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수요(壽夭)와 인과 구분

밀교신문   
입력 :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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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날 때 벌써 수요(壽夭)가 결정해지는 인과구분을 말하면, 전생부터 부모태중(父母胎中)까지는 금생수명(今生壽命)을 결정하는 인기(因機)가 되고, 입태(入胎)로부터 출생하여 열반할 때까지는 결정된 금생수명(今生壽命)에 과기(果機)가 되므로 전생부터 자기가 짓고 태중(胎中)에 부모가 지은 자비와 살생은 금생수요(今生壽夭)가 되고, 출생하여 열반할 때까지 자기가 짓고 열반하여 수생(受生)할 때까지 부모 권속들이 지은 자비와 살생은 내생의 수요가 되느니라.”
 
우리는 가까이 무엇을 두는 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오랜 시간 함께하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곁에 두어야 합니다. 좋은 것만 갖고 나쁜 것을 버린다면 장원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선악을 함께 하여야 합니다. 다만 시간에 따라 빠르고 늦음이 있고, 공간에 의하여 많고 적음이 있고, 사람에 의하여 좋아하고 싫어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피하거나 버리지 않고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밝음 뒤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운 어린아이가 불빛 아래에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울면서 달리듯이 도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뛰어도 뛰어도 따라오는 자기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인지음 뒤에 따라오는 과보가 이와 같은데도 우리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뛰지도 않습니다. 먼 시절부터 습관의 철이 들어 울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원인과 절차는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의 인과설입니다. 원인과 절차와 결과로 삼세가 있고 시방이 있으며, 공평하게 평등하게 화합으로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명과 고락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만이 만든 것이 아니요, 시간과 공간과 만물의 화합으로 형성된 몸입니다. 현재 나의 몸은 부모가 1/3을 보태고, 권속이 1/3을 보태고 자신이 1/3을 모아 수명과 고락을 받을 수 있도록 형성된 것입니다. 인을 짓는 것은 자유지만, 받는 과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새로운 몸을 받고자 할 때는 남겨둔 권속과 잉태해줄 부모에게 2/3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인(因) 지음을 마음대로 할 때 좋은 인을 지어서 좋은 권속을 남기고 좋은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내가 가장 좋을 때 나쁜 과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가장 괴로울 때 기쁨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과보가 나타날 때는 조짐을 먼저 보여줍니다. 조짐이 나타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받아 지혜롭게 응대하면 됩니다. 좋은 것은 필요할 때, 나쁜 것은 받을 능력이 있을 때 받도록 하면 됩니다. 미리 나타난 조짐에서 허물과 잘못을 아는 것은 장차 받아야 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받을 시기를 잘 조정하면, 악을 선으로 바꾸거나 가볍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중생계는 나의 몸만 삼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삼합의 조화로 형성되고 운행합니다. 하루 중에 빛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둡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1/3은 아주 밝고, 1/3은 아주 어두우며, 1/3은 밝음과 어두움이 반반 섞여 있습니다. 선악도 이와 같습니다. 1/3은 좋은 것이요, 1/3은 나쁜 것이며, 1/3은 좋고 나쁨이 반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삼위일체의 세상입니다. 시간으로 보면, 1년 360일에 1/2은 낮이요 1/2은 밤이지만, 세분하면 1/3이 낮이요 1/3이 밤이며, 1/3은 밤과 낮이 동시입니다. 앞의 1/3과 1/3은 변함이 없지만, 뒤의 반반인 1/3은 변화의 작용이 무상(無常)합니다. 변화가 무상한 혼용의 1/3을 어느 쪽으로 당겨서 활용하는가에 따라 생활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선과 악, 화와 복,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성공과 완전한 실패는 없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중간의 빛이 항상 있습니다. 성공하고도 마음이 불안하고 실패하고도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은 중간의 1/3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합의 1/3은 곧 희망의 업이며, 서원의 목이며, 정진의 빛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역전도 반전도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부모와 권속이 지닌 각각 1/3의 인(因)이 연(緣)의 화합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 좋은 권속을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이 좋은 인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일평생 사용할 의식주는 가지고 태어납니다. 빈부가 있고, 고통이 짙고 얕으며 강하고 약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픔으로 오는 모든 고통은 같습니다. 배 아픈 통증과 상처 난 통증과 가시에 찔린 통증과 머리 아픈 통증은 같습니다. 아픈 부위가 다르고 강약이 다를 뿐입니다. 통증은 통증일 뿐입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진한 즐거움이나 승리한 즐거움이나 성취한 즐거움이나 즐거움은 같습니다. 승진한 즐거움은 빨갛고, 승리한 즐거움은 노랗고, 성취한 즐거움은 파란 것이 아닙니다. 색상은 그냥 색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입니다. 다만 보는 자의 마음 따라 좋고 나쁨을 다르다고 분간할 뿐입니다. 기쁨은 같은 기쁨이요 성냄은 같은 성냄이요, 슬픔은 같은 슬픔이요, 즐거움은 같은 즐거움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합니다. 전쟁이 없으면 전쟁영웅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희생되고 자연이 파괴된 대가로 영웅이 탄생한 것입니다. 어린이가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것은 전쟁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의사와 법관이 되기를 원하면, 장차 이 땅에는 병이 많아지고 범법자가 많아진다는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원을 한 자신이 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병으로 범죄자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나도 좋고 자연도 좋고 상대도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이치를 알고 처음부터 올바른 원을 세울 것입니다. 올바른 원을 세운 사람은 나타난 조짐에 대하여 순응하고 받아들이지만,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인과를 부정하고 나쁜 과보가 나타나면 도리어 원망까지 합니다. 모든 과보는 한 생에 지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에 지어 모은 것입니다. 그것도 나 혼자만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만물이 함께 어울려 동업으로 지은 결과입니다. 이러한 인 지음으로 자신과 부모와 권속은 과거 미래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해탈의 고리로 만들기 위하여 수행합니다. 수행 중에 삼세의 인과를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은 육자진언 수행입니다. 진언을 염송하면, 첫째 법신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고, 둘째 이전에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며, 셋째 마음 고치는 법을 깨닫게 됩니다. 깨달은 법대로 실천하여 부모와 권속의 은혜를 갚고 해탈하기를 서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입고도, 국가의 은혜를 입고도, 자연의 은혜를 입고도, 스승의 은혜를 입고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계속 받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으며, 노력하지 않고 요행으로 횡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으며, 정직한 사람은 적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으며, 건강한 사람보다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수행자 가운데도 계율을 지키는 자는 적고 파계하는 자가 많으며, 정진하는 자는 적고 게으른 자가 많으며, 지혜 밝은 사람은 적고 어리석은 사람이 많으며, 깨친 사람은 적고 번뇌로 산란한 사람이 많으며, 베푸는 자는 적고 인색하고 탐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모두 인과응보에 의한 모습들입니다. 인지어 받는 과보는 누가 있어 복을 주거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자연 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을 때 하늘이나 땅이나 부모나 이웃이나 상대를 원망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과 이치를 알기 위해 지혜를 일깨우는 수행을 합시다. 자신만을 위하는 수행이 아닌 자연과 뭇 생명이 모두 해탈하는 수행을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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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