 대흥사가 담겨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기행첩은 송도와 그 지역의 북쪽의 천마산·성거산·오관산 주변을 그린 16점의 그림과 3건의 글로 구성되었다. 개성에 있는 일련의 명승지를 함께 그린 현존하는 조선시대 유일의 서화첩이다.
 
표암 강세황은 “이 화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 이전 시기에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화풍을 제시했다. 거리에 따른 크기를 다르게 한 원근법과 농담의 차이와 면 처리에 의한 입체감을 구사한 음영법 등 서양 화법을 수용한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송도기행첩’은 45세의 표암 강세황이 1757년 개성유수 오수채의 제안으로 개성을 여행하고 남긴 ‘사생첩’이다. 1면 송도전경, 2면 화담, 3면 백석담, 4면 백화담, 5면 대흥사, 6면 청심담, 7면 영통동구, 8면 산성남초, 9면 대승당, 10면 마담, 11면 태종대, 12면 박연, 13면 태안창, 14면 낙월봉, 15면 만경대, 16면 태안석벽으로써 처음부터 12폭까지는 2면에 그림이 그려졌으나, 마지막 4폭은 1면에 한 점씩 그려져 있다.
 
이 기행첩에 실려 있는 그림의 각 폭을 살펴보면, 첫째인 <송도전경>은 화면 상단 중앙에 위치한 송악산과 화면 하단의 남문루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송악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기와집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개성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압권이다. 또 12번째 그림인 <박연폭포>는 대흥산성의 북문인 성거관, 문루 등 주변의 경물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않고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인 암벽을 구축하고, 그 사이를 포말을 일으키며 강렬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사실적으로 담았다. 또 태종대와 마담 사이에 위치한 제6면 청심담은 다른 산수풍경과 달리 멀리서 산세 전체를 화폭에 담았다. 산의 굴곡을 가는 선으로 그리고 윤곽선 위에 진한 채색을 하여 입체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제5면 <대흥사>의 그림은 천마산 방면의 군영 저장창고로 행궁 및 관사였던 대승당과 함께 공적 업무를 담당했던 관사의 기록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것은 아마도 개경 유수 오수채의 각별한 부탁으로 일일이 찾아가서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은 송도의 풍광을 단순히 유람했던 문인들이 쉽게 방문할 수 없는 장소였다. 군량미 저장고 기능을 한 태안창은 제16면의 그림으로 군량미 창고와 군기고나 화약고로 사용된 관사였던 대흥사처럼 거의 개방되지 않았다. 그림의 배경으로 멀리 있는 천마산과 가까운 성거산을 같이 그림 안에 넣었다. 강세황은 그림의 주문자를 위해 어실각 있던 대흥사를 화면 중앙에 배치한 것이나 또 그 옆에 부속 건물까지도 빠짐없이 그렸다. 부감법과 소실점 기법을 동시에 구사하여 모든 건물을 조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여러 그림과 같이 개경 실경산수화 속의 대흥사는 제9면 <대승당>과 연관 지어 같이 보게 될 때, 절의 옛 모습과 기능적인 측면이 잘 드러난다. 현재 자리하고 있는 대흥사와 사뭇 다른 가람 배치를 엿볼 수 있다.
 
대흥사, 태조 왕건이 세운 절
천마산(天磨山) 청량봉 서쪽 기슭의 대흥사는 1940년대 초까지 대흥산성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10세기에 태흥사(泰興寺)로도 불렸으며, 지리적으로 산성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박연천, 일명 관음사계곡의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보존유적 제529호 대흥사는 921년 10월에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됐다. ‘삼국유사’에는 “10월 대흥사를 창건하였는데, 혹은 임오년의 일이라고 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921년 10월 15일 오관산에 대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이언(利言)을 맞이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고려사’에는 “920년 10월 서경에서 돌아온 왕건은 이언을 왕사로 삼았다”라고 기록했다.
 
932년 건립된 광조사의 진철대사 비문에는 “태조 왕건이 선종 승려 이엄(利嚴)을 개경으로 초빙해 태흥사에 모셨다.” 이엄대사가 왕사 이언대사인데, 그가 머물던 곳이 대흥사였다.
 
‘고려사’등에는 “오관산에 대흥사를 건립했다”라고 하였으나, 오관산 북쪽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기일 뿐, 원래부터 천마산의 청량봉 서쪽의 산기슭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사’와  ‘미수기언’에는 955년 대흥사를 중수하고, 왕(광종)이 낙성도량에 참석했다.
 
‘대흥사중건비’에서는 1354년 나옹선사가 다시 중수하고, 1359년에 처묵대사가 크게 중창하여 낙성했다고 한다.
 
그 후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사된 것으로 기록된 대흥사는 1552년 중창됐다. 그때 범종을 조성하고, 명나라 가정 31년이란 종문을 새겨놓았다. 범종은 구경이 2척 남짓하고 무게 600근으로 만들어 종루에 걸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약탈로 불타서 소실되었지만, 1673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은 1574년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견문록 ‘조천일기’에서 대흥사의 천석(泉石)을 두루 구경하였다고 했을 정도로 풍광이 좋았다. 사찰 옆, 두 개의 석문(石門)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대흥사사적비>에는 1673년 산성의 수성장군 노도창의 건립하고, 사간원 교리 임상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속필로 유명했던 창주 남궁옥이 쓴 것이라고 했다.
 
920년에 축조된 대흥산성의 건물은 왕의 피난 행궁과 일행의 숙소 등으로 제승당·영청대·청심당 등이 쓰였고, 대흥사는 군량미를 비축하는 승창과 군기고, 화약고 등으로 사용된 관청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의 야영지 숙소 등으로 이용됐다. 1690년 처점선사가 대규모로 대흥사를 중수하면서 사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 시기에 중건된 전각은 1932년에 출간된《조선고적도보》의 사진으로 대웅전 등 건물과 감로도 탱화가 같이 실려 있다. 옛터의 대웅전은 관음사 대웅전과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포에 우진각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툇마루와 계자난간을 갖춘 것도 같다. 이 계자난간은 일제의 흔적과 잔재로 개성 민중들의 고통과 아픔이 서려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나타난 대흥사
대흥사는 표암 강세황이 1757년에 그린 ‘송도기행첩’에 등장한다. 제5첩 <대흥사>에서는 어실각을 중심에 두고, 대웅전을 좌측에 부속건물을 우측에 배치했다. 이 그림의 대웅전 문 앞에는 툇마루만 있는데, 1932년 사진에 나오는 난간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강세황의 <대승당> 그림에는 전각이 사대부가의 사랑채처럼 이층 누대를 둔 ㄱ자 형태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을 비롯한 솟을대문과 행랑채ㆍ중건비도 그려져 있다. 또 왼편에 여러 채의 건물을 그렸는데, 대승당의 부속건물로 보이지만 옛 대흥사의 전각을 멀리서 보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두 채의 건물은 서로 1km 남짓한 거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흥사>와 <대승당> 두 그림의 배경이 되는 산과 산세도 거의 비슷하게 그려졌다.
 
고려 때부터 칠곡 대흥사, 천안 성거산 대흥사, 해남 대흥사의 기록과도 혼돈된 대흥사는 1847년 한재렴이 간행한 ‘고려고도징’에 대흥사를 ‘여지승람’의 내용을 다시 인용하여 “대흥동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라고 했다.
 
그러나 1940년 초에 발생한 산불로 대흥사는 명부전과 어실각을 제외한 6동의 전각이 모두 불타고, 옛터의 나머지 건물도 전쟁 때 소실됐다. 그 후 폐사된 대흥사는 옛터에서 1km 아래쪽에 남아 있던 대승당 건물로 1990년대 초에 이전하였다.
 
고려 왕건이 창건했던 대흥사는 지금 사라졌으나, 고려의 행궁으로 또 왕건의 아들이 수련했다고 전하는 대승당 건물을 1990년대 초, 개성관광총국 등 기관에서 리모델링하여 복원됐다. 유교식 건물로 된 대흥사는 중앙에 명륜당과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서재를 둔 향교와 아주 비슷하다. 또 입구에는 일주문과 같은 솟을대문을 통해서 다니도록 했다. 사찰 입구인 24개의 돌계단 옆에는 보존유적 지정을 기록한 높이 1m 50cm의 표목을 세워 대흥사임을 표시했다. 2019년 봄부터 대흥사 옛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개성사람들이 여름 피서지로 가장 선호하던 박연폭포와 계곡 그리고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는 대흥산성으로 통일의 개경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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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대흥사 입구 전경 (사진:조선의 절 안내, 2003년판)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