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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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법의 정비와 종조의 열반

1) 교법의 정비
대종사는 법난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교가 당연히 깨칠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 아직 깨치지 못하므로 오는 일이라”하며 법난을 법문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법문의 하나로 “이것이 다 진리로는 급진적으로 발전하는데 완전한 교리를 구비하지 못한 까닭이다”는 심정을 표하였다.
 
심공하여 공덕을 얻는 진리는 교화의 발전을 통하여 급속히 보이고 있어도 진리를 구체적으로 체계화하는 교리는 아직 완전히 세우지 못하였다는 의미였다. 교리와 방편이 현실적으로 수행의 증험(證驗)을 확실히 보여서 교화발전은 크게 일어나지만 ‘교리의 보편적 체계’는 완전히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종단의 교리와 수행법의 ‘현량(現量)과 성언량(聖言量)’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량은 현실에서 실지 체험 증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성언량은 그것의 경전적 진리적 전거를 일컫는다. 따라서 종단은 교리와 수행법에 대한 경전의 전거와 체계를 구비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법난이 끝나자 교법의 정비를 위해서 경전의 번역과 공부에 힘썼다. 종단의 교법은 교리와 수행의 체계를 가리킨다. 종단의 교법 연구를 교의학이라 하고 줄여서 종학(宗學), 또는 교학(敎學)이라 부른다. 그러나 종학이라 하면 주관성이 강하게 표현되고, 교학이라 일컬으면 객관성을 더 느낄 수 있다. 종단의 교의학은 일단 종조의 가르침을 논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종조의 가르침이란 종조가 체험하고 이해한 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종학은 종조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논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첫째는 종조의 가르침에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이를 해명하고 자신도 종조가 도달한 경지를 추체험하여 남에게도 추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종조의 가르침에 단지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논증하여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에 주관성을 느끼고, 후자에 객관적인 인상을 더 받게 되므로 각기 종학과 교학이라는 말에 어울린다.
 
(1) 역경과 출판
종학이든 교학이든 그 연구에는 종조의 수행체험과 역사적 문헌이 바탕이 된다. 종단은 일찍이 헌법제정을 하면서 헌법의 신장부분에 개괄적 교법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교화 중에서 수행체험의 공덕은 크게 드러나도 아직 수행체험의 교리적 체계는 완전히 세우지 못하였다. 교리의 체계는 역사적 문헌을 통하여 전거를 찾아서 세울 수 있다. 역사적 문헌은 석존의 교설에 기초한 삼학소전의 문헌과 역대 조사들의 저서, 나아가 불교학자들의 연구서 등 불교의 기본사상을 가진다고 인증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중에서 삼학소전의 문헌이 중심이 된다. 그래서 필요한 문헌을 수집하고 섭렵하였다. 당시 대구 청구대학 강사인 강복수(운범)가 대학에 불교 관련 문헌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복수는 대종사가 강창호를 개명해준 이름이다. 강복수에게 대학의 도서를 심인불교에 양도하는 방안을 찾게 하였다. 그 결과 대학이 많은 불교 도서를 좋은 조건으로 양도해 주었다. 그런데 그 도서 중에는 밀교관계 도서가 다량 포함되어 있었다. 대종사는 그 도서들을 통하여 밀교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접하고 큰 관심을 가졌다. 밀교의 정신과 교리가 많은 부분에서 심인불교가 지향하는 정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법의 정비를 위해서 기본적인 경론부터 번역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경론 번역의 필요성은 일찍이 준비하고 있었다. 제2회 인회에서 ‘해인 번역과 편찬위원 선정 및 동 경비지출은 회장에게 일임한다(7,8.25)’고 결의하였다. 실제 해인번역은 오랜 기간 숙고와 준비 끝에 응화성전(應化聖典)의 번역을 시작으로 실행에 옮겼다(11,8.12). 역경을 시작하면서 경전과 해인(본존)의 인쇄를 횡서에서 종서로 변경하였다(11,8.13). 대종사는 특히 밀교의 현실긍정 정신과 비로자나불 사상에 매우 큰 동감을 하였다. 그리하여 심인불교의 교리와 수행법의 체계를 밀교의 정신에서 전거로 삼았다. 먼저 밀교정신을 담고 있는 문헌에서 종단의 교리와 수행법의 전거를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현교의 경전의 내용을 교화의 방편으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우선 수행과 교화에 방편이 되는 경론의 모음인 응화성전(應化聖典)의 편찬을 위한 문헌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심인불교의 정신과 맥락에 상응하는 밀교의 이론서로서 총지법장(摠持法藏)의 편찬을 위한 문헌도 수집 번역하였다. 총지법장과 응화성전의 편찬을 위한 문헌의 선정 작업에는 대종사와 함께 손대련과 강복수가 주도하고 박태화가 일시 참여하였다.
 
응화성전은 ‘불교요전(佛敎要典)’을 중심으로 하여 만해(萬海)의 ‘불교대전(佛敎大典)’의 내용을 선별하고 여기에 대종사가 마음에 담고 있던 경전을 포함하였다. 총지법장은 밀교의 문헌 중에서 중요한 경론의 내용, 그리고 만다라 수계의식 육자진언에 관한 내용과 대종사의 말씀 등을 담았다. 그리고 밀교의 기본경전인 대일경을 번역하였다(11,9.10). 그런데 대일경의 번역은 그 이듬해 6개월 만에 중지하였다(12,3.26). 대일경 번역을 중지한 이유는 경전의 내용 때문이었다.
 
대일경은 교리와 더불어 정치(精緻)한 수행의궤를 담고 있다. 대일경의 정치한 수행 의궤는 특정의 사람만이 수행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대중이 쉽게 동참할 수 있는 수행법을 바라는 대종사는 선뜻 수용하기 힘들었다. 역경 목록에 금강정경을 넣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대일경과 동시에 보리심론의 번역도 시작하여 일주일 만에 완료하였다(11,9.25). 보리심론은 심인불교의 전거로서 매우 중요한 관심을 받았다. 보리심론의 보리심의 발심 과정과 삼십칠존, 그리고 즉신성불의 내용이 심인공부와 크게 부합하였다. 이어서 심지관경의 보은품의 번역도 시작하였다(11,9.26). 심지관경의 은혜와 호국의 경설이 주목받았다. 함께 옥야경의 역경도 시작하였다(11,10.5). 옥야경은 부인의 도리를 설한 경이다. 심인공부는 가정이나 국가에서 부인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사람이 안의 마음을 잘 챙겨야 하듯이, 부인은 ‘심(心)의 주(主)’라고 여겼다. 가정과 사회의 발전에 부인이 ‘심(心)의 주(主)’의 역할을 해야 ‘물(物)의 주(主)’로서 남편이 바로 선다고 설하였다. 그리고 유마경 번역을 시작하였으나(11,10.11), 중지하였다가(12,4.10) 다시 계속하였다(12,8.20).
 
유마경은 유마거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설한 경이다. 종단에서 유마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유마거사 때문이다. 재속(在俗)에서 불법을 실천하고 전하는 교화활동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지법장을 출간할 때 유마경을 소의경전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결국 번역 후에 출판을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교화 중에서 유마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씀한 흔적은 매우 드물다. 유마경의 내용은 세간의 일반 대중보다 오히려 출가 수행자에 더 적합한 상단법문(上壇法門)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종사는 역경 시작 9개월 만에 역경작업을 일단락시켰다(12,4.19). 역경작업이 일단락되고 교화와 교리의 문제로 종단 내의 법문도 일어났다.
 
번역작업이 일단락되어 번역 내용을 검토하고 동시에 출판도 진행하였다. 총지법장이 출판되어 남산동심인당에서 경남북도의 스승이 참석하여 총지법장 반포불사를 하였다(12,4.20). 총지법장의 반포불사와 함께 총지법장을 널리 유포시키기 위해서 법시법(法施法)을 실시하였다. 얼마 후 응화성전 1집을 출판하고 역시 반포불사를 하였다(12,6.15). 응화성전은 내용이 아주 많아서 지속적으로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응화성전의 출판은 1집으로 그쳤다. 응화성전에 이어서 대한불교진각종 종지(大韓佛敎眞覺宗 宗旨)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였다(12,11.17). 대한불교진각종 종지는 대종사가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제5차 태국 방콕대회에 참석할 즈음 심인불교의 종지와 교의를 소개하기 위해 밀교 교리에 관한 자료를 편집한 소책자이다. 그러나 대한불교진각종 종지는 내용과 책의 한글본이 문제가 되어 실제로 대회에 가져가지는 못하였다. 이때부터 총지법장에 실은 내용을 별도로 교화 자료로 인쇄 배부하였다. 교화 자료는 대다수 석판(石版)으로 한지에 인쇄하였다.
 
먼저 보리심론을 해인꽂이에 걸 수 있게 석판 인쇄하였다(13,3.16). 교도들이 항시 낭독하여 경전의 뜻을 이해하게 하였다. 현밀이교론(顯密二敎論)도 게송체로 만들어 석판 인쇄하여 각 심인당에 배부하였다. 현밀이교론은 현교와 밀교의 내용을 비교하여 게송으로 만든 내용이다. 내용의 앞부분은 공해(空海)의 현밀이교론의 첫 부분이고, 뒷부분은 각반(覺鑁)의 오륜구자명비밀석(五輪九字銘秘密釋) 중에서 불도의 천심을 논하는 부분이다. 공해의 현밀이교론의 첫 부분은 산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게송으로 바꾸었다. 각반의 비밀석은 본래 게송으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는 현밀이교론을 인쇄 배부하고 또한 이것을 원고지에 옮겨 읽으면서 용어에 대한 주석과 더불어 자세하게 자증(自證)의 해석을 달아놓은 자료를 남겼다. 예를 들면 ‘현은 많은 명구로써 오직 하나 설함이요, 밀은 다만 일자문에 모든 뜻을 함장 한다’라는 구절에서 ‘일자문’을 ‘옴’자 일자로 주석한다. 그리고 ‘많은 명구로서 오직 하나 설한다’는 구절을 ‘팔만장경을 다 모아도 결국은 하나이다, 하나 진리이다’라고 해설한다. 다라니경도 역시 게송으로 만들어서 석판으로 대형 인쇄하여 각 심인당에 보내어서 공부하게 하였다(13,5.18). 다라니경은 ‘관세음보살육자대명왕신주경’의 내용을 가리킨다. 보리심론 공부와 함께 보리심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보리심의(菩提心義)를 대형으로 석판 인쇄하여 배부하였다(13,6.19).
 
종단은 밀교의 정신을 전거로 심인불교의 교법을 세우고 총지법장과 응화성전 등을 간행하여 교화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특히 총지법장은 교화에 활용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총지법장의 내용 중 전문적인 의식과 의궤는 실제 교화에 적용하기 힘들었다. 심인불교의 교화이념과 자증교설을 펴는데 상응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총지법장’과 ‘응화성전’을 개편하여 심인불교의 교법에 부합하고 교화에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교화교재를 편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법불교와 응화방편문을 간행하고(14,5.20), 다시 재판 발행하였다(15,12.28). 법불교는 총지법장의 편집 취지를 살려서 대종사의 자증교설을 중심으로 밀교의 교리와 수행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으로 편집 간행하였다. 응화방편문은 응화성전의 내용 중 필요한 부분을 적록(摘錄)하여 편집 간행하였다. 그리고 ‘법불교’와 ‘응화방편문’의 내용은 모두 게송으로 만들어서 간행하였다. 법불교는 법신불의 가르침, 즉 법신불의 종교라는 의미이다.
 
‘법불교’는 ‘불교는 다라니로써 흥왕한다’ ‘심인진리’ ‘자성법신’ 등의 교설을 실어서 심인불교는 법신불의 가르침, 법신불의 종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응화방편문은 ‘응화의 방편문’, 즉 교화에 방편이 되는 경문을 의미한다. ‘법불교’와 ‘응화방편문’의 간행은 심인불교의 교화교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한 역경과 출판 과정에서 출판사와 인쇄소를 직접 경영하였다. 역경하여 발간할 경전이 많아지면서 일반인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의뢰할 수 없어서 심인불교금강회해인행이라는 명칭으로 출판사를 설치하고, 또한 심인불교와 불교경전의 특수한 사정을 생각하여 인쇄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12,4.14). 해인행의 예산으로 팔정(八正)인쇄소라는 명의로 출판사를 설치하고 오상영, 윤성구에게 운영을 일임하여 수익금의 3할을 받기로 계약하였다(12,6.30). 그런데 교사는 출판사를 등록 신청하고(11,9.14) 등록증을 수령한(11,10.10) 사실을 밝히고 있어서, 이미 등록한 출판사를 다시 결의하여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심인불교금강회해인행은 순정(純淨)출판사의 명의로 다시 등록되었다(15,12.28). 팔정인쇄소도 운영 계약자 중 오상영이 탈퇴하고 윤성구의 부실한 운영으로 결손이 많아서 운영 계약을 해지하고(12,9.15) 다시 팔정(八淨)으로 개칭하여 해인행에서 직영하기로 하였다(12,11.1). 팔정인쇄소는 대동(大同)인쇄공업사로 명칭 변경하여 운영하였으나 계속 결손이 발생하여 소재지를 대구 공사부로 옮겼다(15,4.5). 그리고 인쇄소의 활자와 기구 등을 대구 남산동 금강회 회의실에 옮겨서 인쇄소를 설치하였다(16,3.31). 결국 대구에서도 인쇄소의 할 일이 별로 없어서 활자를 모두 매각하여 해인행 명으로 예금하고 폐지하였다(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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