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5-개성특급시 영통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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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갑 영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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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북산은 송악산 북쪽의 오관산과 천마산, 성서산 등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이곳은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크고 깊은 산골짜기를 이룬 곳’이라는 마하갑(摩訶岬)으로 불렸다.
 
마하갑은 북산의 지명으로 불리는 것과 다르게 서인도의 역경승 바가바드 달마가 658년 번역한 ‘천수경’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란 산스크리트어 마하(maha)를 한자의 소리음대로 번역한 것이지만, 불가사의한 일ㆍ위대함ㆍ한량없는 뜻으로 쓰이는 것처럼 ‘으뜸가는 큰 골짜기’를 말한다. 또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른스트 마흐가 1883년에 처음 사용한 소리 속도의 단위인 ‘마하수’에서 이름 붙인 마하(Mach)도 한자와 우리말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흔히 마법사의 주문이라 불리는 고대 히브리어 문자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와도 수리수리 마하수리는 비밀스러운 주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영통사가 자리한 마하갑은 송악산 줄기를 가리키는 부소갑과 마찬가지로 오관산 줄기 따라 자리한 큰 고을이다.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마하 또는 마가의 고을수령이 통치하던 마하갑의 양자동 등은 문충과 균여대사를 비롯해 고려 왕건의 조상들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11세기 초, 고려 화엄종의 거찰 영통사가 자리하게 되면서 마을 이름까지 영통동으로 바뀌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시대부터 주요한 거점과 이름난 마하갑 고을은 고려 왕씨의 발상지이다. 이곳에는 화담 계곡을 비롯한 경치 좋은 여러 곳과 영통사라는 유명한 절이 자리했다. 특히 12세기 고려를 대표하는 소셜디자이너인 의천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했던 주 무대였다. 지금은 금단의 땅이지만 한반도의 서쪽, 통일 조국을 열어갈 판도라의 절, 영통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 건국신화의 마하갑
예로부터 절경과 길지로 소문난 곳, 마하갑은 갓을 쓴 5개의 산봉우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오관산(五冠山) 아래의 영통골인데, 지금의 영통사가 자리한 용흥동이다. 개성시 외곽에서 약 8㎞ 떨어진 용흥동은 고구려 때부터 마하갑이라 불렀다. 이곳은 왕건의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고려 왕씨의 집성촌인 셈이다.
 
918년 고려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왕건의 할아버지인 의조 작제건에 관한 개국 신화가 전한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1160년에 지은 ‘편년통록’에는 “성골장군의 아들 강충이 마하갑에 살았는데, 강충의 아들 보육이 거사가 되어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또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왕건의 증조모 진의가 “통일신라 말엽에 송악군 마하갑에 살 때, 어떤 술사가 와서 보육에게 여기는 대당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터라고 하였다”라고 예언한 동네가 마하갑이다.
 
영통사의 진산, 오관산은 신라 때부터 알려진 명산이다. 이 산을 널리 알린 인물은 655년 신라의 관료였던 문충이다. ‘고려사’ 열전과 ‘청장관전서’에 실린 문충은 원래 오관산 기슭에 살았는데,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집에서 30리나 되는 서울을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며 효성을 받쳤으나, 어머니의 늙음과 병환을 보고 슬퍼하며 노래를 부른〈오관산〉이 전한다.〈오관산곡〉또는〈목계가〉라고 불린 문충의 노래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고, 제목과 유래는 ‘고려사’ <악지> 등에 전하며, 14세기 초 고려의 이제현이 그 뜻을 풀어 지은 시가 있다. “나무토막으로 조그마한 가짜 닭을 깎아, 젓가락으로 집어다가 벽 위에 놓았네. 꼬끼오 닭이 울어 시간을 알리니, 어머니 얼굴이 해 질 녘 해와 같아라.”고 전한다.
 
고구려와 통일신라에서 다시 고려의 산이 된 오관산에는 1378년 목은 이색이 쓴 <오관산 흥성사전장법회기>에서 “봉우리 다섯 개가 있는데, 둥그렇게 모여 있어 멀리 바라보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관이라 이름한 것은 그 모양을 취한 것이고, 또 기묘하고 뛰어난 경치가 족히 삼한 여러 산 중 으뜸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 태조가 임금이 된 뒤에 그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숭복(崇福)라 했는데, 그 현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뒤에 절은 난리에 불타 없어지고 미쳐 고쳐 짓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했다.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인 보육이 수도하기 위해 753년 마하갑에 세운 숭복암은 그 후 918년에 규모가 더 큰 숭복원로 재건됐다.
 
‘고려사’에는 “1124년 6월 영통사에 명하여 유사를 정하고 숭복원을 수리하였다.” 또 1125년 고려 인종이 “숭복원을 중창하여 이름을 흥성사로 바꾸고, 신료들과 함께 낙성연을 베풀었다.” 1152년 2월 고려 “의종이 영통사에 갔다가 이윽고 흥성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통사와 흥성사는 마하갑에 있던 사찰로 다른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하갑의 흥성사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시에서 “마하갑에는 구름 조각 떠도는데”라고 오관산 아래의 지명으로 불렀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직지심경’을 편찬한 백운경한은 1357년에 흥성사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며, 홍건적의 2차 침략 때인 1361년 11월 24일에 개경 만월대를 비롯한 궁궐이 불타면서 같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색의 기문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색의 흥성사 기문에는 1362~65년 사이에 노국공주가 흥성사 당우를 새로 중창하고 대장경을 봉안하였고, 공민왕이 죽은 후에 대총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주지 내명대사가 이색에게 청하여 이러한 사실을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고구려 사찰인 마하갑사의 전승을 이어온 흥성사는 고려의 멸망으로 조선 중기에 임진난 때 폐사하고, 거찰 영통사와 같은 곳에 있었던 까닭으로부터 영통사 사찰권역에 포함되어 같은 사찰로 알려지게 됐다. 1934년 안진호의 ‘전등사본말사지’에는 “지금의 영통사가 흥성사의 옛터이다.”라고 기록했다.
 
균여대사에서 각훈대사까지 
다섯 가지 신령스러운 갓(冠)을 쓰고 있는 오관산의 일대를 가리켜 북산이라 한다. 오관산을 진산으로 하는 영통사는 천 년 동안 판도라의 절이었다. 이 전설과 신화는 9세기부터 고구려의 절 마하사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시작됐다.
 
가장 오래된 기록의 인물은 홍법국사와 균여대사이다. 이 두 분은 마하사에서 계를 받고 수행했다. 1018년 건립된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비>에 의하면, 홍법국사는 “12세에 출가하여 930년에 북산 마하단(摩訶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때 계단은 마하사 또는 마하갑사를 가리키는 사찰이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의 동쪽에 걸려 있는 금강계단이란 편액과 같이 고려시대의 승려 수계의식이 거행된 국가 공인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원통대사로 불린 균여는 “15세에 출가하여 … 940년대 마하갑에 가서 의순대사에게 배우며 수도했다”라고, 1075년 혁련정이 저술한 ‘균여전’에 기록됐다. 또 균여대사가 쓴 ‘법계도기 후발’에 의하면, 958년 7월 마하갑수 백운방에서 의상의 법계도를 대중 강의하였으며, 이때 정리한 ‘일승법계도원통기’가 지금까지 전한다. 또한 ‘석화엄교분기원통초 후발’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균여대사는 958∼960년까지 북산 마하사에 머물면서 대중에게 경전 강의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북산으로 알려진 오관산의 마하사는 10세기 중엽부터 승려가 수계를 받는 국가공식 계단사찰과 경전 강독을 위한 교육 장소로 활용되었다. 다만, 균여대사를 비롯하여 10세기 영통사와 관련한 기록은 혁련정이 편찬한 ‘균여전’에 의한 영향으로 1027년 영통사가 창건된 이후에 일반화된 경향이었다. 그 이전, 같은 곳에 있었던 사찰명까지도 후대에서 통상적으로 영통사라고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상과 현실 세계를 융합하려는 성상융회로 대변되는 균여의 화엄사상을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엄청 싫어했기 때문에 후대의 기록들은 마하갑사와 연관된 사실까지 모두 영통사로 표기했다. 의천은 균여에 대해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일 없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폐케 하고 후생들을 현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이와 달리 의천은 해동성사 등의 존칭을 사용하면서까지 무척 흠모한 원효대사에 대해 “옛날 천축의 마명과 용수의 저술들과 대등할 만하다”고 그의 저술들을 극찬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평가했다.
 
의천은 원효대사를 화쟁국사, 의상대사를 원교국사라 존명하고, 각각 분황사와 부석사에 승비를 세웠다. 그러나 균여의 저술은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한 권까지도 채록하지 않았다. 대장경 등 문헌에 정통했던 의천이 균여의 저술에 출처가 불분명한 점을 문제 삼아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한 평가로, 교설에 실천적 수행이 빠졌다는 것으로 비판했다. 이런 주장은 엘리트 불교를 주창한 의천의 입장에서 보면, 균여의 행각이 너무 세속적이고 대중적이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균여와 의천대사는 화엄종 등 불교의 사상적, 학문적으로 시대를 초월한 라이벌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큰길가 담벼락에 써 붙일 정도로 널리 알려진 균여대사의 향가 ‘보현보살십종원왕가’ 11수는 같은 시대인 당나라에 한시로 번역돼 알려졌다.
 
11세기 대각국사 의천으로 대변되는 영통사의 이미지는 13세기 중엽 고종 때의 각훈대사에 의해 고려불교의 꽃을 피웠다.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전집’에서 각훈이 “법상을 치면 두 호랑이가 우는 듯하고, 목탁을 칠 때는 한 용이 나타나듯 한다.”고 했다. 더욱이 1219년(고종 6년) 봄에 각훈대사가 열반하자. 부음을 듣고 지은 시로 애도하였다.
 
“세상은 불도의 대덕현인을 잃었구나.(世喪彌天釋苑賢)/이제 법문의 대들보 이제 꺾였으니(法門梁棟今頹折)/후학은 누구 의지해 십현를 토구하랴.(後學憑誰討十玄)”
 
화엄종의 사자사문 각훈이 고종의 명으로 1215년 영통사에서 편찬한 ‘해동고승전’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 초기부터 각훈의 찬술시대인 고려 고종까지 9세기 동안의 고승을 망라하여 서술한 역사서다. 육당 최남선은 ‘해동고승전해제’에서 “이는 이곳에 있어서 승안승전의 효시오. 일부라도 그 면모를 전하는 유일의 진역승사이다.”라고 했다. 이 문헌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올해로 805년이 지난 ‘해동고승전’에는 우리나라 고승 31명의 역사가 실려 있지만, 1027년 창건된 영통사의 전설과 신화는 대각국사 의천의 출가로부터 35년간 영통사에 주석하면서 시작됐다. 그로부터 대각국사 의천이 발원한 꿈의 성지였던 마하갑 영통동의 찬란한 영화는 뒤로한 채 대각국사 비와 당간지주, 그리고 세 개의 탑만 덩그렇게 남았었다. 978년이 흐른 후, 마하갑 영통동의 영통사는 2007년 10월 30일에 남북이 힘을 모아 29개의 전각을 원모습대로 세워놓았다. 이젠 웅장한 개경 총림의 제 모습을 어엿하게 되찾아 우리 불자들이 행하는 통일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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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지 1939년 전경 (사진:‘유리원판목록집2’ 국립중앙박물관)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