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비용(智悲勇) 탐진치(貪瞋癡)

밀교신문   
입력 :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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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써 인을 하고 대비로써 행을 하고 용예(勇銳)로써 혹(惑)을 끊어 탐진치를 단제(斷除)하고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여 공덕 널리 회향(廻向)하여 삼세불을 갚읍시다.”
 
부처님 가르침 중심은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요, 정은 자신을 살펴보라는 뜻이며, 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어쩌다 순간의 잘못으로 불계(佛界)를 벗어나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면 사람의 업을 벗어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업은 삶이며 삶에는 자연과 조화하고 상대와 화합하는 선한 삶이 있고, 수라처럼 다투고, 축생처럼 우둔하고 아귀처럼 욕심 많고 지옥처럼 고통받는 악의 삶이 있습니다. 선한 삶은 쉽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악의 삶은 고통의 윤회를 반복하면서 본래의 자리와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본래의 자리와 점점 멀어지는 삶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멀어지는 근본이 되는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계를 말씀하였습니다. 45년간 설하시고 열반하시면서도 “계로써 스승 삼아라.”라 당부까지 남겼습니다.
 
계율은 자신의 마음을 밝힐 수 있는 수행의 준비단계입니다. 현실 생활을 하는 우리는 계율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몸으로 익히고 입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익힌 파계의 습관을 바꾸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습관을 바꾸려면, 지금의 행동과 언어와 마음 씀을 살피고 관찰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가능한 일에 말하고 행동하는지?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불필요한 망상과 헛된 꿈을 꾸면서 뜬구름 잡는 몸짓은 하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티끌이 있으면 제거하고 쌓였으면 털어내고, 탁하면 맑게 하고 어두우면 밝게 하면서 사람과 자연과 시간에 순응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찾지 못하면 스승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는 것이 진언 염송입니다. 부처님도 출가 후 많은 스승을 찾아 길을 물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며, 최후의 길을 알 때까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학(戒學)입니다. 계학이 원만한 연후에 정학(定學)에 들어야 합니다.
 
계의 단계가 원만할 때 할 때 보리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 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정각산에서 피골이 상접한 고행의 모습, 진각성존이 농림촌에서 행한 수행이 두 번째 정학(定學)의 모습입니다. 정학이 무르익으면 혜학(慧學)에 들어 마원을 항복 받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형상 없고 깨달음도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혜(慧)는 가장 밝고 가장 맑으며,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워 무엇으로도 비유하거나 비교할 수 없어 불가사의하고 미증유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알지 못합니다. 정(定)도 모르면서 혜(慧)를 어찌 알 것이며, 계(戒)도 원만하지 않은데 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방편으로 계정혜를 낮추어 설한 것이 계정혜 삼학(三學)입니다. 진각성존은 방편의 계정혜 삼학 중에 계학(戒學) 실천으로 지비용 탐진치를 설하였습니다.
 
중생이 사는 세상, 사람은 욕심(欲心)과 분심(忿心)과 용심(勇心)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과 분심과 용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욕심은 생명을 유지하는 요건이요, 분심은 게으름을 막는 마음이며, 용심은 부지런함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무기력하기 쉽고, 분심이 없으면 나태하기 쉽고, 용심이 없으면 방일하여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욕심과 분심과 용심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므로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도 욕심과 분심과 용심을 갖도록 하는데, 하물며 현실 생활하는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욕심은 바라는 마음이요, 하고자 하는 욕망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힘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죄악이 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의 물건을 뺏고, 못 갖도록 방해하며, 가진 자를 시기하고, 잘된 자를 질투하며, 가는 길을 훼방하고 괴롭힌다면 이것이 탐욕의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탐욕에 집착하여 남을 해치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연속적으로 행하면 이것이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분심(忿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심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냄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이 부족하여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성내는 것은 죄악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얻지 못함, 이루지 못한 것이 상대에 있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험담하고, 상대를 향하여 짜증을 내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큰소리로 성내며, 자신의 고통을 상대에게 전역시키는 것이 진심이 되는 것입니다. 진심의 분을 참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심을 가지고 자리를 옮겨가면서 두고두고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진심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용심(勇心)도 이와 같습니다. 용심은 방일함을 다스리는 용기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알아서 거꾸로 가지 않고, 만물의 존귀함을 알고, 사람의 도리를 알아서 순응하는 것이 용심이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의 행동, 시작이 반이다. 라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용심입니다.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고 순서도 모르고, 계획도 없고, 준비도 없이 탐심으로만 힘쓴다면 이것은 만용(慢勇)이 됩니다. 자신의 만용을 상대방에게 권유하면서 동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癡心]이며,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고집하면서 인과 이치를 부정하고 거듭거듭 고집하면서 동행하기를 강요하여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치심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새벽부터 정진하여 저녁에 깨닫지 못하면, 다리 뻗고 울었으며, 잠 오는 것을 성화하여 송곳으로 찌르는 분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욕심도 분심도 용심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탐심이 되고 진심이 되고 만용이 되며, 고치지 아니하고 바꾸지 아니하고 고집으로 거듭거듭 장소를 옮겨가면서 반복하여 자신과 상대에게 고통을 주면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법을 만났습니다. 탐진치를 바로 알고 다스리는 지비용의 활용법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좋은 것에 눈을 감고 좋은 말씀에 귀를 막았다면 이제부터 눈과 귀를 열고 바른 행동과 바른말과 바른 생각으로 방황의 여정을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권력만을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사회에 공존하면서 양보하고 화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놓는다는 뜻입니다. 탐은 탐대로 진은 진대로 치는 치대로 각각의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두고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미련도 갖지 말고 집착도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두면 됩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른 점은 부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한다는 것이요, 중생은 오욕칠정(五欲七情)에 물들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나만의 것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자신만을 위하면 탐욕(貪欲)이 되고, 탐욕은 인정(人情)이 되며, 인정은 사정(私情)이 되고 사정은 외도(外道)가 되어 순수성을 잃고 무한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습관이 된 탐진치(貪瞋痴)를 참회하여도 찌들은 독(三毒)은 쉽게 없어지지 않으며, 후일에 다시 범하게 됩니다.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은 되었지만, 다시 고통으로 돌아갑니다. 비유하면, 솥에 끓는 물을 차게 하고자 얼음덩이를 넣어도 차갑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궁이의 불이 있으면 솥의 물은 차가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탐진치 불꽃을 없애기 위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참회하고 실천하면서 좋은 행동과 좋은 말과 좋은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형상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내면의 성품(性品)으로 세상을 보아야 인과가 보입니다. 인정(人情)으로 세상을 보면 탐진치(貪瞋癡)만 보일 뿐입니다. 이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분심과 용맹심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탐진치를 잠재우는 계학(戒學)을 성취하기 바랍니다. 자비와 지혜와 용맹으로 씨 뿌리고 마음 밭을 가꾸어 현득성불을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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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