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27-고행(苦行)과 고생(苦生)

밀교신문   
입력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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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法身) 앞에 정진하면 중생고가 멸해지고 정진고개 난행(亂行)하면 소원함을 성취한다. 고생(苦生)하고 고행하는 두 고통(苦痛)이 다른지라.”
 
부처뿐인 법계, 우리는 본래 법신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었습니다. 형상 없는 비로자나불로부터 언제부터인지 알지도 못하는 영겁에서 형상을 만들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공연히 만든 형상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중생으로 윤회하면서 떠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체중생을 위하여 자비심 충만한 비로자나불이 중생의 형상으로 출생하고 출가하고 고행하고 성불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해탈의 법[불승법(佛乘法)]을 전하였습니다.
 
말씀은 먼저 우리 자신이 본래 비로자나불과 한 몸임을 알게 하고, 다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열반의 모습까지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출현한 화신불로 석가모니불 한 분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장원겁(長遠劫)에 1천 불이 출현하였고, 현겁(賢劫)에 1천 불이 출현할 것이며, 미래에도 1천 불이 출현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신 비로자나불의 자비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원겁의 마지막 1천 번째 불이 출현하여 열반한 이후 장원겁의 법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었습니다. 다시 현겁 1천불 중에 마지막 1천 번째 화신불이 열반할 때, 현겁의 법계도 성주괴공 하면서 미래겁이 시작될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과거 7불 중에 앞의 3불은 장원겁의 제998 비바시불, 제999 시기불, 제1,000 비사부불은 지구촌에 화현한 불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현겁의 법계입니다. 현겁의 제1 구루손불, 제2 구나함모니불, 제3 가섭불이 다녀갔고, 지금은 제4 석가모니불 시대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제5 미륵불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듯 네팔 룸비니 동산 주변에 현겁의 3불의 출생지가 있고, 석가불이 가섭존자에게 미륵불에게 전하라는 가사와 발우의 부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은 한 번의 출생으로 윤회를 벗어나 비로자나불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은 중생입니다. 삼계에 머무는 모든 생명체는 중생입니다. 중생은 끝없이 윤회하면서 몇 번이나 천상에 태어났고, 몇 번이나 축생으로 태어났으며, 몇 번이나 아귀와 지옥에 태어났으며, 몇 번이나 인간의 몸을 받아 오늘을 만난 것입니다.
 
윤회하는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인간의 삶을 익히고 간직하면서 익숙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익힌 습관은 몸이 바뀔 때마다 가물가물하는 중에 선과 악의 판단기능을 잃은 듯하나 인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가 되고 장소가 맞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생에 천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천상이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요, 지옥과 아귀 보를 받아보지 않았다면, 그곳의 고통을 모를 것이며,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축생의 성품을 모를 것이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의 삶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곳에 태어나든지 태어날 때, 가르침도 받지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환경에 적응하고 시간에 응함이 익숙할 수 있겠습니까? 천상의 좋음도 알고, 수라의 투쟁도 알고, 축생의 우둔함도 알고, 아귀의 목마름도 알고, 지옥의 고통도 알고,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안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으로 많은 생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현생만 존재한다.’ 생각하고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고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내가 무슨 인을 지어서 이렇게 좋고 나쁨을 받는가?’라고 인과적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느 생이었는지 모르지만, 부처님 법을 만나 인과 공부를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그 생에서도 악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면, 나누고 베푸는 마음보다 지니고픈 욕심이 더 많으며, 참는 마음보다 성내는 마음이 많으며,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으며, 슬기로움보다 어리석음이 많으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고통받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바세계는 고생의 괴로움이 있는 세계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생을 제공하는 인은 습관입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았으나 아수라처럼 투쟁하는 마음이 있고, 아귀처럼 욕심이 있고 축생처럼 어리석음이 있고, 천상처럼 교만심이 있고, 지옥처럼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면서 육도가 지닌 마음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 태어나 생활하면서 익힌 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익힌 세월이 얼만데 하루아침에 바뀌겠습니까? 윤회하는 가운데 사람의 몸을 받은 것은 습관을 버리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습관을 버리는 방법이 고행입니다. 고행은 즐거움을 동반한 윤회를 벗어나는 수행입니다.
 
‘어릴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때 고생은 고행의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고행의 인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고생을 스스로 찾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이 중생에게 고행을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최고의 고행 모습을 보이신 싯다르타 태자의 고행상을 보십시오. 괴로워하는 모습은 없고 평온하며 자비한 모습입니다. 고행이 괴로움이면 그것은 고행이 아닌 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고생은 악업을 녹이지만 해탈은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고행 모습을 봅시다. 몸으로는 결가부좌로 길상좌를 할 때 몸이 불편하여 통증이 있고 몸부림이 일어나거나, 정진을 마치고 몸이 불편하면 이것은 고행하는 몸이 아닙니다. 언어로는 염송하면서 들숨 날숨이 고르지 못하며, 소리가 잔잔하지 않고 굴곡이 있으며, 진언의 소리가 분명하지 않음은 고행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답답하거나, 불안하거나, 조급하거나, 잠이 오거나, 지루함을 느끼면 고행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즉 정진하는 자세에서 몸과 입과 마음에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우면 고행이 아닙니다. 고행은 즐거운 것이요, 편안한 것이며, 가장 안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질 때 시간을 뛰어넘는 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정진할 때나 정진을 마쳤을 때나 몸과 마음에 고통 없이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오히려 평소에 아팠던 몸이라면 건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어긋났던 뼈마디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바른 고행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습관이 바뀌는 고행으로 서원이 성취되는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행은 근기따라 각각 다릅니다. 중생은 중생의 고행이 있고, 아라한은 아라한의 고행이 있고, 연각은 연각의 고행이 있고, 보살은 보살의 고행이 있습니다. 중생의 고행은 형상이 아닌 심출가로 이루어집니다. 심출가를 하지 않은 고행은 고행이 아닌 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고생을 고행으로 바꾸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분심(忿心)입니다. 부처님은 자성을 찾는 수행으로 신심을 바탕으로 일체중생을 생각하는 자비심을 일으켜 흔들림 없는 용맹심으로 발(發)하여 난행고행(難行苦行)을 가르쳤습니다. 분발은 곧 분심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분심, 고통에서 오는 분심, 게으름에서 오는 분심, 못난 것에서 오는 분심, 가지지 못한 것에서 오는 분심, 낮고 작다는 것에서 오는 분심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심은 상대에 향한 원망심이 없어야 하며, 남을 핑계하지 않아야 하며, 질투심이 없어야 합니다. 진각성존은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분심을 참회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조급한 생각, 느슨한 생각, 게으른 생각, 미루는 생각, 답답함, 우둔함 허황함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별로 잘나지도 못하고 원만하지도 못하며, 능숙하지도 못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이 모양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를 상(相)이라 하여 크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나누어 봅니다. 하나의 상에서 벗어나는데 아승기겁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는 고행으로 찰나에 사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난행고행의 진언 수행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인과로 받는 고생을 벗어버리는 고행으로 현생의 고통에서 해탈할 뿐 아니라, 나아가 비로자나불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공덕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마음으로, 고행 정진하여 이루고자 하는 모든 서원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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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