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6 -개성특급시 영통사(중)

밀교신문   
입력 : 2020-06-22 
+ -

불교 르네상스를 이루다

개성 영통사

20200608091740_d748eee2151f3e4ceb701396b863c6a7_c6nh.png

 
르네상스는 14~16세기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양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1550년에 쓴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서 처음 언급하였으며, 1855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가 ‘프랑스사’에서 <르네상스>라는 학문적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불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예술, 사상 등을 본받아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일종의 시대정신인 르네상스는 고려시대의 현종에서 예종의 재위 기간인 11~13세기에도 이와 같은 문화 혁신운동이 일어났다고 하여 불교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일찍이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등 세계 4대 발명품과 더불어 ‘고려대장경’의 실제 모습은 고려의 지식문화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1011년 2월 보름 청주 행궁에서 발원, 시작된 ‘초조대장경’은 그 판각지인 개경 현화사 등과 1101년 음력 10월 5일에 완성된 ‘고려교장’의 탄생지인 개경 흥왕사가 사라진 다음, 고려의 불교 르네상스는 개경 영통사에서 다시금 부흥하였다.
 
고려 500년 국책프로젝트, 고려대장경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고려대장경’은 세계에서 단일 품목으로 가장 방대한 분량과 최상의 지식정보를 갖추고 있는 기록유산이다. 약 200~300년의 역사가 아닌 천년의 세월과 공간을 다룬 역사적인 펙트이다. 중국에서 처음 만든 ‘개보칙판대장경’은 현재 12점의 인쇄본만이 전해지고 있으며, 최고의 기록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시간적으로 근접할만한 문화유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와 더불어 그 문화재가 희소하고, 완전한 형태로 천년의 시공까지 넘어선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문명국가는 거의 없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고려사’에서 “928년 8월 신라승 홍경이 당나라 민부의 관청에서 받은 대장경 1부를 배에 싣고 와서 예성강에 이르렀다. 왕이 직접 나가 맞아들이고, 제석원에 안치하였다.”
 
그 후 고려 조정에서는 989년 12월에 대장경을 직수입했다. 승려 여가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대장경을 직접 구했는데, 북송의 대장경이 완성된 해로부터 불과 6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991년 4월 대장경 직수입은 ‘고려사’의 기록과 같이 “한언공은 990년 송나라에서 대장경 481함(函) 2,500권과 송나라의 태종이 직접 지은 어제비장전을 비롯해 소요·연화심륜 등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려의 조정은 ‘초조대장경’을 새기기 전부터 이미 대장경을 구하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국가 고려에 있어 송나라의 대장경 판각사업은 새로운 희망과 함께 문화적 충격을 안겨 주었음을 시사한다.
 
고려의 대장경 판각은 막대한 재정 투입과 선진기술 인력을 기반으로 축적된 학문적인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국책프로젝트였다. 국가이념을 담은 불교의 법보신앙에다 호국신앙을 덧붙인 국가재건사업으로서, 1933년 미국의 뉴딜정책과도 같은 의미가 담겼다.
 
대장경 조성사업은 당시 고려의 국력을 과시하는 문화교류의 기본바탕을 이루었다. 2011년 미국 UCLA 대학의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13세기에 편찬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왕조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문화적 성취이다. 이는 1960년대 미국의 달 탐사사업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대장경 편찬사업은 당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수반되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 첫발자국은 1011년 음력 2월 보름, 충북 청주의 행궁에서 비롯됐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은 그로부터 11년 후, 1022년 10월 개경 현화사에서 열린 국가 기념행사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때 문하시랑평장사 강감찬 장군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을 처음으로 지어 올렸다. 그 후 <초조대장경>은 1087년까지 76년 동안에 조성되었는데, 그 인쇄본의 분량은 570여 개 상사(函)에 5,048여 권에 이른다.
 
그다음, 고려에서는 대장경의 정수, 꽃이라 불리는 일명 속장경인 ‘제종교장’을 만들었다. 이 대장경의 기획, 연출, 총감독을 맡은 대각국사 의천은 ‘대각국사문집’에서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해와 달과 함께 나란히 걸리고 귀신과 오묘함을 다투도록 해야 한다”라고까지 하며 고려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심었다.
 
경·율·론 삼장(三藏)에다 대장경의 주석서인 ‘교장(敎藏)’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벽한 형태의 대장경이 된다고까지 했다. 1091~1101년까지 개경 흥왕사의 교장도감에서 10년 동안 조성한 4,740여 권의 ‘제종교장’은 의천이 ‘천년의 사관(史觀)’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생애와 맞바꾼 그의 모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이미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를 가진 고려에서는 대몽항쟁 기간임에도 1236~1251년까지 제작공정을 확 줄이고, 정밀도를 더 높인 81,258장의 경판인 ‘재조대장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동아시아의 문명사를 끌어낸 지식정보 매체를 완성하게 되었다.
 
영통사, 13세기 고려의 국가도서관
10~13세기 동아시아는 대장경의 전장이었다. 고려를 비롯한 중국 북송과 남송, 거란, 금,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새 왕조가 탄생할 때마다 대장경을, 그 후대에서도 각기 조성했다. 1251년 9월 25일 강화 도성 서문 밖 판당(대장도감)에서 거행한 고려 재조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국가행사로 정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130년 후, 고려 말기의 이숭인이 지은 ‘도은집’과 조선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이 1478년에 편찬한 ‘동문선’의 <여흥군신륵사대장각기>에는 “1381년 4월~12월까지 경·율·론을 인쇄하고 제본, 함을 만들었으며 1382년 정월까지 화엄종 영통사에서 거듭 교열한 대장경 1부를 배편으로 그해 4월 여흥군 신륵사에 옮겼다”고 1383년 건립된 경기도 여주 신륵사의 <대장각기비>에 전한다.
 
이때, 대장경의 이운 경로는 개경 영통사에서 소달구지 육로를 통해 동강의 수참(水站)인 광흥창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다시 임진강 수로를 따라 고랑포, 승천포를 거쳐 한강과 만나는 조강에서 뱃길을 돌려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마포 또는 용산진에서 1박을 한 다음, 광나루를 경유하는 뱃길로 여강의 이포나루에 도착, 하역하여 우마차의 육로를 통해 신륵사에 이르는 3일간의 일정이었다.
 
이러한 기록처럼 1027년에 창건한 오관산 영통사는 13세기부터 고려의 최고 국가도서관 또는 출판정보센터였음을 알 수 있다. 영통사 주지 각훈이 1215년에 편찬한 ‘해동고승전’의 기록과는 다르게 원공국사 지종이 “946년 17세 때, 영통사의 관단에서 수계를 받았다”라고 한 <승묘탑비>의 기록을 보면, 영통사는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부 사학자들이 잘못 해독하여 태조 왕건이 919년 개경에 세운 10개 사찰의 한 곳인 통사(通寺)를 영통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그 (원)통사는 황북 장풍군의 사찰인데, 영통사와는 전혀 다른 사찰이다.
 
영통사가 국가도서관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은 1232년 9월 말경 몽골의 2차 침략으로 개경 함락과 동시에 궁궐과 사찰들이 모두 사라진 시기에 시작됐다. 1021년 창건된 영취산 현화사 등지에서 판각, 보관된 ‘초조대장경’과 별도로 수입된 ‘거란대장경’ 등을 비롯하여 1067년 정월에 창건한 흥왕사에다 대각국사 의천이 1086년 관청인 ‘교장도감’의 설치와 대장전을 지어 1090년에 판각, 완성한 ‘제종교장’ 등 최신 전문도서가 대거 영통사로 이관하면서 고려 최대의 출판유통센터로서 기능과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종의 원찰로 건립된 덕적산 흥왕사는 1056년부터 총 12년에 걸쳐서 지었다. 길이가 약 4km로 확인되는 동서남북 성문터 4곳으로 사찰을 둘러싼 성곽을 1070년에 쌓았고 모두 2,800여 칸의 건물을 세웠다. 그 규모가 왕궁 수준이었다. 면적은 너비 800m, 길이 400m로 32만㎡에 이르렀는데, 34만㎡의 서울 경복궁과도 맞먹는 면적이다.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팔공산 부인사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조대장경’ 경판과 흥왕사에 보관했던 ‘교장’ 목판은 1232년 여·몽 전쟁 때 두 사찰이 불에 타면서 같이 전소되었다. 그 후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강화도 판당인 대장도감과 남해 분사도감에서 새로 판각, 조성한 ‘제조대장경’이 인쇄 유통되고, 고려 왕조는 1270년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지 39년 만에 개경 환도를 단행했다.
 
고려 현종이 부모를 위해 지은 현화사는 1276년 왕이 공주와 함께 절에 와서 승지에게 명하여 불전(佛殿)을 보수하였으며 1283년에도 중수하였으나,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만월대 등 궁궐과 같이 불에 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7층 석탑과 석비는 고려역사박물관 뜰에 전시되고 있으나, 1020년에 만들어진 높이 4.2m의 현화사지 석등은
1911년에 반출되어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놓여 있다.
 
몽골 전란 때 소실된 흥왕사는 1330년에 정조·달환 등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건립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1363년에 일어난 공민왕 시해 사건인 흥왕사의 난 때 흥왕사가 다시 전소되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개경의 영통사는 고려 사찰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학술적 기능을 조선 전기까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세종실록’에는 1423년 10월에 “금사사의 ‘진언대장경’과 영통사의 ‘화엄경’ 등 판자와 운암사의 ‘금자삼본화엄경’ 1부와 ‘금자단본화엄경’ 1부 등을 수참의 배로 운송하도록 하라”고 했으며, 조선 선조 때의 이정형은 ‘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에서 “언젠가는 영통사에 놀러 갔는데, 밤중에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한 늙은 승려가 가만히 공에게 말하였다”라고 여행숙박을 거론했을 정도였으나, 1592년부터 일어난 7년 전쟁(임진왜란) 때에 폐사되면서 그 명성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405년이 흐른 후, 개성 영통사는 2007년 10월 30일 천태종과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공동 협력사업을 통해 복원, 낙성됐다. 모두 29채의 전각이 다시 세워졌으며, 그중 6채가 1천 200여 평의 경내 중앙회랑에 들어섰다. 이날 준공 낙성식에는 분단 이후, 남측 300명과 북측 불교도 200명 등 최대 규모의 500여 명이 참가했다. 낙성식 후에는 남북 학자들이 영통사 복원의 역사적 의의 등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했으며, 2015년 11월까지 대각국사 의천의 다례재가 거의 매년 봉행되었다.
8면-영통사.jpg
복원된 영통사와 5층탑 (출처: 강화고려역사재단, 강화·개성 고려유물유적 사진전 2014)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